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34)
1034화. 계승하다 (1)
“흑백무제라…….”
모용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참 부럽고도 과하고, 동시에 그 녀석에게 어울리는 별호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모용우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무제라.’
무의 제왕.
그야말로 오만하기 그지없는 별호였다. 단순히 별호만 보면, 삼백 년 전 고금제일인에 한없이 가깝다고 평가받는 사방무제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무제의 호칭을 가져간 인물이 연호정이었다.
제왕의 칭호란 곧 성천 내에서 일신과 이선 밑이다.
신선제왕급이라면 무력 간의 격차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는 소리가 있지만, 싸움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이룬 경지에선 차이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연호정이 성천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신선제왕이니 삼군이니, 그런 게 전혀 의미 없는 별호인 거다.’
흑백. 흑도와 백도를 아우르는 자.
그렇다면 무제란 무엇인가? 단순히 만 가지 무공에 능해 무제라는 별호가 붙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연호정의 전투술을 보면 그러한 의미로 써도 무방하긴 할 것이나, 실제로 세인들이 무제란 이름을 붙인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무제의 무(武)는 바로 무림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연호정에게 무림의 제왕이라는 호칭을 붙여 준 것이다.
이 얼마나 광오하고 기가 막힌 별호인가.
차라리 만능의 무공을 구사하는 고수라면 놀랄지언정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을 것이다. 모든 무공에 통달한 천하제일인이나, 아직 연배가 젊어 차마 신선의 칭호를 주지 않았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무림의 제왕이라니.’
이 흑백무제라는 별호엔 강호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염원과 희망, 감동이 실려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무림맹주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을, 연호정은 그 나이에 이룬 것이다.
모용군은 재차 쓴웃음을 지었다.
‘그 녀석과 암묵적으로 손을 잡았는데도 이런 순간마다 쓸데없는 씁쓸함을 느끼는 걸 보면, 빈말로도 그릇이 크다고 볼 순 없겠어.’
눈을 뜬 모용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만한 별호를 얻을 만한 인재이긴 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랬더냐.”
“예.”
모용군이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모용군의 외양은 상당히 초췌했다. 언제나 말끔하게 깎여 있던 수염이 지금은 덥수룩했으며, 의복 역시 곳곳에 주름이 지고 후줄근했다.
모용우는 모용군이 지난 한 달 동안 거처에 틀어박혀 무언가에 정신없이 몰두했다는 걸 알았다.
‘도대체 무엇에?’
지금껏 모용군은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뭔가 문제가 있을수록, 심각한 일이 터졌을수록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모용군의 성격이었다. 절대로 힘든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 주지 않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모용군은 달랐다.
외양도 외양이지만, 기도 또한 조금 불안정했다. 동공과 흰자위가 선명했던 눈에도 핏발이 섰다. 평소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질감이 들 정도였다.
모용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
“…….”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연호정 그놈이 성천은 물론 천하를 대표하는 명성을 얻었잖느냐. 배가 아파서 살 수가 없다.”
농담이었지만, 얼굴이 워낙 안 좋아서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형님.”
“무엇 하나 따라잡기가 힘들구나. 하기야, 따라잡을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다. 나는 나야. 내가 바라는 길, 내가 정한 길을 가기만도 벅차거늘 어찌 타인의 일에 이리 일희일비하고 있는지.”
“…….”
“너만은 그러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타인에게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예?”
“만인에게 존경받는 무림맹주가 되어, 훗날 연호정 이상의 명성을 쌓으라는 말이다.”
모용우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그 역시 공공대사에게 들었다. 조만간 무림맹 소맹주로서 살아가게 될 거라고.
역대 무림맹엔 소맹주라는 직책 자체가 없었다. 다른 조직과 달리 무림맹은 연합체였고, 한 사람에게 절대적인 권력이 몰리는 일도 없었기에 후계자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 다르고도 다른 시대에 태어난 모용우는 무림맹 최초의 소맹주로서 역사에 이름을 새길 것이다.
“저는…….”
설마 ‘모르겠습니다’ 따위의 말이 나올까 싶어, 모용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모용우가 조금은 담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보다도 무림맹주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겁니다.”
“…….”
“제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말입니다.”
모용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확실하냐?”
“본래는 무림맹주가 되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습니다.”
“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는 법이지요. 누군가는 저에게 말할 겁니다. 너 스스로 선택하지도 못하는 삶을 사는 주제에 누굴 이끌 것이냐고.”
“그럴 수 있지.”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할 겁니다. 격동하는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본 적이 없다면, 나는 당신들의 말을 코웃음 치며 흘려 버릴 것이라고.”
“허허.”
모용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동생의 포부가 기뻤고, 동생의 변화가 기특했다.
동시에, 제아무리 꿈이 커도 시대의 선택을 받는 자리는 단순히 노력으로 거머쥘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잠시 나갈까.”
“예? 아, 예.”
두 사람이 널찍한 후원으로 나갔다.
모용우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등을 보이고 선 모용군. 뒷짐을 진 채였는데, 그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모용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나도 몰랐다. 그저 상고(上古)의 무학인 줄로만 알았을 뿐.”
“예?”
“전전대 가주, 즉 조부님께서 발견하신 이 무공은 아버지께서 해석을 끝마치셨다. 그리고 내가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했지.”
“……?!”
“하나의 심법과 하나의 검법.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능히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보았고, 아버지와 조부님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으셨지.”
“……!!”
“폐관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이 무공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상무 연합에 있을 때 깨달았다. 나는 아직 이 무공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모용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본디 이 무공은 아주 오래전, 본가의 어느 천재가 창안한 무공이라 하였다. 문헌이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께 그리 들었다. 아버지는 조부님께 들으셨겠지.”
“…….”
“아주아주 오래전이었지만, 그때도 가주 쟁탈전은 있었던 모양이다. 이름은 모르겠으나 당시 장남은 건곤백팔검해(乾坤百八劍解)의 원형이 되는 무공을 한계까지 익혔고, 마지막 경쟁자인 막냇동생은 그 무공을 한층 발전시켜 이 무공을 만들었다.”
“……!”
“그것이 바로 뇌정공(雷霆功)과 무정천뢰식(無情天雷式)이다.”
모용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형님, 설마?”
“외부인을 끌어들여 막냇동생을 죽인 장남은, 자신 역시 벽력무(霹靂武)에 비견될 만한 무학을 창조하겠다며 자신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재능의 한계가 드러났고, 이후 수 대가 지나서야 팔극심법과 백팔검해가 탄생했다.”
“……!”
“즉, 네가 익힌 건곤무와 내가 익힌 벽력무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벽력무의 성취를 빠르게 올릴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모용군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은 여전히 충혈되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몹시 맑았다.
“이 무공이 왜 사장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장하려면 불태우면 그만인 것을, 어째서 고이 묻어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모르는 시대에,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있었겠지.”
“…….”
“그러나 장담컨대, 벽력무의 위력은 건곤무보다 위다. 안정성과 폭넓음에선 건곤무가 앞서겠지만, 출력과 성장세에선 벽력무를 따라올 수 없다.”
“…….”
“오랜 연마 끝에, 나는 깨달았다. 내게는 벽력무가 건곤무보다 어울린다는 것을. 너에게는 어떤 무공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 저는 그것을 익힐…….”
“건곤무와 벽력무는 본가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 속에서 발전된 무공들이다.”
“…….”
“그 무공이, 차후 천하제일의 무림맹주가 구사하는 절기로서 만천하에 이름을 날린다면 모용세가 역사에 그와 같은 영광은 또 없을 것이다.”
“……형님.”
“나아가, 무림맹주라는 자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당대 최고가 앉는 자리다. 섣불리 무력을 보여 줄 필요는 없으나, 한 번 보여 줄 때 만인을 압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모용군의 얼굴이 엄해졌다.
“네가 정녕 맹주로서의 길을 걷겠다면,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미안함 때문에 얻을 힘도 얻지 못하는 머저리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떨리는 눈으로 모용군을 보던 모용우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모용의 무공으로 천하에 족적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오냐. 나아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무인이 되어야 한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모용군은 그제야 마음 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품에서 책자 두 권을 꺼내 모용우에게 건넸다.
“받거라.”
“예.”
책자들은 생각보다 얇았다.
그러나 모용우에게는 천근의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원본을 보고 해석했다. 본래는 해석본을 주려 했지만 관두었다. 구결과 법문을 직접 보고 그 안에 깃든 속뜻을 스스로 밝히고 연마해야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한 권의 책자에 심법과 검법의 요결이 들어 있다. 나머지 하나엔 내가 벽력무를 익히며 얻은 깨달음들이 두서없이 적혀 있다.”
천하의 모용가주가 직접 얻은 깨달음이 적혀 있단다. 성천을 제외하곤 수위를 다투는 무인의 깨달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천금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스르릉.
모용군이 검을 뽑았다.
“요결만 보면 형(形)은 알아서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 형식을 섬세하게 가다듬으려면 못해도 삼 년 세월이 걸릴 것이다.”
스르릉.
모용우 역시 탕마신검을 뽑았다.
“검과 검을 맞대며, 이 우형(愚兄)의 검로를 들여다보아라. 삼 년 세월을 석 달 열흘의 시간으로 줄일 수 있다면, 너에게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겠다.”
“…….”
“자, 오너라.”
모용우는 힘차게 검을 내질렀고, 모용군 역시 진지하게 동생의 검을 받아 주었다.
“아니, 거기서는 그리 받아선 안 되지. 왼발을 반 치 앞으로 내밀어 힘의 방어를 세운 후 백팔검해의 천망지검(天網之劍)으로 압박해야 후속타를 끊을 수 있다.”
“좋구나! 방금 그건 괜찮았다. 실전을 오래 겪다 보니 순간순간 살검이 튀어나오지만, 살검도 제때 써야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조금 전 그 일격을 기억해 둬라. 본능만으로 싸우려 들다간 머리 좋은 삼류에게도 당할 수 있는 게 이 바닥이다.”
내공까지 써 가며 서로의 힘을 끌어내는 비무가 아니기에 박진감은 없었다. 그러나 두 이복형제가 서로를 이해하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검술 대련은 세상 어떤 싸움보다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모용군은 기꺼이 선생이 되어 주었고, 모용우는 마음을 다해 새로운 무학을 배웠다.
다시 다가오는 겨울.
강호에 드리워진 불길한 암운을 보며, 각지에서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