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44)
1044화. 계승하다 (11)
‘좋군.’
치리링!
뽑혀 나온 두 자루 곡도가 선풍이 되어 연호정을 압박했다.
칼끝에서부터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시뻘건 도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흘러가는 바람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데, 물러나다 보면 어느 순간 도기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강력한 일격보다 빠르고 유연한 연환격에 특화된 도법이었다. 그러면서도 틈을 노리는 일격에는 무시 못 할 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강(强)보다 유(柔)를 추구하나, 강해야 할 때는 강하다.
단발보다 연환을 추구하나, 단발 일격을 쳐 내야 할 때는 서슴없이 쏟아 낸다.
무거움보다 가벼움을 추구하나, 무겁게 짓눌러야 할 때는 풍부한 내공량으로 그것을 가능케 한다.
소정광의 도법은 외가무공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신공 체계에 가까웠다.
‘흐음.’
멀리서 연호정과 소정광의 대결을 지켜보던 기천웅의 얼굴이 흥미가 일었다.
‘저만한 도법은 본교에도 몇 개 없는데. 연호정 저 녀석이 전수한 무공인가? 아니면 묵룡부에서 배운 건가? 뭐가 되었든 아주 흥미롭군.’
빠르고 부드럽다고 하여 위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법의 성질만 보면 난폭하기로는 신화교의 열양공보다 더한 것 같았다.
‘심지어 완성된 것도 아니야. 만든 지 얼마 안 된 젊은 무공 같은데…… 신기하군.’
일정한 행동, 투로에서 미세한 흔들림이 보인다. 오랫동안 잘 숙성된 무공을 익혔다면 저런 흔들림이 보일 수는 없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래도 완성에 한없이 가깝다. 남은 것은 실전으로 보완할 수 있겠지.’
속으로 소정광의 도법을 분해하던 기천웅의 눈이 반짝였다.
‘아니, 허점이 아예 없지는 않군.’
소정광의 빠르고 끈적한 도법을 받아 주던 연호정이 일순 눈을 빛냈다.
기천웅이 중얼거렸다.
“거기.”
훅!
연호정의 발끝이 소정광의 우측 골반을 노렸다.
칼을 쳐올리는 짧은 순간 드러나는 허점이었다. 소정광의 힘과 속도 문제 이전에, 초식 그 자체의 허점이라 봐도 무방한 지점이었다.
파아아악!
소정광은 연호정의 공격을 막지 않았다. 그저 내공을 더 강한 출력으로 쏟아 내 연호정의 빗장뼈를 노렸다.
죽기 전에 죽인다. 살벌한 무리(武理)였다.
투웅!
발에 맞은 소정광이 튕겨 나갔다. 자세부터 내공 전부가 흐트러졌는데도 소정광은 끝까지 칼을 휘둘렀다.
파바박!
당연히 그의 칼은 연호정의 몸에 닿지 않았다. 튕겨 나간 소정광은 비틀거리며 다시 몸을 세웠다.
“거기까지.”
연호정의 말에 소정광이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제, 젠장. 호랑이랑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드네.”
내공 없이 사백 근이 넘는 대호와 생사결을 벌이는 것보다, 생사결이 아닌 이번 비무가 더 힘들었다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다. 비천혈응검을 이렇게까지 탈바꿈시킬 줄은 몰랐어.”
“예전의 제 무공과는 또 달랐습니까?”
“달랐지.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보고 들은 게 다르니까.”
“어느 쪽이 더 우위입니까?”
“우위를 논할 수는 없다. 각자의 깨달음이 돋보이는 무공들이었어.”
소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평가라면 정말 목숨 걸고 수련한 보람이 있다.
“내공, 초식 뭐 하나 빠지지 않고 전반적으로 잘 성장했다.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돼.”
“감사합니다만, 일단 쉴게요.”
소정광은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주군으로 모신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자리였다. 심신은 물론 영혼까지 지쳐 버린 느낌이다. 적어도 반 시진은 쉬어야 할 것이다.
“쉬다가 들어가서 밥 먹어라.”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요.”
피식 웃은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저 멀리 거목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던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걸물이군.”
스르륵.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연호정의 걸음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빨랐다.
순식간에 기천웅의 옆으로 다가온 연호정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언제고 적이 될 사람들 분석하려고 오셨소?”
“분석이야 자네만 보면 되지. 저치의 무공은 분명 대단했지만, 아직 분석할 정도의 가치는 없더군.”
“말이나 못 하면.”
기천웅이 한가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직을 이전한다고?”
“누구한테 들었소?”
“여기저기서 잘도 들려오더군.”
“그렇소. 지하 생활도 지긋지긋할 테니 햇빛 잘 드는 곳으로 옮겨야지.”
“전쟁이 코앞인데 잘도 그런 무리수를 두는군.”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며 걸어갔다.
기천웅이 팔짱을 푼 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무래도 연호정에게 흥미가 많은 모양이었다.
“조직 이전엔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조직 체계도 바꿔야 할 테고, 거주지에 익숙해지는 문제 역시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댁이 걱정해 줄 필요는 없소.”
“걱정해야지. 함께 싸우려고 왔는데.”
“뻔뻔하기 그지없구려.”
“자네가 날 어떻게 보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난 진심이라네.”
“진심이라면 신화교의 상황에 대해서나 알려 주시오.”
“신화교의 상황이라니?”
“오랫동안 폐관했다고는 해도 그동안 다스린 세월이 있을 것이고, 폐관을 끝낸 이후에도 곧장 황궁으로 온 건 아닐 거 아니오? 당금의 신화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봤을 텐데, 그걸 좀 알려 달라 이거요.”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이 녀석 봐라?’
그는 한때 대륙의 천자를 자처했던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그대가 통치했던 세월이 얼마이던가? 찢어지고 무너지고 짓이겨졌다 한들,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그대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걸세. 그걸 짐에게도 알려 달란 말이야.’
황제가 했던 말을, 이 연호정이라는 놈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세상을 보는 시선이 아주 닮았다. 그 높이마저도 비슷했다. 기천웅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과연, 천하가 괜히 영웅으로 칭송하는 게 아니라 이건가.’
기천웅이 담담하게 말했다.
“자세하게는 나도 모른다네. 다만, 내 아들놈이 사음교주에게 홀려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거기서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음?”
“자식을 죽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잘 알겠소만, 거기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만 쏙 빼내서 황궁으로 오려 했던 이유가 뭐요? 설마 소교주의 무공이 당신을 넘어서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절대 그 정도는 아니지.”
“나 같았으면 죽이진 않더라도 어떻게든 짓눌러 버린 후 교의 체계를 바로 세우려 했을 것이오.”
“그게 안 되니까 온 것이네. 난 원래 아들을 죽이고 같이 죽으려 했어. 그걸로 내 마지막 무공을 모두 소진하려 했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네.”
“사음교주를 염두에 뒀군.”
“그렇다네. 그대로 가다간 신화교가 멸망해 버릴지도 몰라. 최악의 경우, 사음교주의 휘하로 흡수될 수도 있지.”
“신화교에는 인재가 그렇게 없소?”
“그 멋들어진 인재 중 꽤 많은 사람이 자네 손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그쪽이 먼저 건드린 거고. 그리고 죽은 놈들 얘기는 빼야지. 본단에 남은 사람들만으로도 어떻게든 조직을 운용할 수 있었을 텐데?”
기천웅이 쓰게 웃었다.
황제와의 대화에서도 흐름이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화정술에는 상대의 화정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네. 중원에서 흔히 말하는 흡정대법과 비슷하지만, 더 까다로운 대신에 부작용 따위는 없지.”
“…….”
“내 아들내미가 휘하 권력자들의 화정을 쥐고 있더군.”
“무슨 뜻이오?”
“나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네. 다만 일반적인 화정술은 아니었어. 아마도 사음교의 주술 따위를 섞은 듯했네. 아들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반기를 들면, 그들의 화정은 그대로 소실될 것이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게 가능하오?”
“말했듯 정확히는 몰라. 그러나 사음교의 주술 중에는 강제적인 충성 서약(忠誠誓約)을 이행하는 게 존재하네. 그걸 화정술과 접목시켰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사음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기천웅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과거 남수활의 함무헌 역시 그러한 술법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음교의 교도들 대부분이 그럴지도 모른다. 당장 중원 무림에 심어 둔 세작들부터도 사음교의 지분이 월등히 높다. 당장 화산파의 화검자도 사음의 세작이 아니었나.
아주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받았다고는 했지만, 몰래 충성 서약의 주술에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화산파의 어떤 노고수가 도교의 술법을 이용, 그것을 제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천웅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나는 수뇌부들 대부분이 그러한 술법에 걸렸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지.”
“…….”
“하지만 그러한 술법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어.”
“호교신장 야하륵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네. 그는 그런 술법에 걸리지 않았어. 끝까지 버티고 버티며 나를 기다렸지. 그래서 나는 야하륵을 믿었다네.”
기천웅이 눈을 감았다.
“결국 내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네. 술법에 걸린 수뇌부 중 극히 일부는 나의 통치를 원했던 것 같네. 말하진 않았지만, 눈빛과 분위기가 그러했어.”
“…….”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어 내 아들놈의 잘못을 규탄하지 않았네. 저희들도 죽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지.”
“거부하고 죽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남은 이들이 아니오?”
“그렇기도 했지.”
그래서 기천웅은 신화교를 위해서 적이 되겠다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당장 소교주를 죽이면 자신도 죽은 채로 신화교가 무너질 것이요, 살아남는다 해도 사음교주의 손에 절단이 날 것이다.
그렇다면 중원과 힘을 합쳐 신화교를 뿌리부터 뒤흔들 수밖에 없다.
“이상하군.”
“거짓말 같은 건 안 하네. 어지간하면 이제 그냥 믿지 그러나?”
“당신의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럼?”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머리로 온갖 생각들이 줄을 이어 터져 나오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기천웅은 알 수 없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오랜 세월을 산 기천웅조차도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당신, 황제 폐하께도 이 말을 드렸소?”
“……!”
“뭐야? 설마 안 드린 거요?”
“드렸다네.”
“역시 그랬나.”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렇게 되면 외통수인데…… 무림맹으로서는 아무래도 무리일 테고.”
“…….”
“폐하께서 별말씀 안 하셨소? 이를테면 전쟁이…….”
“무림에서 선공을 할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했지.”
연호정이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기천웅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자네의 안목은 정말 무섭군. 황제의 지략도 놀랄 만큼 대단했지만, 빠르기로는 자네가 더 빨라.”
“젠장, 역시 그랬군. 한데 그걸 왜 지금까지 말 안 해 줬소?”
“양 부주가 말할 거라고 했네. 하지만 말하기 싫어하는 듯했어.”
“……왜인지 알겠구먼.”
“나는 자네가 더 궁금하네. 그걸 몰랐으면서도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조직을 이전하려 했나?”
“그러게 말이오. 내가 왜 그랬을까?”
기천웅은 깨달았다. 연호정은 머리로는 몰랐지만, 이미 직감적으로 누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할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는 그랬을 것이다.
다만, 직감으로 아는 것과 분석해서 아는 것엔 차이가 있는 법.
연호정이 이리저리 목을 돌렸다.
살벌한 소리가 잘도 났다.
“원래 방어는 내 전문이 아니었지. 오히려 마음에 든다, 이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