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45)
1045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대전은 어두웠다.
곳곳에 화등이 켜져 있었지만, 그 많은 화등도 대전의 어둠을 몰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특유의 음습함을 더욱 부각하는 듯했다.
흔들거리는 화등들은 여기저기 세워진, 마귀인지 뭔지 모를 거대한 석상들의 그림자를 움직이게 했다.
그래서일까? 대전의 좌우로 보이지 않는 귀신들이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내부를 호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대전은 넓었다.
덩치 큰 장정 오백 명을 줄지어 세워 놔도 넉넉할 정도였다. 태사의 아래의 계단에서 대전의 문까지 거리가 상당했고, 바닥에는 시뻘건 융단이 깔려 있었다.
깔린 융단 값만 해도 황금 수십 관은 줘야 할 것 같았다. 융단의 질이 최상 중의 최상이었다. 세상에 다시 나지 않을 명인이 평생을 바쳐 만든 희대의 명품처럼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전을 장식하는 화등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대전 벽면의 그림들도 하나같이 비범해 보였다.
어둡고 사이한 분위기만 제외하면 일국의 주인이 정무를 보는 공간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대전 끝 태사의에, ‘그’가 있었다.
“사신(邪神)이시여.”
높다란 태사의로 이어지는 계단 바로 밑에서 누군가가 오체투지를 한 채로 입을 열었다.
“불의 마가(魔家)에서 연락이 오기를, 저 대륙의 황제를 자처하던 이가 죽었다고 하옵니다.”
태사의에 앉은 이는 말이 없었다.
유독 태사의 중간까지 그림자가 짙어서, 상체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태사의의 주인이 무척 덩치가 크다는 것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용포를 입었다는 것, 그리고 턱을 괴지 않은 오른손 손가락 전부에 보석 박힌 금반지들을 끼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
오체투지한 사람의 입이 다시 열렸다.
“고로, 답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때, 태사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답.”
부르르르!
그 많은 화등 속의 불꽃이 흔들렸다.
불이 흔들리자 석상의 그림자들이 더더욱 격렬한 춤을 추었다. 마치 사악한 신의 음성에 기쁨을 표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지, 혹은 군(軍)을 움직여 적지 앞으로 주둔시켜야 할지를…….”
“가주가 그러더냐.”
오체투지를 한 사내, 사음제(邪淫帝) 야율대극이 융단에 이마를 박았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로군.”
말은 곤란하다고 했지만, 태사의 주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정말 곤란하기 그지없는 일이야. 힘만 세고 우매하기 그지없는 녀석을 다루는 것은 말이지.”
“…….”
“명을 내리기 전까지는 경거망동하지 말라 하였거늘, 그새를 못 참고 물어본단 말인가.”
“소인이 직접 가서 신의 말씀을 전달해도 되겠습니까?”
“무엇 하러?”
“…….”
“삼교일통(三敎一統) 후에는 위세 좋은 마가주라도 너의 발밑에 있을 것이다. 네가 무엇이 아쉬워서 거기까지 간단 말이냐.”
아득한 목소리였다. 듣다 보면 정말이지 당장 내일이라도 삼교가 하나로 통일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끈적하고 나른한 목소리였으나 동시에 명료하기 그지없어, 한번 들으면 그 내용이 머리에 강하게 박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송구하옵니다.”
“고개를 들라.”
야율대극이 천천히 몸을 세웠다.
순간 그는 눈이 부시는 것을 느꼈다.
‘신(神)이다.’
반쯤 그림자가 진 태사의 뒤로 서서히 후광이 이는 듯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야율대극의 눈에는 태사의 뒤로 후광이 일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그 후광은 결코 밝지 않았다.
너무 밝아서 쳐다보기도 힘든 후광이 아니라,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편안한 빛이었다. 옥빛을 닮은 그 후광은 그림자 진 태사의를 감싸 안으며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일한 독존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대극아.”
“예.”
“내 눈에는 황제가 죽지 않은 것이 보이는구나.”
황제가 죽지 않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당금의 황제는 죽었을지라도 그다음, 또 그다음의 황제는 나기 마련이다. 저 야만스럽고 못 배운 대륙 아이들은 세상의 지배자를 두고 황제요, 천자라 부르지. 아마 그 아이들의 목숨이 하나라도 살아 있는 한 황제라는 직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골계(滑稽)로다. 벌레처럼 하찮고 여린 아이들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 통치할 수는 있어도 지배할 수는 없는 법. 저 아이들이 그것을 모르니,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황제라는 칭호가 죽지 않을 것이다.”
“무엄하고 천한 잡것들이 신의 존재함을 모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그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닐 터. 소인을 필두로 한 신의 자식들은 언제고 대륙의 하찮은 이들을 개도할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너는 올바르며, 새 시대의 광명을 내 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한없는 영광일 따름입니다.”
재차 융단에 이마를 박는 야율대극의 얼굴엔 황홀함이 가득했다.
사음제라 불리며, 기괴하고도 강력한 사왕들을 거느리는 대장 격 고수의 얼굴에는 그처럼 맹목적인 광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하찮고 무도한 아이들이라도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승에서의 죽음은 달리 말하면 도피나 다를 바 없으니. 깨우치게 하여 신을 받드는 어린 종으로서 그 삶을 다할 때까지 신지(神地)를 거닐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찮은 잡것들이라도 신께서 베푸는 자비를 안다면, 두고두고 후회하며 떠받들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저 대륙을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 낙엽을 부서지지 않게 쥐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법, 너희가 당장에라도 대륙으로 넘어가 우매한 아이들을 개도하고 싶은 심정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송구하고 또 송구할 따름입니다.”
“너희는 가장 가까이서 신을 받드는 자녀들이 아니더냐. 신을 위해서 산다고는 하나, 너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야 어찌 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
“진정 나를 믿고 따른다면 조바심 따위 있을 리 없을 터이나, 사람은 불완전하여 신의 존재함을 알고, 또 모시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의심이라는 귀신을 드리우고야 만다.”
“송구하옵니다.”
“내, 나의 자녀들에게 엄할지언정 가혹하지는 않다. 조만간 개도의 길을 열어 줄 터이니 네가 믿음이 부족한 아이들의 길라잡이가 되어 주거라.”
“신명(神命)을 받들어 사음의 개도에 아무 문제가 없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좋다. 불의 마가에는 내 따로 연락을 취할 것인즉, 너는 이만 돌아가거라.”
“신명을 받듭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야율대극은 무려 아홉 번의 절을 올리고는 총총걸음으로 대전을 나섰다.
“…….”
홀로 남은 태사의의 주인이 눈을 떴다.
스으으.
아무도 없는 대전 곳곳에서 뱀이 기어다니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림자 진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쌍의 눈은 기묘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밝고 아름답지만, 가만히 보다 보면 호랑이의 점 박힌 눈이 떠오를 만큼 위압적이고 영롱했다.
“신(神)이라…… 우습기 짝이 없군.”
조금 전, 야율대극과 마주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말투였다. 음색은 같지만 말투에서 편안함이 묻어 나온다.
“진정 신이 존재했다면 굳이 죄 많은 사람의 몸으로 기어들어 오겠느냐, 이 말이지. 결국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나약한 종자들에 불과해.”
이전의 그가 신을 자처하는 광인(狂人)과 같았다면, 지금의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강호인과 같았다.
노회하지만, 그 깊이가 엄청나다. 한없이 어둡고 어두워서 도리어 밝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느 하나의 기질로는 정의하기 힘든 속세의 음성이 거기에 있었다.
“적흠은 게 있느냐.”
스륵.
아무런 대답 없이 나타난 사내는 이제 갓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청년의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았다. 외양은 청년이지만, 기도는 중년을 훌쩍 넘은 경험 많은 이의 수더분함을 지니고 있었다.
“향로를 가져오거라.”
잠시 후.
적흠이라 불린 청년이 구멍이 아홉 개가 뚫린 금빛 향로를 계단 밑에 두었다.
“뿌리거라.”
청년이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열어 손가락을 넣은 청년이 기묘한 가루를 집어 들어 향로 구멍에 뿌렸다.
화르르르륵!
일순간 타오르는 청록색 불꽃이 대전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불꽃은 대전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이 솟았다. 대전 곳곳을 밝히는 어두운 빛이 음험했던 대전을 신비롭게 꾸며 주었다.
태사의에 앉은 사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오게.”
화르륵! 화르르르륵!
거대해진 불꽃이 연신 꿈틀거리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거대했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사람이었다. 불꽃이 연신 일렁이고 있는데도 또렷한 오관과 의복의 펄럭임까지도 재현했다.
불타오르는 청록빛 청년이 향로 위에 나타났다. 불꽃이 그리는 섬세한 명화는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는 신기(神技)와 같았다.
태사의의 주인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새를 못 참아서 진군 여부를 물어보나?”
불의 청년이 말했다.
“어쩔 수 없었소.”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넘실거리는 불꽃이었지만, 불꽃이 만든 사람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황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첩보에 의하면 황궁에 권신과 검선이 나타났다고 하오.”
“황제가 죽었다 하니, 놈들 입장에선 북부를 틀어막기 위해 강력한 전력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야.”
“그래서가 아니오. 당신 말마따나 황제가 자신의 죽음을 위장한 것이라면,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적을 속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얘기요.”
“어떻게 속일 생각인가?”
“진군하여 반응부터 봐야겠지.”
“다른 첩보는 없었겠지?”
“그렇소.”
“첩보도 없고, 놈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르니 일단 한번 건드려나 보겠다 이 말인가?”
“문제라도 있소?”
태사의의 주인이 미소를 지었다. 눈빛만 보였지만, 그 눈이 살짝 휘어진 것으로 웃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비를 죽이고 싶은 겐가?”
“…….”
“저 무림 놈들은 바보가 아니야. 속이려 해도 제대로 속을지나 의문이고, 도리어 일만 복잡해질 뿐이라네. 전략 전술은 그렇게 짜는 것이 아니지.”
“…….”
“조금만 기다려 보게. 곧 광혈에서 일이 터질 게야.”
“광혈이 움직인다고? 광혈교주는 본인의 힘을 모으는 데에 혈안이 된 작자요. 신마림을 공략하겠다고 나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소.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광혈의 주인이 움직여야만 그 마귀 놈들도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시는가?”
“……?!”
“자네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지 않았는가. 보채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설마 당신…… 그쪽에도 손을 뻗었소?”
“손을 뻗었다는 표현은 좀 그렇군. 그리고 그리 말하면 자네 입장이 뭐가 되나? 나는 자네와 손을 잡았을 뿐, 자네를 조종하는 게 아니잖나.”
“…….”
“걱정하지 말고 음기(陰氣) 가득한 계집이나 품고 있게나. 자네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 줄 그런 계집 말이야.”
“나를 당신과 같은 사람 취급하지 마시오.”
불쾌하다는 듯 말한 불의 청년이 이내 훅! 하고 사라졌다.
향로 위, 허연 연기가 무겁게 움직였다.
태사의의 주인이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하나같이 어리고, 어설프고, 하찮구나. 이러니 애들 다루는 게 힘들면서도 재미있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