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33)
1033화. 무제(武帝) (8)
“……그랬구려.”
공공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와 미안함이 섞인 얼굴이었다.
“하면, 지금 연 소부주는?”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음교의 추적대를 역으로 유인하여 협곡을 질주,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귀궁신녀 묵비와 검사 강량, 도객 진양, 그리고 암살자 사마현과의 합공으로 모두 물리친 후 현재 호남으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허어.”
공공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연 소부주의 능력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도리가 없구려. 그런 상황에서조차 전술을 짜서 습격 부대를 몽땅 제거했단 말인가.”
“그 상황에서 짠 것이 아니라, 미리 알고 계획해서 적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대단하구려.”
“그렇습니다. 자신의 능력은 물론 아군의 기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접한 적 없는 적의 병력과 흐름을 읽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물리쳤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대단한 공(功)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무림맹에 쌓은 공도, 묵룡부에 쌓은 공도 아니오.”
공공대사가 탄식했다.
“전 무림에 공을 쌓았소.”
“그렇습니다.”
공공대사는 눈을 감았다.
‘연 소부주.’
그와의 승부가 떠올랐다.
그들 정도의 고수에게, 비무란 단순히 무공의 우열을 가리는 싸움이 아니었다.
일격, 일격에 마음을 담는다. 상단전이 극도로 발달한 무극수들은 자신에게 향하는 상대의 무공으로 속내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그대가 택한 길인가.’
물론 무극수라고 다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야만 가능한 일이리라.
공공대사는 그때의 비무에서 연호정의 마음을 읽었다.
연호정의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이 아름다운 땅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겐가.’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본래 그와 같은 책임은 어른들이 짊어져야 마땅했다. 자신이나 군사, 혹은 봉공들이 지고 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단호했다. 그 마음이 그러했다.
당신들이 무너지면 전쟁도 힘들어지니,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모든 것을 자신이 이고 가겠다며 열렬히 외쳤다.
연호정의 마음은 그러했다.
“군사.”
“예, 맹주님.”
눈을 뜬 공공대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맹 내 정보부는 물론 개방에 연락을 취하여 연 소부주의 승리를 만천하에 알리도록 하시오.”
“예?”
“삼교는 연 소부주를 희대의 난적으로 인지하고 있소. 예전에야 애매했지만, 지금은 알겠소. 삼교가 연호정이라는 인물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걸.”
“물론…… 그렇습니다만.”
“지금까지는 연 소부주의 행적을 다소 숨기고, 묻기도 했소. 그것은 지나치게 부푼 연 소부주의 행적이 도리어 강호인들의 반감을 살까 염려했기 때문이었소만, 이제는 아니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공공대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연 소부주는 이미 강호의 영웅이오.”
“…….”
“누군가는 그러한 표현이 유치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본디 진리는 가까운 곳에서 당연한 말로 회자되듯 영웅의 존재 또한 그러한 법이오.”
“…….”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소.”
제갈문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공대사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 무림이 연 소부주의 업적을 알 수 있도록 널리 널리 퍼트리시오. 처음 출도했을 때부터 무림맹으로 들어와 어떤 일을 했는지, 이후 흑과 백을 오가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묵룡부의 작은 주인이 되려 했는지, 그리고 다시 무림맹으로 들어와 어떤 수난을 겪게 되었는지.”
“…….”
“그가 얼마나 많은 적을 죽이고 얼마나 많은 적의 계략을 분쇄했는지, 나아가 이번 전투로 어떤 적을 죽였으며 어떤 전략 전술을 썼는지까지 모두 세상에 알리도록 하시오.”
제갈문호가 읍하며 말했다.
“연 소부주의 영향력이 강호 무림 전체를 진동케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시오.”
“예.”
제갈문호가 총총걸음으로 물러났다.
잠시 후.
“멋진 판단이셨습니다.”
한옆으로 이어지는 회랑에서 모용군이 등장했다.
공공대사가 탄식했다.
“진즉에 그랬어야 했소.”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과거를 후회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합니다. 아니, 뛰어가야지요. 그래도 힘들 겁니다.”
“물론 그럴 것이오.”
“다행히 반흑파를 위시한 맹도들은 한껏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이럴 때 확실하게 기강을 잡아 둬야 합니다.”
“가주의 말이 맞소. 그러나 그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맹주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선단 말입니까? 대사님의 책임감이 누구 못지않다고 믿어 왔거늘, 설마하니 그 부담을 아랫사람들에게 지게 할 생각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하면?”
공공대사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이번 연 소부주의 명성을 드높이는 작업이 끝남과 동시에…….”
“……?”
“모용 군장을 소맹주로 삼을 것이오.”
“……!!”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공공대사는 그의 흔들리는 눈을 보았음에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를 맹주로 삼을 수는 없소. 전쟁이란 가혹한 법, 악하고 비정한 결단으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저주와 악업은 내가 이고 갈 것이오. 그러기 위해선, 아직 내가 맹주로 있어야 하오.”
“대사님.”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모용 군장이 선정을 베풀기 위해서는 그 역시 소맹주 직위로 전쟁에 참여하여 나름의 공을 세워야만 하오. 맹주 후보 정도의 위치로는 아쉽지.”
“…….”
“다행히 남궁과 팽가, 그리고 당가와 제갈가의 자식들은 맹주위에 관심이 없는 것 같소. 있어도 뽑기는 힘들겠지만.”
“…….”
“오구문 역시 마찬가지요. 그는 후보 중 가장 맹주위와 동떨어져 있소이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모용 군장을 소맹주로 삼아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
“모용가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모용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심경이 복잡할 것이다. 공공대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후.
“강호인으로서가 아닌 모용군 개인으로서 부탁 하나만 합시다.”
“말씀하시오.”
“그릇이 되지 못해 패배하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강호에서는 흔하디흔한 일이니, 그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지.”
모용군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위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면 적어도 우에게 무리한 일을 시키진 말아 주시오.”
“그것은.”
공공대사답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무림맹주 자리에 미련이 남은 모용군으로서 하는 말이오, 아니면 모용세가의 가주로서 하는 말이오?”
“그 무엇도 아니오.”
“……?”
“동생을 둔 형으로서 하는 말이오.”
공공대사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그놈에게는 못 할 짓을 많이 했소. 내 딸에게도 그랬지만, 나이 차이가 제법 큰데도 같은 세대를 공유했던 그놈은 부모 형제는 물론 가문에도 많이 치였소.”
“…….”
“나는 우에게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소.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자주 들으면 역겹기 짝이 없는 법. 그렇다고 맹주 후보가 된 녀석에게 가문을 이으라는 말도 더는 할 수 없소이다.”
“…….”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이렇게 맹주 앞에서 성질이나 부리고 있는 거요.”
“아니, 가주께서는 모용 군장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소.”
“……?”
“형제로서 더 아끼고, 더 사랑해 주는 것이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일을 시키지 않을 자신은 없소. 그리고 가끔은 무리한 일도 직접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보오.”
“…….”
“그러나, 모용 군장이 위험에 처하기 전에 내가 먼저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오. 그것만큼은 약속하겠소.”
모용군의 눈이 점점 충혈되었다.
한참 동안 공공대사를 말없이 바라보던 모용군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재능 넘치는 아이입니다. 부디 맹주님께서 잘 이끌어 주십시오.”
공공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모용군은 자신을 대사라고 불렀지, 명확하게 맹주라는 호칭을 쓴 적은 없었다. 해도 직접적으로 부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모용군은 자신을 맹주님이라고 불렀다.
태사의에서 일어난 공공대사가 반장례를 취했다.
“부족하나마 줄 수 있는 모든 걸 주겠소. 가주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길.”
자리에서 일어난 모용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모용군이 희미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우에게 줄 것이 남았군요. 애정 같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제외하고도 말이지요.”
* * *
제갈문호의 움직임은 빨랐다.
자연히 무림맹 정보부도, 개방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륙이란 말을 자주 쓰지만, 대륙에도 끝은 존재한다. 다만 그 끝을 어디라고 명확히 정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발 없는 말처럼 바람을 타고 흘러가 천지에 흔적을 묻혔다.
그 흔적을 읽은 사람들은, 비로소 연호정이라는 인물의 모든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스물이 되기도 전 가문에서 나와 구주명가를 무너트리고 광풍사, 벽산호장의 명성을 구가한 희대의 후기지수.
무림맹으로 들어와 노회한 정치꾼들과 맞서 싸우며 천하를 위해 독립 유군의 수장직을 따냈으며, 이후 온 천하를 돌아다니며 믿기 힘든 전공을 세운 남자.
지난 연호정의 행적들이,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천하에 울려 퍼졌다.
어떤 지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판단을 내렸으며, 어떤 식으로 적도들을 격파해 냈는지도 알려졌다.
지난 수년간, 연호정은 단 한시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저기에 적이 있으면 움직였고, 다시 반대쪽에 적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쏜살같이 달려 나가 일을 해결했다.
그렇게 흘러 흘러 지금이라는 시간에 도달한 연호정은, 무림맹 반흑파의 존재로 인해 전쟁이 끝나기 전 연씨 성을 버리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 말은 자칫 선조들을 욕보이는 발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간의 사정을 알고 들으면 연호정의 말도 안 되는 희생정신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었다.
실제로 강호를 살아가는 무림인은 물론 민초들까지 연호정이란 인물의 무서운 희생정신에 감동했다.
반흑파에 속한 무림인들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연호정이 이룬 업적을 들은 후, 그들은 스스로 맹의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백의종군하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강호를 몰랐던 자들, 강호를 잘 알고 있던 자들 모두가 연호정의 이름 석 자를 부르며 그를 칭송했다.
고작 보름도 되지 않아 연호정의 이름은 온 천하에 퍼졌고, 젊은 나이라 천하제일의 이름을 짊어질 수 없다는 의견도 쏙 들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연호정을 연가의 사람으로도, 묵룡부의 작은 주인으로도 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연호정이라는 사람을 그저 ‘연호정’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아가 사음교의 이호법과 무극수를 홀로 물리친 무력의 주인을, 흑과 백을 오가며 중원의 멸망을 막은 그를 더는 패왕이라고 지칭할 수 없다는 발언이 나왔다.
한 달 후.
세인들은 연호정의 무력과 정신을 칭송하며 그를 흑백무제(黑白武帝)라 부르기 시작했다.
성천을 대표하는 강자이자 새 시대의 천하제일인.
광신(狂信)의 삼교에 맞서, 강호 무림에도 한 영웅을 향한 광신이 일기 시작했다.
피 냄새 가득한 삼교와 다른, 희망과 승리를 바라보는 광신이 그 별호와 함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