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42)
1042화. 계승하다 (9)
반가움에 달려간 진양은 이내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여어, 곰탱이. 오랜만이구만.”
한때나마 문주로 모셨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친한 친구 사이였다. 여유로운 목소리로 곰탱이라 부르는 소정광의 모습은 무척이나 정감이 넘쳤다.
그러나 진양은 그 반가운 인사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너……?”
“휘유, 그간 못 봐서 그런가 몸뚱이가 더 커진 것 같네.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아, 그거는 미안하게 됐다. 원래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진기가 좀 불안정해서 안정시키느라 시간이 필요했어.”
“그거 말고!”
진양의 눈이 소정광의 상체를 향했다.
상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맨몸을 그대로 드러냈는데, 군살이 다 빠져서 날렵함을 자랑하는 동시에 꽉 짜인 근육으로 가득해서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다.
문제는 상체 전반을 가로지르는 온갖 흉악한 상처들이었다.
그야말로 온몸을 뒤덮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물 같은 상처 중에는 칼에 베인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고, 짐승의 발톱에 당한 상처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진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정하고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도 소정광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살벌한 수련을 하다가 칼을 맞는 거야 일상다반사지만, 저 짐승에게 당한 상처들은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 그 상처들 다 뭐냐?”
“이거?”
소정광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수련 결과지.”
“대체 절정고수 몸뚱이에 그만한 상처를 안겨 줄 만한 맹수가 어디에 있냐? 어디 뭐 기가 막힌 영물이라도 만났냐?”
“반쯤 영물이긴 했지. 사백 근이 넘는 대호랑 한판 붙었고, 유독 덩치 큰 늑대 무리랑도 대판 싸웠다. 진짜 끔찍하더군.”
“아니, 고작 맹수들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가끔은 절정고수도 맹수에게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특수한 경우거나 상당히 지쳤을 때나 가능한 얘기였다.
소정광이 쓰게 웃었다.
“진짜 강해지려면 내 몸뚱이만으로 호랑이 한 마리 정도는 때려잡을 수 있어야겠더라.”
“그러니까!”
“내공 없이 말이야.”
“……?!”
진양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공을 봉쇄하고 그런 짐승들과 싸웠다고?”
소정광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대장님이 전수해 주신 무공들이 워낙 난폭하고 고급스러워서, 몸부터 만들지 않으면 대성은 어렵겠더라고.”
“……!”
“그리고…… 내가 워낙 잔머리를 잘 굴리잖냐. 머리만 굴려서 한자리 차지하겠다면야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될 테지만, 다가올 난세를 위해서라면 나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어.”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달라졌어.’
소정광은 소정광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는 소정광과 또 다른 면모를 보이는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소정광은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남자였지만, 그보다 현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화웅문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만약 소정광이 중심을 잘 잡아 주는 동시에 위험할 때 창의적인 계책을 내 주지 않았다면, 화웅문은 진즉 사라졌을 것이다.
즉, 나아가는 것보다는 안정을 기반으로 하되 필요하다면 제법 과감해질 수도 있는, 그러나 결코 추진력이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사람이 소정광이었다.
그런 소정광이 무공 하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덕분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 묵룡부에서도 워낙 잘해 줘서 이런저런 내공심법들도 많이 보여 주더라고. 물론 최고급 무공들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황석태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한도 내의 무공 중에서는 최고만 골라서 보여 줬소. 그 이상의 것들은 상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오.”
“하하, 그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어째 말투가 바뀌셨습니다? 하시던 대로 하시지.”
“그럴 순 없소. 차기 부주님의 친구분들이니.”
소정광이 눈을 끔뻑였다.
“친구요?”
“적어도 차기 부주님께서는 두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오.”
“그렇다면 영광이로군요.”
“그나저나…….”
날카로워진 황석태의 눈이 소정광의 허리춤에 있는 두 자루 곡도(曲刀)를 훑었다.
“대성한 거요?”
“대성까지는 아니고, 소성(小成) 정도는 했습니다.”
“소성이라는 단어를 쓸 만한 무력이 아닌 것 같은데.”
“앞으로 갈 길이 멀어요. 그래도 위험한 순간에 한칼 보탤 정도는 된 듯합니다.”
황석태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처음 당신이 ‘그 말’을 했을 때, 솔직히 정말로 이뤄 낼 거라 믿지 않았소. 한데 진짜로 성공했구려.”
“운이 좋았습니다.”
“운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외다. 세상에 천재가 모래알처럼 많다더니, 정말 대단하시오.”
황석태가 진양을 바라보았다.
“놀랍지 않으시오?”
“뭐가 말이오?”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정말 짧은 기간인데 이렇게까지 발전한 친구의 무공 말이외다.”
발전이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양은 이내 깜짝 놀랐다.
‘어?’
우우웅! 우우웅!
기감을 확장하고 감각을 예민하게 벼리니, 비로소 소정광의 진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뭐야?’
진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그 내공은?”
“두툼하지?”
소정광의 내공이 엄청나게 늘어 있었다. 단순한 양만 따지면 거의 자신에 필적할 것 같았다.
‘아니, 세맥에 숨은 진기까지 합치면 그보다 더…….’
그야말로 엄청난 내공량이었다. 이 정도면 산중고수가 격체전력으로 내공을 전달해 준 게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색을 지닌 진기도 눈여겨볼 만했다. 특유의 화기(火氣)는 어디로 갔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잘 정제된 내공이 하늘처럼 맑고 깊었다.
맑고 깊지만, 약하지 않다. 진기의 성질만 따지면 강성 중의 강성이라 할 만했다.
“그게 대장이 전수해 준 무공이냐?”
“비슷한 거지.”
“뭔 말이야? 아니, 그걸 떠나서 그만한 내공을 어디서……?”
소정광이 손을 저었다.
“얘기는 이쯤하고, 나도 대장님이나 뵈러 가야겠다. 폐관도 끝났는데 찾아뵈어야지.”
“어?”
“너도 같이 가자.”
“어어.”
진양은 당황했다.
소정광의 변화는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시시각각 새로운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무공에서부터 성격, 안목까지 모든 것이 변화한 듯했다.
소정광이 황석태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간 훈련을 담당해 주시느라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석태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더 잘 부탁드리겠소. 어쩌면 우리의 목숨이 그대의 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오.”
“그 무슨 끔찍한 말씀을.”
“하하.”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묵룡부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는 황석태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듬직해졌군. 예전보다 훨씬 더.”
* * *
“왔냐?”
호들갑을 떨던 진양과는 달리 연호정의 인사는 담백했다. 마치 어제 만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소정광이 허리를 숙였다.
“너무 늦게 나왔습니다. 면목이 없어요.”
“충분한 자신도 없는데 나왔으면 훨씬 더 실망했을 거야. 지금이라도 와 줘서 고맙다.”
소정광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다르십니다.”
“음?”
“저 곰탱이와는 달라요. 수장은 이래야지. 마음에 없어도 고맙다는 소리를 한 번씩은 해 줘야 부하 입장에서도 신이 나는 법입니다.”
진양이 툴툴거렸다.
“아주 천하의 명주군 나셨네.”
“저것 봐요. 저러니까 내가 그렇게 힘들었지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빈말 아니다. 그리고 너희가 왜 부하냐. 주군이니 대장이니 부르는 거야 너희 마음이지만,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친구란 그럴듯한 우정을 나누어야 친구라고 하는 겁니다. 솔직히 우리, 아직 그 정도 아니잖아요.”
“그 정도도 아닌데 냅다 주군으로 삼게?”
“어차피 함께하기로 했는데요, 뭐. 게다가 좋은 무공도 받았고, 이 정도면 인생 역전입니다. 은혜 갚는 셈 쳐야지요.”
“여유로워서 좋군.”
연호정이 소정광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나저나 대단한데? 그 심법, 뭐냐?”
“이름은 따로 안 정했습니다. 그냥 똑같이 벽라진결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거의 개조 수준으로 변화시켰는데?”
“좀 그런 감이 있지요.”
“다 떠나서, 벽라진결이 그렇게도 변화될 수 있나? 벽라진결을 이렇게까지 재해석해서 익힌 사람은 처음 봤다.”
“칭찬 감사합니다.”
놀랍게도 소정광은 아직 무종을 넘지 못한 무력으로 초일류의 내공심법인 벽라진결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개조해 낸 것이다.
천재에도 종류가 많다. 무공에 한정했을 때도 여러 가지 재능이 있다. 한 번 본 초식을 그대로 따라 할 줄 아는 사람, 축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 실전 감각이 좋은 사람 등등 하나하나 세어 보자면 끝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중 소정광은 그 날카로운 안목과 두뇌에 어울리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무공 해석과 분해의 재능이었다.
연호정 주변에도 그런 사람은 꽤 있었지만, 소정광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는 없었다. 잘할 줄은 알았지만, 정말이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공도 엄청 늘었구만. 태을단을 녹인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개조하면서 축기의 공능을 확장시켰습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이게 가장 빠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잘했다. 마치 당가주님을 보는 듯하군.”
“예? 당가주라면 그 당관 어르신 말입니까?”
“아니야. 그나저나 혈응검은 팔 성 정도냐?”
“혈귀도(血鬼刀)는 칠 성입니다.”
“벽라진결의 이름은 안 바꿨으면서 외가무공의 명칭은 바꿨네?”
“초식이니까요.”
연호정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소정광은 무공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공을 분석하는 눈이 뛰어난 만큼, 초일류 무공들이 왜 강할 수밖에 없는지도 잘 아는 것이다.
“혈귀도라…… 예전에 내가 말해 줬던 걸 따온 거냐?”
“그렇습니다.”
“좋아. 나중에 한칼 보겠다.”
“좋지요. 근데 그 전에 소개부터 시켜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왔는지, 사마현이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소정광이 턱으로 사마현을 가리켰다.
“엄청난 실력을 지닌 암살자 같은데요?”
“그래, 그렇지.”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량이야 홀로 수련 중이지만,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혈에 있다. 즉, 이곳에는 그와 미래를 함께할 가장 중요한 동료들이 다 모여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묵비를 시작으로 진양, 소정광은 물론 사마현이 있었고, 심지어 정안까지 있었다.
물론 정안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거리낌 없이 몸을 던져 준다 해도, 그녀까지 해서 육대신장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정안은 강하지만, 아랫사람을 다스리며 함께 싸울 대장의 재능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든든하다.
이제야 구색이 갖춰진 느낌이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개는 나중에 술 한잔하면서 하자고. 지금은 하던 일 얘기부터 하자.”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연호정이 손가락으로 조직도를 툭툭 쳤다.
조직도를 훑어본 소정광의 눈이 반짝였다.
“단순하지만 빠르군요.”
“역시 다른 사람들하곤 차원이 다르구나.”
“하지만 이곳에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묵룡부 자체가 지하에 있기 때문에, 외부가 아닌 내부 생활을 생각하면 아예 거처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만.”
“소름 끼치게 정확하다.”
“이주 계획이 다 잡혀 있군요. 어쩐지 어수선하더라니.”
모습을 드러낸 지 반 각도 되지 않았지만, 소정광은 벌써 군사(軍師)가 되어 있었다.
“언제 이주할 생각입니까?”
“열흘 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열흘 뒤에, 흑제성의 이름으로 흑도는 다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