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40)
1040화. 계승하다 (7)
“흑제성이요?”
“그래.”
묵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연위를 제외, 연호정의 회귀를 아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과거를 따라가는 건가요?”
“따라간다기보다는 뭐.”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묵룡부보다는 낫잖아?”
묵비가 마주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이 흑제성의 이름으로, 지난 세월 이루지 못했던 일을 이번만큼은 이뤄 보겠다고 다짐했음을.
연호정의 회귀를 마음 깊이 믿겠다고 결심한 이후다. 묵비는 흑제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과거를 변화한 현재로 이뤄 낸 연호정의 행보에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왜? 떨려?”
“네? 뭐가요?”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동공이 촉촉하게 젖었는데?”
묵비는 당황해서 눈가를 쓸었다.
눈가가 떨리는 건 몰라도 동공이 젖진 않은 것 같았다.
“놀리지 말아요.”
“껄껄걸.”
“그나저나.”
“말 돌리기는.”
“됐고요, 그건 뭐예요?”
탁자 위에는 제법 커다란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종이 위에는 어느 정도의 여백을 제외하고 글자들이 빽빽하게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조직도.”
묵비의 눈이 반짝였다.
“새로운 흑제성의 조직도 말인가요?”
“그래.”
“기존의 조직 운영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애초에 묵룡부의 조직도를 새로 개편한 것도 연 공자잖아요.”
묵룡부에 세작으로 들어왔을 때, 양천과의 거래를 위해 새로운 조직도를 짰던 그였다.
그 조직도 자체가 흑제성을 이끌 때 편리했던 부분들을 따와서 만든 것이었다. 제갈아연의 도움도 있었지만, 큰 틀은 연호정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아니지.”
“연 공자가 원하는 조직도는 뭔데요?”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단순하고 빠른 거.”
현재 묵룡부의 조직도는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었다.
그렇게 만든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에는 그게 묵룡부에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상정한다면 강력한 조직 개편이 필요했다.
“전쟁만을 봐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묵비의 지적이 들어왔다.
“물론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전쟁을 어떻게 치르는가에 있어요. 그러나 그 뒤의 삶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만한 조직이라면 말이죠.”
타당한 의견이었다.
전쟁이 코앞인데 그게 무슨 속 편한 소리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전쟁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전쟁만을 위해 첨예하게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 이후에 반드시 문제가 터진다. 전쟁부터 이겨 놓고 생각하자고 말하기엔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사상이 다르며, 심지어 연호정은 백도 출신이었다가 흑도의 맹주가 된 상황이다.
현재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단연 연호정이었다. 흑백무제라는 별호 자체가 흑도와 백도를 가리지 않고 나온 별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별호와 업적으로 모든 것이 가려지는 게 아닌 법. 아닌 말로 흑도 내부에서 정통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흑제성 자체가 분열될 위기를 맞을 것이다.
물론 연호정이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테지만, 기존에 있던 사람들을 배려할 필요는 있다. 조직을 지나치게 전투적으로 짤 수 없는 이유였다.
“잘 판단했어. 생각보다 보는 눈이 있는데?”
“내 눈이 얼마나 막장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자, 조직도 얘기로 돌아갈까?”
“말 돌리긴.”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흑제성으로 개명하고 조직도 새로 개편할 때 가장 문제가 된다고 보는 건 기존의 병력과 새로운 병력 사이의 알력 다툼이야.”
“내 생각도 그래요.”
“뭐, 새로운 병력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도 않지만,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형국이라고 새로운 힘을 쌓지 않을 순 없는 법. 신구(新舊)의 다툼이 얼마나 빨리 해결되느냐가 흑제성 전력 강화의 관건이 되겠지.”
묵비가 물었다.
“새 병력이라면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나요?”
“있지.”
“어딘데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게. 아직 확신을 내릴 정도까진 아니야.”
“그렇군요.”
“그중에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곳이라면 사마현이 거느린 암살 부대다.”
묵비의 눈이 번뜩였다.
그녀 역시 사마현에 관해서는 전부 들었다. 그가 전대 음신이자 사음교의 첩자였던 야율씨에게서 벗어날 때 뜻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들이 지난 몇 년 동안 새 부대를 설립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애들이 많지. 몇 년 동안의 훈련만으론 실전에 투입할 수도 없고, 애초에 병력으로 쓸 생각도 없었어.”
“그럼 새로운 병력이라고 하기에는 하자가 있잖아요.”
“그 교관들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부대라고 할 수 있어. 당장 중원 내에서 그들과 비견될 만한 살수가 없으니까.”
사마현만 해도 성천급 강자의 눈을 한순간이나마 속일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은신술을 자랑한다.
물론 은신하는 것과 은신을 풀고 암살 시도까지 이어지는 것은 다르다. 성천급 고수라면 은신은 눈치채지 못할지라도 공격하는 순간의 살의를 읽고 피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달리 말하자면, 성천 이하의 고수들은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암살할 수 있을 만한 괴수라는 뜻이었다.
“전쟁 시에는, 적의 머릿수를 줄이는 것만큼이나 우두머리의 목을 날려 버리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어. 그게 전 중원의 패권을 짊어지는 전쟁이라면 더더욱 중요하지.”
“말하자면 사마현이라는 패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이로군요.”
“정확해. 그리고…….”
“……?”
“너희 모두가 사마현만큼이나 중요하다.”
묵비가 눈을 크게 떴다.
“너희라면……?”
“너와 강량, 진양과 소정광.”
“……!”
연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새 부대에는 새 술이 필요한 법이야. 사부님은 내게 부주, 아니 성주직을 물려주셨으니 십이지신처럼 나와 함께 나아갈 만한 사람들이 필요해.”
“그게 우리군요.”
“그래. 너희다.”
흑제성의 오대신장.
달리 오대무신으로까지 불렸던 불세출의 천재들이 과거에 함께했다.
그중 한 명은 죽었지만, 그 빈자리를 사마현이 채워 준다면 오대신장이 부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당시의 오대신장과 지금의 오대신장은 다르잖아요.”
“그렇지.”
흑제성의 오대신장이 전 중원에 공포를 뿌릴 수 있었던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하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신궁(神弓) 묵비의 궁술 실력은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을 논할 정도였고, 검왕(劍王) 강량의 패도적인 검법은 무림맹주 모용군의 깨달음마저 압도할 정도였다.
마도(魔刀) 진양의 도법은 다대일의 전투에 특화가 된지라 대량 살상에 능했으며, 난도혈귀(亂刀血鬼) 소정광의 지략은 사음교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남수활의 함무헌의 전공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흑제성의 주인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인 흑암제의 몸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중요성은 다른 오대신장에 뒤지지 않았다. 나아가 실제 전투를 치를 때도 누구 못지않은 무공으로 적도들을 격파해 나갔다.
즉, 오대신장은 하나하나가 전국(戰局)을 바꿀 만한 힘을 거머쥐고 있던 흑도 최강의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그들 휘하에는 직접 가르치고 함께했던 수하들도 있었다.
흑도의 다섯 용이 활개 치기 시작하면 북부 일대가 숨을 죽이더라.
전시였음에도 그런 말이 퍼질 정도로 오대신장의 무력은 압도적인 데가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와 달라요.”
다르다.
실력도, 안목도, 환경도 전부 달랐다.
다만, 또 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내가 있잖아.”
“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때의 너희들은 먼저 나에게 다가와 주었다. 절망 속에서 세상과 싸우고 있던 나를 꺼내 준 게 바로 너희들이야. 너희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고, 흑제성도 없었다.”
“……!”
“그러나 지금은 달라. 그때 나를 이끌어 준 것이 너희라면, 이제는 내가 너희를 이끌어 주면 된다. 부족한 게 있다면 채워 주고, 넘치는 게 있다면 깎아 주마. 그때만큼 강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너희는 그때보다 훨씬 더 빨리 완성된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
“그걸로 충분해.”
오대신장이라고 처음부터 강했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과 당시를 비교해 보자면, 지금의 오대신장들이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한 셈이었다.
하수가 고수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재능, 무공, 상황, 경험, 천운 등등 필요한 것들이야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역시나 스스로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었다.
당시 묵비는 연호정을 제외하면 타인과 말 한마디 섞지 않는 불완전한 자아를 지녔고, 강량은 복수심에 불타 희대의 흉검을 휘두르고 다녔다.
그나마 진양과 소정광은 워낙 절친했던 사이라 서로의 부족함을 잘 메워 주었지만, 친분 때문에 생기는 조직의 피해도 없지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묵비는 분명한 자아를 찾았고, 강량은 복수심마저 발전의 밑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진양 역시 마찬가지이며, 소정광은 친구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족했던 열정을 불살라 가며 수련에 힘쓰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당장에 과거만큼의 위용을 자랑할 수는 없을지라도, 거대 조직의 한 기둥을 담당할 만큼의 역량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잘할 거야. 지금의 너희라면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각자만의 위치에서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다.”
묵묵히 연호정의 말을 듣던 묵비가 피식 웃었다.
“말은 좋네요.”
“내 무기 중 하나지.”
“뭐가 되었든, 알겠어요. 결국 성주가 될 연 공자와 함께 발을 맞출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건데, 그게 우리라는 거죠?”
“그렇지.”
조직도를 살펴보던 묵비의 눈이 깊어졌다.
“흑도 문파의 장문인들 처리가 급선무겠군요.”
“정확하게 보았다. 역시 남달라.”
현재 장로로 있는 흑도 문파의 장문인들은 하나같이 자존심이 강하고 경험 많은 이무기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잠재우고 저 십이지신처럼 활동하려면 상당한 난관이 예상되었다.
“걱정하지 마. 내일 당장 움직일 테니까.”
“내일 당장 움직이되, 강압적으로 결과를 보진 말아요.”
이미 연호정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아는 그녀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그들을 제대로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왕의 힘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왕을 보필하는 최측근들의 능력을 증명하는 게 중요하죠. 연 공자가 나선다면 당장은 괜찮겠지만,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선 미봉책일 수밖에 없어요.”
멸사군, 나아가 의정군의 군병들을 이끌면서 본래 지니고 있던 묵비의 재능이 화려하게 꽃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새 세상을 어떻게 내 식대로 만드는가를 고민하는 경지에 도달한 고수 중의 고수란 말이다.
“판만 깔아 주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다만, 잘할 수 있겠냐?”
묵비가 씨익 웃었다.
“그 정도도 못 하는 머저리들을 데리고 오대신장이니, 뭐니 으스댈 생각이었다면 오히려 우리가 실망이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청출어람이 따로 없도다.”
그때였다.
연호정의 눈이 문 쪽으로 향했다.
곧이어 묵비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어렸다.
“오호?”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재가 필요한 때에 맞춰서 잘 다듬어진 꽃 한 송이도 흘러 흘러 와 줬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