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41)
1041화. 계승하다 (8)
“다 왔소.”
워낙 거대한 지하 동혈이라 대부분의 공간이 거기서 거기처럼 보이지만, 수뇌부들이 거하는 곳은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수많은 장인이 돌벽을 깎고 석상을 세우는 등, 지상에서 이 광경을 봤다면 누구라도 탄성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중 연호정의 거처는 회랑의 벽에 거대한 용 세 마리가 음각된 곳이었다.
“소저의 기도를 읽었을 테니 곧 오실 거요. 잠시만 기다리시오.”
“강 검사는요?”
“나야 하던 거나 해야지.”
“명상이요?”
“반은 명상이고 반은 궁구요. 새롭게 창안한 무공을 조금씩 조정하고 있는데, 이게 영 어렵단 말이지.”
정안은 그게 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강량이 제 할 말만 하고 그대로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이따가 시간 나면 거하게 한판 해봅시다. 그럼 먼저 가오.”
“아, 네. 이따 뵈어요.”
그간의 인연을 생각하면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볼 만도 한데 강량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스스로의 세계에 푹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강량이 사라진 후.
‘삼두룡(三頭龍).’
회랑 돌벽에 음각된 용은 얼핏 세 마리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몸통으로 오해한 부분은 목이고 회랑 자체가 몸통을 대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억나. 이곳은…….’
묵룡부의 차기 주인이 거하는 곳이다. 묵룡부에서 지낸 기간이 제법 길었기에 금방 기억이 났다.
정안은 혼란스러웠다.
‘묵룡부의 후계자? 연가의 장남이?’
후계자란 곧 차기 부주를 뜻함이었다.
자신이 산중 수련을 하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건지, 정말이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의미 없어.’
궁금하긴 하지만,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도 연호정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연호정은 은인이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갚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였다.
연심은 약속을 위해 하산했고, 자신은 은혜를 갚기 위해 하산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 보타암을 보타암답게 만들 생각이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훅.
정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한 줄기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이후 차가운 공기가 풍성하게 밀려왔다.
후우우우웅.
야명주로 밝은 동굴이었지만, 뚫린 돌벽 회랑 안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빛조차 밀어 내는 것 같았다.
바람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기도였다.
저벅저벅.
산뜻하면서도 진중한 걸음걸이.
‘이럴 수가.’
고수라면 발소리만으로도 그 사람의 체격과 체중, 그리고 어떤 종류의 보법을 연마했는지까지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발소리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발소리의 주인이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외엔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정안의 안목이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발소리의 주인이 차원이 다른 경지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스륵.
불어오는 바람처럼 자연스럽고 시원하게.
그렇게 등장한 남자를 마주한 정안의 시선이 점점 더 위로 올라갔다.
‘……!!’
정안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안 그래도 높은 동굴 천장이 더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이 남자의 키와 덩치 역시 천장에 닿을 만큼 거대해졌다.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연심은 보타암의 삼대신공 중 하나를 익혔고, 나머지 검법들을 모두 연성해 자신만의 새로운 검도를 창안했다.
정안은 달랐다. 그녀는 오직 만화정검결(萬花靜劍訣)이라는 극상승의 검법 하나를 익혔을 뿐이지만, 삼대신공 모두를 익혀 진기 발현과 축기, 발경술에 더 힘을 쏟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유독 기에 민감하여 동등한 경지의 고수가 보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때때로 큰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단점도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크다!’
태산처럼 크고 바다처럼 넓다.
마치 태곳적 거인이 이 땅에 강림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위용을 발한다. 기파를 드리운 것도 아니요, 그저 사람 자체가 지닌 존재감에 불과한데도 마치 반신에 가까운 존재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이런 존재감이……!’
양천과는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우위를 논할 수가 없다. 애초에 무극에 오르지 못한 그녀의 안목으로는 무극수들의 강약을 가늠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볼 때, 이 거인의 무공은 흑도의 전설로 추앙받는 투왕 양천과 비교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을 다스려 본 양천의 위엄이 더 무거운 것 같지만, 하늘조차 불태울 것 같은 강함은 오히려 거인이 더 위인 것 같았다.
정안의 눈이 몽롱하게 변할 때쯤.
“오랜만이군.”
“헉!”
깜짝 놀란 정안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환상처럼 드리워졌던 거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웃으며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은인이 등장했다.
“네 소식은 흑도 정보원을 통해서 몇 번 들었다. 산중 수련을 위해 연심과 함께 떠났다고 말이야.”
“아…….”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어. 당시만 해도 너의 무공은 묵비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세상을 겪고 위험을 헤쳐 나가며 발전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연호정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내가 틀렸군. 경쟁자라면 경쟁자일 수 있는 사람과 오랫동안 무공을 연마하며, 더 이상 오르지 못할 곳까지 올라간 너의 기도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힘들었을 정도야.”
정안의 눈이 흔들렸다.
풍성한 감정이 느껴지는 어조로 자신을 칭찬하는 연호정. 과거에도 한 번씩 농담을 던지긴 했지만, 그때 연호정의 기도는 뜨겁고 날카로워서 감히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경지를 구축했음에도 훨씬 더 다가가기가 쉽다. 빈틈도 너무 많아서, 당장 칼을 뽑아 공격하면 손쉽게 일격을 먹일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쏟아지는 폭우 위를 누비던 번갯불이 구름처럼 몽실몽실하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변했다.
감정도, 기도도, 경지도 모조리 달라진 은인의 모습은 충격적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키 어려웠다.
정안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미리 언질이라도 드리고 떠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죄송…….”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다. 나도 그런 적 많아.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네가 애도 아닌데 뭘 구구절절 인사까지 하냐.”
“그래도 예의라는 게 있는걸요.”
“흘러가는 세상사, 강호라는 무대 위에 올라온 무사들은 번개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바람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법이야.”
연호정이 뒷짐을 풀었다.
“결정적으로, 그땐 나도 워낙 바빠서 서운함 따위 느낄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제야 정안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또 이렇게 몇 마디 나눠 보니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요.”
“사람 쉽게 안 바뀌잖냐.”
“하지만 이 존재감은 정말 놀라워요. 저 역시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다른 차원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네요.”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지 않으면 목숨 날아갈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거든.”
“세상을 겪으며 발전하셨군요.”
“그랬지.”
“그때의 저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가능했을 거다. 어느 정도로 발전하느냐와 어떤 것을 깨우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지금은 준비가 된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것 같다.”
연호정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놀라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정안의 눈빛과 기도는 실로 초일류 검객의 그것이라 할 만했다.
초절정에서도 거의 한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구파 장문인급 이상이다. 무극에 오르기 전, 공공대사와 비교해도 거의 차이가 없는 무력이라 할 수 있었다.
보타암은 천하의 여걸들이 모두 모이는 신비 문파라 했는데, 과연 그녀의 재능은 무시무시했다. 묵비나 강량, 진양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저야 산나물 캐 먹고 수련하고 빈둥댄 것밖에 없어서 어떻게 지냈다고 말할 게 딱히 없어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더군요.”
“그래. 많은 변화를 겪었지.”
“들려줄 수 있으실까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제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나 도와주게?”
“그게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죠.”
“흔쾌히 도움을 준다고 하니, 억지로 밀어 낼 필요는 없겠지.”
연호정이 턱으로 회랑을 가리켰다.
“들어가자고.”
* * *
쩌어어어엉!
화려하게 비산하는 불꽃이 한순간 사라졌다.
“대단하군.”
용아철기단의 단주, 황석태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그때도 굉장했지만, 지금은 또 다르구려. 완전히 물이 오른 느낌이오.”
“부족하오.”
진양이 대도를 물리며 말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하오. 멀어도 한참 멀었어.”
“남들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욕먹소.”
“보는 곳이 다를 뿐이오.”
황석태의 얼굴이 묘해졌다.
활기차다고 할 정도까진 아니어도 제법 능글능글한 편이었던 진양의 얼굴에는 진지함과 엄숙함만이 가득했다.
‘이런 사람이었나.’
다시 묵룡부로 돌아온 진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황석태는 솔직하게 물었다.
“무엇이 그대를 그리 달라지게 했소?”
“달라진 거 없소. 그저 갈 길을 보았을 뿐이오.”
“갈 길?”
“전쟁 말이오.”
황석태의 눈이 번뜩였다.
진양이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무지막지한 사람과 인연을 맺었는지. 지금 나 정도면 어디 가서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는 칼 맞아 죽는다고 겁을 주니 어쩌겠소? 백날 천날 죽자고 노력할 수밖에.”
“그렇구려.”
“적어도 그 양반 밑에서 칼춤 추려면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소. 최소한…… ‘그 영역’에는 올라가야지.”
그 영역.
선택받은 소수의 강자만이 올라설 수 있다는 궁극의 경지.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고 세상을 보기 시작한 진양의 눈은, 어느새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 궁극의 경지로 향해 있었다.
가만히 진양을 보던 황석태가 웃으며 말했다.
“화웅문의 문도들은 잘 훈련받고 있소. 하나같이 알짜들만 남아서 그런지, 발전 속도가 철기단의 창술사들보다 훨씬 빠르더군.”
“다행이오. 그리고 미안하오. 대신 훈련을 맡게 해서.”
“한 식구인데 뭐 어떻소. 그리 말하면 내가 차기 부주님을 뵐 낯이 없소.”
진양이 볼을 긁적였다. 괜스레 어색해서 할 말이 없었지만, 이내 지나가듯 물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은 어떻소? 아직 수련 중이오?”
“누구 말이오?”
“폐관에 들었던 내 불알친구 놈 말하는 거요.”
황석태의 눈이 커졌다.
“몰랐소? 소정광 그 사람, 이미 나왔소이다.”
“……?!”
진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나왔다고?”
“아는 줄 알았는데. 수일 전에 폐관을 깨고 나와서 내공을 다스리고 있소.”
“이런 미친…… 나왔는데 말도 안 하고 혼자 그러고 있었단 말이야? 어디요, 거기가?”
“그곳은…… 음?”
황석태가 우측 숲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갈 필요 없을 것 같소. 그쪽에서 먼저 찾아왔군.”
진양이 황석태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한참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친숙하고도 지독하게 낯선 기도 하나가 접근하고 있었다.
“정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