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43)
1043화. 계승하다 (10)
“인상적이군.”
무림맹에 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양천이 오지 않아 아직까지 궁으로 돌아가지 못한 곡경이었다.
그래도 곡경의 얼굴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황제 걱정에 밤잠을 설쳐야 옳았지만, 다행히 천자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워낙 대단한 인물들이라 한시름 놓은 것이다.
그렇게 여유를 가지기까지 무려 스무날이 넘게 걸렸다. 이제는 그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사적으로 보는 것은 처음인가.”
“그렇구려.”
공공대사는 곡경의 거친 반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곡경이 턱을 괴었다.
“무극에 오른다고 전부가 아니지. 그 경지에 오른 자들끼리의 격차가 종이 한 장 차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 그 종이 한 장 차이를 허용할 정도로 맹탕인 놈들이 이 경지에 오를 수는 없거든.”
“그렇소?”
“즉, 우리에게 종이 한 장 차이는 협곡만큼이나 깊고 까마득한 차이가 될 수 있지. 당연히 무극에 올라서도 끊임없는 연마가 지속되지 않으면 한 장이 두 장 되고, 두 장이 네 장 되는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구려.”
“언제 올랐다고?”
“얼마 되지 않았소이다.”
“그래, 확실히 그래 보여. 꿈틀거리는 그 진기는 아직 제대로 여물지 않았어. 넉넉잡아도 이 년이 안 지났겠군.”
곡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데 어째 덮어놓고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영 들지 않을꼬.”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사(邪)는 정(正)을 넘보기 힘든 법이오. 그대가 익힌 무공은 나와 상극이라 할 수 있으니, 귀군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외다.”
“정과 사의 구분을 뛰어넘는 경지가 무극 아니었던가?”
“종이 한 장 차이일지언정 차이는 차이인데, 정과 사가 진정 구분이 없을 수가 있겠소?”
“한 방 먹었군.”
턱을 괸 손을 빼 찻잔을 든 곡경의 얼굴에 씁쓸함이 일었다.
“확실히 시대가 달라지긴 한 모양이야. 성천이니 삼군이니 하며 떠받드는 소리를 들을 때는, 솔직히 신경 안 쓰는 척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
“…….”
“한데 어느새 새로운 세상에, 상상도 못 한 고수들이 출현하고 있구먼. 도대체 몇 명에게 추월을 당하는지 모르겠어.”
“그대가 택한 삶 아니오?”
“뭔 소린가?”
“황제 폐하를 지키는 것. 귀군께서는 그러한 삶을 선택했소.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귀군의 무공은 지금과 또 달랐을 것이오.”
“위로인가.”
“사실을 말할 뿐이오. 저 묵룡부주는 귀군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소.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오.”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꼭 무공 수련을 해야만 발전하는 건 아니야. 삶을 무도(武道)의 또 다른 일면으로 보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었겠지.”
“반대로, 더 약해졌을 수도 있소.”
“이 경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군.”
“멀리서 볼 때는 짐작할 뿐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확신하게 되는 것들이 있잖소.”
단박에 찻잔을 비워 버린 곡경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수련이니 삶이니 하는 말 따위도 다 필요 없어. 결국 그것까지도 다 내 재능이고 실력인 법이지.”
공공대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예전에도 곡경은 무림맹을 방문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곡경과 지금의 곡경은 무척 달랐다.
항상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녔던 사내가, 이제는 그러한 짐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중에 시간 나면 한판 붙어 볼까?”
“빈승이야 영광일 따름이오.”
곡경이 피식 웃었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우며 물었다.
“사람들 많은 데에서는 차마 묻지 못했소만.”
“뭔데?”
“폐하께서는……?”
“잘 지내시지.”
“…….”
“우리 같은 무부가 폐하의 큰 뜻을 어찌 알겠나. 솔직히 굳이 죽음을 가장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폐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야.”
공공대사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폐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오. 지금쯤 삼교는 폐하께서 붕어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오.”
“틀렸어.”
“……?”
“전쟁 준비는 진즉에 다 끝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시기야. 언제, 어떤 병력을, 어떤 조직이 먼저 풀어 낼지의 문제다. 놈들의 대비는 끝났어.”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 판국에 간자를 시켜 황제를 죽이라는 밀명을 부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당장 내일 전쟁이 터져도 이상한 일은 아니구려.”
“그렇지.”
“오랜 세월 폐하를 곁에서 지켜 온 광혼귀군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
“당장 내일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전쟁이란 걸, 폐하께서도 충분히 알고 계셨을 것이오. 누구보다 현명한 분이시니까.”
“…….”
“말하자면, 폐하께서 죽음을 가장하셨다고 했을 때 이미 중원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소. 한데도 폐하께서는 죽음을 가장하셨소. 큰 전력이 될 무림과 어떠한 소통도 없이.”
“……그러셨지.”
“폐하의 죽음 그 자체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상황이 될 것이오. 하지만…… 소통 없이 그러한 일을 벌이셨다는 것은 곧 폐하께서는 당장에 전쟁이 터지진 않으리라는 걸 확신하고 계셨다는 뜻 아니오?”
곡경의 눈이 반짝였다.
“그건 누구의 생각인가? 그 소문 자자한 군사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가?”
“빈승과 군사 둘 모두 같은 생각을 했소.”
“확실히, 이만한 조직을 이끌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군.”
곡경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 알려 줘도 큰 문제는 없겠지.”
“부디 말씀해 주시오.”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의 죽음이 전쟁 발발의 시작이 될 거라고는 하셨지만, 중원 무림의 준비가 확실하지 않은 이상 당장 터지진 않을 거라고 보셨어.”
“그게 무슨 말이오?”
“무슨 말이겠어?”
“……?”
가만히 곡경의 얼굴을 바라보던 공공대사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설마?”
“그래. 폐하께서는 이 전쟁의 선공이 삼교가 아니라 중원 무림일 거라고 생각하셨다.”
“……!!”
“정확히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셨지. 만약 그걸 읽지 못한다면, 그걸 알려 주기 위해서라도 내가 직접 무림맹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황제가 죽었다.
황제의 죽음이란 곧 삼교 입장에선 교주가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우두머리의 죽음은 엄청난 여파를 일으킨다. 우두머리란 단순히 그 조직을 통치하는 걸 넘어 ‘힘’ 그 자체를 다스렸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힘은 병력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다. 금력일 수도 있고 정보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조직이든 급진적이고 강경한 정치를 원하는 쪽이 있고, 반대로 안정적이고 온건한 정치를 원하는 쪽이 있다.
만약 그러한 상황에서 우두머리가 죽게 된다면, 당연히 차기 조직의 장(長)을 뽑기 위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그것을 고상한 말로 권력 쟁투라고 한다. 권력 앞에서는 혈육도 없는 것, 세상 어떤 조직도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바로 거기에 있다.
말하자면, 삼교 측에 있어서 이보다 더 매혹적인 순간은 없을 것이다.
황궁은 제국의 중심이고, 당연히 누가 황제가 되느냐가 앞으로의 국정, 나아가 중원 전체의 흐름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무림의 힘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고는 하나, 새로운 황제 등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찾기란 힘들 것이다.
새로운 황제 등극을 위해 온 천하가 난리가 날 거란 뜻이다.
그렇다면, 적의 입장에선 이만큼이나 놓치기 힘든 상황이 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삼교에서 먼저 공격을 취해야만 한다.
무림의 힘에 눌렸을지언정 황궁의 상징성은 강력했다. 황궁만 차지한다면 중원의 앞마당을 먹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신화교가 왜 굳이 그 많은 고수를 파견해 가며 황궁을 집어삼키려 했겠는가.
한데 공격하지 않을 거라니?
오히려, 이 전쟁의 시작은 중원 무림일 거라 생각했다니?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은 할 수 있어도 확신하긴 어려운 사항이지. 특히나 전쟁이니까 더더욱. 그렇지?”
“그렇소.”
“폐하께서는 확신하고 계신다. 폐하께선 모르는 상대와 싸워 패배하신 적은 있어도, 적을 알고도 패배한 적은 없으셨어.”
“그러니까 그 확신을 어떻게 하신단 말이오?”
“신화교주다.”
공공대사의 눈이 커졌다.
“신화교주?!”
“기천웅 그 작자, 비록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축출당하듯 황궁으로 왔지만, 신화교에 대해서만큼은 모르는 게 없어. 당연하지. 교주는 곧 신이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다스리는 곳을 하나부터 열까지 통달해야만 해.”
“…….”
“신화교주가 말해 주었다. 현재 신화교의 상황을. 신화교의 상황이 어떤지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음교의 상황도 알 수 있지. 소교주 놈이 사음교주에게 이용당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사음교가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있어.”
“……!”
“광혈교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지만, 놈들이 청해 신마림을 먹으려고 드는 것만 봐도 당장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진 않으리란 걸 알 수 있다. 아니, 그건 아니군. 정확히 말하면, 전쟁의 첫수를 광혈교가 두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겠지.”
“확신할 수는 없소.”
“물론 그 정도 정보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어. 그러나 폐하께서는 와신상담하시며 세상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중원 무림보다는 특히 새외 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계셨어. 당연하다면 당연해. 새외의 난적으로 인해 황궁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까.”
곡경의 눈이 번뜩였다.
“삼교가 선공을 감행해도 황궁에서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 첫 선공을 기점으로 곧장 전면전이 터지진 않을 테니까. 당장 황궁에는 권신과 검선, 그리고 연가주가 있다. 거기에 황궁 수비대를 위시한 수많은 병사가 진을 치고 있지. 당금의 황궁은 어떤 거대 방파 못지않은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공공대사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무림맹은 당장 삼교를 공략하지 않을 것이오. 아니, 그렇게는 못 하오. 지도도 없이 안개 가득한 미지의 산을 정복할 수는 없는 법이잖소?”
“무림맹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전 무림을 대표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하나?”
“……?!”
“무림맹 말고도 삼교와 싸우려 드는 조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그중에 무림맹만큼 거대한 조직도 하나 있었지, 아마?”
“묵룡부!”
공공대사의 얼굴에 다급함이 일었다.
“설마하니 묵룡부가 선공에 나선다는 뜻이오?”
“당장은 아니겠지만, 먼저 치고 나간다고 한다면야 무림맹보다 묵룡부가 한발 앞선다고 생각해.”
“제아무리 연 소부주의 지략이 하늘에 닿았다 한들, 폐하의 생각까지는 읽지 못했을 것이오.”
“동의해. 직감으로는 알 수 있어도 논리적으로 해석은 못 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래서 묵룡부주가 가지 않았나.”
“……!!”
“뭐, 황궁에서 얘기한 바로는 그 양반 역시 묵룡부가 선공을 날리는 걸 싫어하더군. 어쩌면 얘기를 안 했을 수도 있겠어. 손해 보는 거 싫어하니까.”
곡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얘기를 안 한다고 해서 연호정 그놈이 끝까지 모르고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