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37)
1037화. 계승하다 (4)
저 멀리 무수히 많은 부대가 제각기 진을 짜며 훈련을 거듭했다.
빠르고 격정적인 훈련이었다.
광풍단과 도룡단, 참호단이 제각기 쪼개져 수십 개의 진형을 형성했고, 혈응대와 비사대 등은 하나가 되어 횡진과 종진을 끊임없이 바꿔 가며 가상의 적과 싸웠다.
그중 압권은 역시나 용아철기단이었다. 신마림 사태가 진정된 후 곧장 귀환한 황석태는 가일층 섬세해진 전술로 부대를 이끌었다.
‘장관이군.’
임무를 나간 부대를 제외, 거의 모든 부대가 평야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따라 성장한 묵룡부의 부대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무력을 손에 넣어 세상을 호령했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처음 흑도를 일통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이 많은 고수를 거느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꿈은 꾸었지만, 그것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며 운도 따라 줘야 했다.
다행히 수하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꿈에 동참하며 여기까지 발전했다.
그것이 못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멋지군요.”
“그렇지?”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영약을 아낌없이 퍼붓고,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얻은 무공들을 개조하여 전수했다. 창설 이후 초창기 때만 해도 죽고 죽이는 훈련을 거듭했어.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참 지독했구나 싶다.”
“사상자도 많이 나왔겠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나는 죽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꿈과 이상을 위해 남은 사람들에게 제안했을 뿐.”
“…….”
“수백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죽어 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꿈과 목표를 담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어. 죽은 수하들의 마음을 받은 수장은, 더는 자유로울 수가 없거든.”
“이해합니다.”
양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태가 조금 달라지기는 했어도, 나는 여전히 천하를 질주하고 있다. 죽은 수하들도 나를 이해해 줄까 걱정이 많았지만, 적어도 욕은 안 하겠지 싶다.”
“그럴 겁니다.”
양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연호정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
“일어나거라.”
연호정이 몸을 일으켰다.
양천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단둘이 보는 거, 참 오랜만이구나.”
“그렇습니다.”
양천은 이십오 일 전에 묵룡부에 도착했다.
하지만 연호정과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연호정이 미리 양천에게 연락하여, 한창 손보고 있는 거대한 성에 들어가 그곳을 관리, 감독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터지지 않아도 묵룡부는 성으로 이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금, 함부로 병력을 이동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따져 보기 위해 연호정은 직접 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양천과 재회했다.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금세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역시나 너와 얽히면 일이 예상대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하하.”
“해서, 어떻더냐? 우리가 새로 이주할 곳은?”
“멋집니다. 터도 좋고, 이미 칠 할 이상 완성되어 있더군요.”
“칠 할? 벌써?”
“말이 칠 할 이상이지, 당장 이주해도 지내는 데에 아무 불편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어쩐지 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구나.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줄 테니, 어서 이주해서 전쟁 준비나 하라고.”
연호정도 마주 웃었다.
“잠시 걸을까?”
“좋습니다.”
두 사람이 언덕 주변을 걸었다.
“인상적이구나.”
“예?”
“네 무공 말이다. 못 보던 새에 또 성장했어. 이제는…….”
“…….”
“나라도 이길 자신이 없다.”
이기지 못할 거라는 말을 하면서도 질투나 씁쓸한 감정 따위는 전혀 없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저야 천재 아닙니까.”
“망할 놈 같으니라고. 너는 천재가 아니라 하늘이 실수로 내린 마귀 놈이다. 어쩌다가 너 같은 놈하고 얽히게 된 건지 모르겠어.”
혀를 끌끌 차던 양천이 말을 이었다.
“수하들에게 말해 놨다. 준비들 하라고.”
“역시 사부님이십니다.”
“이주 준비나 전쟁 준비 말고.”
“예? 그럼요?”
양천이 걸음을 멈추었다.
“부주 이양.”
“……?!”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사부님.”
“물론 나야 태상(太上)이 될 테니까 부주직 넘긴다고 막 나가면 안 된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양천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연호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라니? 정녕 몰라서 묻는 말이냐?”
“예.”
“웃기고 있네. 너처럼 감 좋고 눈치 빠른 녀석이 모르긴 왜 몰라.”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 부주직을 이양하려 하십니까?”
“그럼 이양 안 하고 이대로 쭉 갈까? 다시 황궁으로 가야 하는데?”
“……!”
“물론 나도 자신 있다. 애들 끌고 싸움박질하는 거, 아주 신나겠지. 게다가 직접 키운 애들이니까 손발도 척척 맞을 거다.”
“…….”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적어도 흑도에서는 그러하다.”
양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무력 이전에, 너의 통솔력과 지략은 온 천하에 따를 사람이 몇 없다. 다른 걸 다 못해도 선견지명을 지닌 군략가는 필승의 결과를 내는 법. 하물며 군략가로서의 소양 또한 전부 갖춘 너에게 병력을 내주지 않는다면, 어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느냐.”
“사부님.”
“게다가 묵룡의 무사 중 너에게 감화된 사람들도 많다. 특히 이번 소문이 결정타였지.”
“소문이라니요?”
“아, 너는 못 들었느냐? 하기야 성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을 테니.”
양천은 세상에 퍼진 연호정의 이야기와 새롭게 바뀐 그의 별호도 알려 주었다.
“흑백무제…….”
연호정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별호 한번 기가 막히게 만들었지. 듣자마자 네가 살아온 인생이 눈앞에서 파바박 펼쳐지는 게, 패왕 같은 별호보다 만 배는 더 좋구나.”
연호정이 힐끔 양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청출어람 한번 제대로 했네요.”
“썩을 놈. 하기야 뭐, 말이 사제지간이지 어릴 때부터 봐준 것도 없는데.”
“그래도 사부는 사부죠.”
“그런 식으로 몇 명의 사부를 뒀냐?”
“사부님까지 둘입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첫 사부님께서는 등선하셨지요.”
정말로 등선했지만, 양천에게는 그냥 죽었다는 말로 들렸다.
“그랬구먼. 어떤 분이셨느냐?”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침침한 하늘 아래서도 사부를 떠올리면 세상이 밝아지는 듯했다.
“생명의 은인이시지요. 사람 구실 못하는 머저리를 이 정도로 키워 주신 분입니다.”
“역시 무공은 강했겠지?”
“온 천하에 적수가 없으셨지요.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인(神人)이셨습니다.”
연호정의 진지한 말에 양천이 혀를 내둘렀다.
“강호에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다지만, 네가 그 정도로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끝장나게 강했겠군.”
“그렇습니다.”
“아쉽군. 한번 만나라도 봤으면.”
연호정은 그저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반발이 심하지는 않았습니까?”
“뭐? 부주 이양?”
“예.”
“반발이 있을 턱이 있나. 내 명령이면 끔뻑 죽는 놈들인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설득이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양천은 차분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고, 부하들은 탄식하며 수긍했다.
“부하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 네가 된 것이지만, 너는 너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 줬다. 게다가 이번 천하를 휩쓴 소문 덕에 벌써부터 사기가 잔뜩 올랐어.”
“그렇군요.”
“다만, 십이지신은 내가 끌고 다녀야겠다.”
십이지신의 몇몇 고수들은 양천이 흑도를 통일하기 전부터 함께해 온 인연이었다.
묵룡부의 사람이 아니라 부주인 양천의 사람이라는 뜻. 떼어 내려면 떼어 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함께해 온 부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오히려 붙어 있겠다고 하면 어서 사부님 따라가라고 회초리를 들었을 겁니다.”
“껄껄.”
“부주라……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흑도 연맹의 주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언제고 물려받을 생각은 있었잖느냐?”
“차라리 물려받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양천은 연호정의 마음을 이해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가 필요로 인해 맺은 업무적인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즉, 묵룡부의 작은 주인이 되었으나 부주직을 이양받을 이유는 없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연호정은 소부주직을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부주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전쟁이 터지지 않기를 바랐다는 말과 같다. 삼교 타도를 외치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이 부담스럽기는 연호정도 마찬가지란 말이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냐?”
“부주가 되면 멋대로 난장 쳐도 됩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안 그럴 거냐?”
“아니요.”
“그런데 왜 물어봐?”
“조직 이름 좀 바꿔 보려고 그럽니다.”
양천의 눈이 커졌다.
“그건 좀 그렇지 않냐? 내가 얼마나 고심해서 지은 이름인데.”
“좀 유치하던데요.”
“이놈의 자식이?”
“하하. 그럼 됐습니다. 유치해도 역사에 새긴 이름이 있는데, 안 바꿔도 괜찮습니다.”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양천이 툭 던지듯 물었다.
“이주하면서 바꿀 생각이었느냐?”
“허락해 주시면요.”
“허락은 무슨. 흑도는 백도와 다르다. 주인이 곧 모든 것을 손에 넣는 거야. 말하자면 왕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요.”
“이름을 바꾸든 조직을 개편하든 왕의 마음이지. 물론 그로 인한 여파가 너무 심해서 조직이 뒤흔들릴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잖느냐.”
“음, 그럴까요?”
“……솔직히 자신은 없다. 십이지신이야 원래 나와 함께해 왔으니 뚝 떼어 갈 생각이지만, 장로들은 달라.”
“장로라.”
“내 권력이 워낙 강해서 숨도 못 쉬고 있을 뿐, 장로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이들이다. 무림맹 봉공들이나 장로들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하나하나가 피비린내 나는 강호 생활을 거쳐 오며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이지.”
“…….”
“무력의 문제가 아니라 영향력의 문제다. 물론 네가 어지간히 알아서 잘하겠느냐마는, 왕국만 해도 정권 초기에 신하들 휘어잡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지 않느냐?”
“그렇지요.”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피식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하긴, 그런 놈들 두들겨 패서 할 일 하게 만드는 거, 잘하지 않느냐. 네가 감당할 자신이 있으면 그렇게 해라. 나는 이제 흑도 연맹의 태상일 뿐, 주인은 아니니까.”
“그렇게 들으니까 조금 슬프군요.”
“그래, 당사자 대신 슬퍼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니까 다행이다. 내가 아주 헛살지는 않았어.”
“하하하.”
“대신 피는 보지 말아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 죽어 나갈 일이었다면 바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련하시겠어.”
투덜거리던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한데, 생각해 둔 이름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뭔데?”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흑제성(黑帝城)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