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36)
1036화. 계승하다 (3)
고요하게 타오르는 향.
한 줄기 연기가 부드럽게 천장으로 올라간다. 천장으로 올라간 연기는 어느새 흐릿해지다 사라졌다.
그러나 남궁표의 눈에는 달랐다.
흐릿하게 흩어졌던 연기가 다시 뭉쳐지며 과거의 수많은 장면을 보여 주었다.
남궁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많은 장면 중 아버지가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했던 아버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돌진했던, 그러나 올바른 노력은 하지 않았던 아버지.
처음에는 몰랐지만, 조부님께 다시 수련을 받고 오면서 그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애써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최고가 되고자 했다. 아버지의 방식을 부정하는 순간 자신의 과거도 부정되는 것이다.
‘내 잘못이다.’
남궁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내가 아버지를 막았다면, 적어도 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그건 아니지.”
깜짝 놀란 남궁표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조부가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부님.”
“얼굴에 자책이 그득하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이미 지나 버린 일을 후회하진 말거라.”
남궁표의 얼굴에 착잡함이 일었다.
“가문의 장남으로서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참으로 기특한 발언이다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저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제가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했다면 아버지께서도…….”
“아니다.”
“…….”
“네 애비는 결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남궁승은 방으로 들어와 남궁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나의 위패, 그리고 하나의 향.
자식을 잃은 허망함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래도 남궁승은 지쳐 보였다.
하나뿐인 자식의 시체는 가문의 무사들에게 맡겨 안휘로 보냈다.
마음 같아선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림맹은 이제 새롭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런 순간에 맹의 무상과 남궁의 후계자가 함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네 애비는 그렇게 굳어져 버렸다. 최고를 원하지만, 최고가 되기 위해 올바른 노력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 그렇다고 포기도 안 되고, 한발 더 나아가지도 못하는 상태로 수년을 살았다.”
“…….”
“사람은 변화한다. 하지만 나나 너의 조언으로는 변화를 유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궁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세상은 남궁인을 나쁘게 봤지만, 그래도 남궁표에게는 하나뿐인 아버지였다. 검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자 차기 남궁가주로서 천하를 제패해야 한다며 껄껄껄 웃음 짓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나도 네 애비가 보고 싶다.”
부족한 자식이었고 엇나간 자식이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기도 했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니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야 한다며 악을 쓰던 아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나는 네 애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 수련 때문이 아니야. 그것이 올바르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
“그러나……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도, 나는 네 애비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을 것이다.”
남궁표가 고개를 떨구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 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자식을 잃고 손주를 잃었다. 분가(分家)한 남궁의 혈족들이 많다고는 하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게는 이제 너와 상화만이 남았다.”
“…….”
“맹세해라. 가주가 되기 전까지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예.”
“좋다.”
남궁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거라.”
“예?”
“맹주전에서 날 부르기 전까지,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전수할 것이다.”
“……!!”
“종리 늙은이와 그의 제자도 함께하겠다고 하였다. 지금은 애도할 때가 아니라 나아가야 할 때다. 전쟁이 멀지 않았어.”
남궁표의 눈이 번쩍였다.
등을 돌린 채 걸어 나가며, 남궁승이 말했다.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적어도 네 애비보다는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 * *
“아버지?”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어떠한 반론도 듣지 않겠다. 이것은 아비로서가 아니라 가주로서의 명령이다.”
“하지만……!”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제갈준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표정의 제갈준. 마음에 어떠한 흔들림도 없는 듯했다.
“준이 너도……?”
“예, 물론입니다.”
제갈준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멍청아! 그게 왜 상관이 없어!”
제갈아연이 제갈문호에게 말했다.
“재고해 주세요, 아버지. 자칫 잘못하다간 나쁜 선례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무림맹의 군사가 된 이후 가문의 일에 소홀했지만, 그래도 아직 내가 가주다. 가주로서 가문에 해가 될 일을 할 만큼 애비는 멍청하지 않다.”
“……!”
“준이와도 얘기를 마쳤다. 준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식들을 믿는다. 아연이 너도, 준이도 한낱 권력 때문에 피를 볼 정도로 나쁜 아이로 키운 적이 없다. 너희 둘을 믿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제갈문호가 탁자에 놓인 책자를 제갈아연 앞으로 밀었다.
“기본 골조는 너 스스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제갈아연은 그 두꺼운 책자를 바라보았다.
성라신공(星羅神功).
제갈세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비전의 무공이었다.
제갈세가에도 일류 무공은 많다. 하지만 이 성라신공이 비전으로 내려오는 이유는, 이 무공으로 기존의 신공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어 더 높은 성취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라신공 자체로도 초일류의 신공이며, 다른 무공과 합일되어 극한의 위력을 자아낼 수 있다. 특히나 진기의 밀도를 올리고 감각을 활성화하는 데 이만한 무공이 없어서, 역대 가주들은 꼭 성라신공을 익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성라신공이 가주지학(家主之學)이라는 뜻이다. 오직 가주와 차기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의 무공이요, 제갈세가의 무리(武理)가 집약되어 있는 깨달음의 보고가 곧 성라신공이었다.
“준이는 이미 성라신공으로 자신의 무공을 분해하여 자신에게 맞는 무공으로 고쳐 나가고 있다. 이 애비는 재능이 없어 서른이 넘어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준이는 이 애비보다 십 년이 빠른 셈이다.”
“…….”
“걱정하지 말거라. 준이는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다. 이대로면 무력만으로는 본가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주가 될 것이다.”
제갈문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너의 재능이 뛰어나니 이것을 연마하여 훗날 준이를 많이 도와주거라. 물론 네 삶을 찾는다면 굳이 도움을 주지 않아도 좋다.”
“아버지…….”
“냉정히 말해서, 지금 네가 익힌 무공 역시 몹시 뛰어난 것이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너의 진기와 혈도, 단전을 살펴본 결과 성라신공과 아주 잘 맞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
“다른 무공과 섞을 생각 말고, 성라신공 자체를 연마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제갈아연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아버지와 동생이 자신을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잘 아는 그녀였다. 하지만 가주지학을 익히라고 무공을 건네준 지금, 그녀는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그런 의도가 아님에도 마치 자신을 떠나보내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제갈문호가 말을 이었다.
“너는 하나뿐인 내 딸이다. 그러나 네가 설령 아들이었다 해도, 나는 네게 소가주직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네?”
“재능이나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너는 본가의 가주위에 어울리는 녀석이 아니다.”
“……!”
“너의 눈은 언제나 세상을 보고 있었다. 자유를 갈망했고, 삶 속의 이치를 찾아내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런 아이에게, 설령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다 한들 어찌 가주위를 맡기겠느냐. 가문에도, 너에게도 큰 불행임이 분명하거늘.”
“…….”
“너는 타고난 재능과 목표가 있음에도 굳이 이곳에 눌러앉아 애비를 도왔다. 애비는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솔직히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너도 네가 원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애비와 동생이 눈에 밟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모욕하는 처사임을 깨닫거라.”
“저, 저는 그런 생각이…….”
“안다. 그런 생각이 없었음을. 그러니 너 역시 오해하지 말고 이 무공을 받거라.”
떨리는 눈으로 제갈문호를 보던 제갈아연이 천천히 책자를 집어 들었다.
무겁다.
그 어떤 비급보다도 두꺼웠다. 하지만 실제 무게보다 이 비급에 실린 마음의 무게가 훨씬 묵직하게 전해졌다.
가만히 딸을 바라보던 제갈문호가 툭 던지듯 말했다.
“너의 머리와 재능이라면 열흘 안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게다.”
“…….”
“다 익히면, 연 소부주에게 가거라.”
제갈아연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
“연 소부주에게는 군사가 필요 없다. 하지만 연 소부주의 몸은 하나야. 그도 누군가에게 일을 맡겨야 할 때가 분명 생길 것이다.”
“아버지! 저는 무림맹에서……!”
“진정 이곳에 있고 싶으냐? 아니면 그와 함께하고 싶으냐?”
“…….”
“삶은 성공과 실패의 반복이다. 그러나 성공을 맛본 자도, 실패를 맛본 자도 열정적으로 도전해 봤다는 공통점이 있다.”
제갈문호의 얼굴에 엄기가 어렸다.
“좋든 싫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네 마음이 그와 같다면 거침없이 달려 나가야 한다. 너는 다 컸어. 더는 네 마음을 속이지도, 네 꿈에서 눈을 돌리지도 말아야 한다.”
“…….”
“연 소부주에게는 내 따로 연락을 넣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전략적으로 봤을 때 네가 묵룡부로 가면 무림맹에도 이익이다. 연 소부주는 흑백의 교각으로서 무림맹에 왔어. 큰 사건이 있었지만, 그의 존재 덕분에 두 집단의 관계가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
“이제 네 차례다. 무림맹에서 파견한 사절로서 흑백의 관계가 망가지지 않도록 질긴 끈이 되어 주거라. 너의 능력이라면 묵룡부의 흑도인들에게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갈아연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적이 될 수도 있는 곳에 딸을 보내는 비정한 아버지 같겠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제갈문호는 딸을 독립시키려 하고 있었다.
딸이 원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칫 위험해질 수 있는 길로 자식을 보내는 아비의 마음은 당사자의 마음보다 훨씬 더 처참하고 애통하리라.
제갈아연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 말 외에 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기에, 제갈문호는 웃었다. 걱정에 밤잠을 설치겠지만, 지금은 세상을 향해 한 발을 내딛는 딸의 용단에 기뻐해야 할 때였다.
“잊지 마라. 너는 내 딸이요, 차기 가주의 누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 너를 해하려 한다면 본가와 분가는 물론, 우리와 연이 있는 유림(儒林)까지도 들고 일어날 것이다.”
“네!”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네 꿈을 펼쳐 보거라.”
그렇게 제갈아연의 묵룡부 행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