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39)
1039화. 계승하다 (6)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정안과 연심의 자태는 제법 험했다.
얼굴이 꾀죄죄하다거나 머리가 산발이 되는 등의 외관은 아니었다. 피부만 보면 내공을 익힌 여인 특유의 해사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옷이 무척 낡았다. 여기저기 베이고 찢긴 부위들을 꿰맨 자국이 역력했다. 산중 생활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마음은 어때요?”
“마음이라.”
정안의 물음에 연심이 미소를 지었다.
“어지러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네.”
언제나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표정과 눈빛은 부드럽고, 또한 단단해 보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공 이전에 심성이 단단해졌다. 무인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성장이었다.
“역시 강해지셨어요.”
“너만 하겠니.”
정안을 보는 연심의 얼굴에 새삼스러운 감탄이 일었다.
“이제는 정말 끝에 도달했구나.”
“새삼스럽게요.”
“아니야. 하산하기 전과는 또 달라. 역시 너는 나와 다르구나. 속세에 있을 때야말로 너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 같아.”
“서로 얼굴에 금칠은 그만하죠.”
보타암 안에서도 지파가 달랐던 두 사람이다. 선대의 부덕 때문에 서로에게 칼을 겨누어야 했던 두 사람이다.
그런 그녀들이 스승의 품에서 벗어나 세상을 겪고, 갈 길 잃은 서로를 의지하며 무공으로 시련을 극복했으니, 이야말로 세대마다 검후(劍后)를 양성했던 보타암 검수들의 진면목이었다.
“자, 이제 들어갈까요?”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이 묵룡부로 들어서려는 찰나.
“……?!”
두 사람의 걸음이 거의 동시에 멈추었다.
우우웅.
뾰족하고도 강인한 기세에 두 사람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언덕으로 향했다.
정안이 물었다.
“같이 갈까요?”
“아니, 괜찮아. 너도 볼 사람이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주인장 얼굴은 뵙고 들어가야지요.”
“그럼 같이 가자.”
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떤 대단한 기파나 공기를 찢고 나아가는 굉음 같은 건 없었다.
그럼에도 빨랐다. 널찍한 평야를 순식간에 주파한 두 사람은 신들린 신법으로 절벽을 타고 올라 언덕 위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양천이 있었다.
양천 뒤에 백서가 시립해 있었지만, 양천의 존재감이 워낙 대단해서 백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정안은 짧게 목례하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
양천과 연심이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사는?”
편안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를 보던 연심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검날 소리.
흔들림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태양 아래 드러난 시린 검날에는 그림자 한 조각 지지 않았다.
양천의 얼굴에도 미소가 드리워졌다.
스륵.
오른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자연스레 왼손을 중단으로 들어 올렸다.
연심의 검이 좌하단에서 중상단을 거쳐 우하단으로 이어지는 원을 그렸다. 원을 그린 검은 끊김 없이 올라와 중단세로 이어졌다.
미소 짓던 양천의 얼굴에 진지함이 일었다.
성천의 강자, 투왕을 겨눈 연심의 검 끝에서 은은한 진동이 일었다.
잠시 후.
파아아아악!
흔들리던 검신이 일순 거대한 여섯 개의 검신(劍身)으로 분화해 양천을 압박했다.
양천의 좌수가 벼락같이 움직였다.
퍼퍼퍼퍼펑!
다섯 줄기의 검기를 날려 버렸지만, 나머지 한 줄기는 기어이 양천의 어깨에 닿았다.
그러나 피육은커녕 옷자락 하나 잘리지 않았다. 그 날카로운 검신으로 꾹 누르고 있는데도 외물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양천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무슨 무공이냐?”
“연화개문육도검(蓮花開門六道劍)입니다.”
“거 이름 한번 길기도 하다.”
“그래서 연화육검이라 부르고 있어요.”
“암만 봐도 기존의 무공이 아닌데?”
“무인의 성정과 재능은 저마다 다르니, 결국 보는 눈도 다 다른 법입니다. 정안과 달리 저는 보타암의 검학으로만 끝을 볼 수가 없어요. 해서 저만의 무공을 만들었습니다.”
“그 나이에 무공 창조라니, 참 과하기도 하다.”
“제 깨달음에 불과할 뿐, 아직 정확한 형과 식이 있는 무공은 아니에요.”
“전수하긴 어려울 테지만, 네 손에서는 다시 없을 절학으로서 발휘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자신감 넘치는 한마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만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양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주 제법이야. 진기의 수급이 자유자재로군. 하물며 내 몸에 칼까지 들이댈 줄이야.”
검을 거둔 연심이 고개를 숙였다.
“부주님께서 일부러 손을 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많은 부족함을 느낍니다.”
당연하다. 연심의 무공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무극에도 이르지 못한 경지로는 양천의 터럭 하나 건드리기 힘들 것이다.
양천 역시 연심의 검에 치명상을 입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동시의 그녀의 경지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직접 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나아가, 그 검격을 통해 그녀의 진실한 마음도 느낄 수 있다고 보았다.
“합격이다.”
양천의 목소리는 유독 호쾌했다.
“어느 날 뜬금없이 산중 수련을 하겠다며 부를 떠났을 때만 해도 드디어 이 모자란 녀석이 포기를 했구나 싶었다. 제 약속도 깨고 불쑥 가겠다고 하여, 나 역시 너를 향한 기대감을 모두 접었더랬지.”
“그러셨습니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이리도 멋들어지게 성장했구나.”
연심의 재능은 본디 천하를 논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당장 떠나기 전의 무공만 해도 일파의 장문인급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녀의 실력은 그렇게나 대단했다.
그때의 실력과 지금의 실력을 비교하자면, 발전은 했으되 아주 큰 차이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공만 보면 그러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변화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무인이란 무학의 수준만으로 강해지는 것이 아닌 법, 천하의 보검을 가졌으되 마음은 이제 막 검을 쥐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녀가 지금은 당당한 검사가 되어 돌아왔다.
“합격이라니 다행이군요. 다만…….”
“음?”
“제가 먼 길을 돌아 돌아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만큼, 부주님께서도 많은 변화를 겪으신 모양입니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애송이가 이제 별걸 다 볼 줄 아는구나.”
자신의 변화를 담백하게 인정하는 말이었다.
뒷짐을 진 양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부주라 부르지 말거라.”
“네?”
“나는 흑제성의 태상(太上)이다. 더 이상 묵룡부주가 아니야.”
“……?”
“동시에 부마도위이기도 하다. 뭐, 장인 될 사람이 저 지하로 들어가 버렸지만.”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의 연속이었다. 산중 수련으로 잠시지간 속세와 연을 끊은 두 사람에게는 그러했다.
양천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부는 지금 어수선하니 밖에서 낮술이나 한잔하지. 그간의 얘기도 좀 할 겸.”
“네? 아, 네.”
“그리고.”
양천이 정안을 힐끔거렸다.
“자네는 부로 들어가게. 자네가 찾는 사람이 있을 테니.”
정안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곤 곧장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연심이 성장한 만큼 정안 역시 크게 발전했다. 오히려 그 단호한 성정은 연심 이상이었다. 검사로서 연심보다 훨씬 더 적합한 성정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연심도, 양천도 그녀의 모습에 큰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현실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믿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길을 나섰다.
“그나저나 워낙 예전 일이라서 가물가물한데, 날 따라다녀서 뭐 하려고 그러냐?”
“사실 저도 그날의 약속이 애매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내 말이.”
“당분간 세상을 돌아다녀 볼까 합니다. 혼자 다녀도 되겠지만, 이왕 배우겠다고 한 김에 잠시나마 부주님의 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내 검이 되려면 무극에는 올라야 해.”
“잔심부름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맹랑한 놈일세. 술은 마시냐?”
“경험은 있어요.”
“속세에서의 첫 배움은 주도(酒道)부터 시작해야겠구먼.”
* * *
‘달라.’
묵룡부의 입구를 지키는 수문위들은 그녀를 손쉽게 안으로 들여보냈다. 미리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손쉽게 입부한 정안은 곧장 묵룡부의 분위기가 예전과 크게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어수선하지만…… 그렇다고 어설프진 않아.’
예전의 묵룡부는 이렇지 않았다.
차갑고 엄격했으며, 어두우면서 강렬했다. 그 이름처럼, 웅크린 용이 지상을 노려보는 듯했다. 언제라도 세상에 나가 그 흉악한 힘을 떨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된 느낌이랄까.
그러나 지금은?
‘맑지는 않지만 밝고 뜨거워. 마치 새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듯한…… 하지만 예전의 그 강렬함은 없다.’
정안은 바쁘게 동혈을 오가는 무사 중 하나에게 연호정의 거처를 물었다.
무사는 사색이 되어 공손히 답해 주었다.
연호정의 이름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저자세가 된다. 적어도 정안의 기억에, 묵룡부의 무사들은 결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약해진 것 같진 않고.’
정안은 자신의 존재감을 죽인 채 연호정의 거처로 향했다.
묵룡부는 여전히 넓었다. 걸음이 빠른 편인 그녀로서도 몇 개의 동혈을 지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는데, 동혈 하나를 지날 때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은 광장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문득 날 선 기감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
정안이 고개를 돌렸다.
“어?”
광장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데도 홀로 벽에 기대어 앉아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고요함만큼은 정안 이상이었다. 한 자루 날이 잘 벼려진 검을 보는 것 같은데, 또 다르게 보면 구름처럼 풍성하여 도통 검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존재감의 깊이였다.
마치 거대하게 뚫린 구멍으로 쏟아지는 바닷물을 보는 것 같았다. 측량할 수 없는 대해의 물을 빨아들이면서도 넉넉한 깊이감을 자랑하는 그 존재감은, 이 묵룡부처럼 정안에게 익숙하면서도 지극히 낯선 것이었다.
“음?”
시선을 느낀 청년이 눈을 떴다.
“오?”
청년, 강량의 얼굴에 반가움이 일었다.
“이게 얼마 만이오? 반갑소, 반갑소.”
이 무슨 가벼움인가.
말투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이 상당했다. 정안은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요, 강 검사.”
“어이쿠, 못 본 새에 더 강해지셨구만. 이건 뭐, 나도 이제 한 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맞붙으면 두들겨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소이다.”
예전보다 훨씬 더 풍부해진 감정 표현이었다.
그전의 강량은 이러지 않았다. 물론 그전에도 푼수 같은 면은 있었지만, 구사하는 검법만큼이나 날카로운 부분이 있었다.
지금은?
“과찬이세요. 저야말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군요.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강 검사의 무위는 눈이 부실 정도예요.”
“하하, 그거야 부딪쳐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요. 그렇게 금칠해 줄 필요 없소.”
정안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강량이 말을 이었다.
“형님을 보러 왔소?”
“네? 아, 맞아요.”
“어쩌다가 지금 오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갑시다. 내가 안내하지. 지난 얘기는 이따가 만나서 하십시다.”
그렇게 정안은 홀린 듯 강량의 손에 이끌려 갔다.
묵룡부도, 강량도, 그 안의 모든 이들도 변했다.
그럼 연호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