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46)
1046화. 폭풍전야(暴風前夜) (2)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정이하가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과거, 광도방주 석패가 죽고 그의 아들까지 사망한 후 방주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연호정이 묵룡부의 소부주가 된 이후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있었다. 그중 녹림총채주를 위시로 남은 아홉 세력의 수장 중 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물갈이되었다.
정이하는 광도방 내에서도 호방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그 무공 역시 일문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내였다. 양천과 연호정이 머리를 맞대며 고민한 후에 밀어 준 후계자가 그였다.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세대가 교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꼽추 청년, 새로이 흑동 상단의 주인이 된 단리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오히려 좋습니다. 소부주님의 무력과 명성은 천하 정점에 달해 있어요. 게다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대륙을 종횡하며 애쓰셨던 분이니, 시국을 생각하면 부주님의 부주직 이양은 갑작스럽긴 하되 시기적절한 정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종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 사건 이후 우리 흑도 무림에서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이 엄청나게 감소하였습니다. 지역 내의 분쟁이야 어쩔 수 없지만, 부주님과 소부주님의 파격적인 정책으로 안정기를 맞았지요. 이런 상황에서 부주 이양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정이하가 한숨을 쉬었다.
“나라고 그걸 나쁘게 보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지요.”
이 자리에 있는 열 개 조직의 수장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연호정 덕분에 수장이 되어 각 조직의 병폐를 없애고 성공한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연호정 덕분에 인생 역전을 맛본 이들이란 것이다.
흑도에선 누구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목숨 걸고 갚는 것을 멍청하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생존이 최우선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내 가족도 팔아넘기는 것이 흑도였다.
적어도 이전까지의 흑도는 그랬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연호정 역시 상식을 지닌 인물을 각 조직의 수장으로 밀어 주었다.
덕분에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연호정에게 깊은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갚아야 하는데, 묵룡부를 위해 성실히 일하라는 말 외에는 따로 갚을 기회를 주지 않는 연호정 때문에 고민인 것이다.
“솔직한 말로, 저는 부담스러웠습니다. 광도방의 방주가 된 것도 그렇지만 부족함이 많은 나이에 묵룡부의 장로까지 되어 버렸잖습니까. 보는 눈 때문에라도 장로직을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도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대다수가 동의하는 바였다.
그들은 비록 성격은 다 달랐지만, 젊고 올바른 시선을 지녔으며 나름의 야망도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루가 아닌 일각 사이로도 배신이 판을 치는 흑도에서 제대로 치고 올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런 성품을 갖고도 끝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에 연호정의 선택을 받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목숨 걸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그리 크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각 조직의 병폐를 해결하고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인재들.
그러나 그 이상은 버거운 인재들.
지금의 그들은 그러했다.
정이하가 말을 이었다.
“소부주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짐작은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훤히 들여다볼 수 없는 문제니까요. 다만, 그분께서 격동의 시기를 앞당기려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쩔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제가 걱정되는 것은…… 애써 안정기를 맞은 조직들이 너무 빨리 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무림에 발을 들인 자, 언제고 칼부림 속에서 목숨을 잃게 마련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 정도 각오가 없었다면 조직에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다스리는 조직원들의 목숨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종림이 슬쩍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한결 편안하고 유연해진 얼굴. 그는 바로 숙청 시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월인문의 문주, 벽운호였다.
“월인문주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모두의 시선이 벽운호에게 몰렸다.
한 모금 찻물로 목을 축인 벽운호가 그 표정만큼이나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얘기들은 이게 전부요?”
“예?”
“나는 그대들이 해결할 수는 없지만 논의는 해야 할 만한 안건이 있다고 하여 이곳에 왔소.”
“아, 그랬지요.”
“하지만 줄곧 들어 보니, 논의해야 할 만한 얘깃거리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오.”
이 자리에서 나이도, 경험도 가장 많은 사람이 그였다. 기실 배분으로도 그들보다 한 계단 위에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벽운호는 결코 하대하지 않았다. 흑도에서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미덕이었다.
정이하가 흐린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대들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연 소부주가 은인이라고.”
“물론 그렇습니다.”
“은인이 흑도 연맹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면 응당 기뻐해야 함이 마땅하오. 한데 기뻐하기 이전에 걱정부터 하다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소.”
“문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조직의 장을 맡은 만큼, 휘하 조직원들의 걱정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벽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대들이 목숨 걸고 키워 낸 조직이고, 묵룡부를 도와 천하를 논하겠다고 결의를 다진 이들이라면 그럴 수 있소.”
“예?”
“그대들이 말했듯, 소부주님이 아니었다면 죽음보다도 끔찍한 삶을 영위했을 것이오.”
“……!”
“지금 와서 무엇이 그리 걱정스럽고, 뭐가 그리 아깝소?”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내 새로운 장강수로의 총채주, 홍국이 말했다.
“아까운 게 아닙니다.”
평소 워낙 말수가 없는 그의 발언은 언제나 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다른 조직은 몰라도 우리 수로채는 전쟁이든 뭐든 치를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럼 뭐가 걱정이오?”
“다음 세대가 걱정입니다.”
홍국의 눈이 깊어졌다.
“부주님의 십이지신처럼, 소부주님께서는 다섯 고수와 함께 묵룡부를 운용한다 하셨습니다.”
굳이 비밀이랄 것도 없는 정보였다.
새 부주인 연호정은 휘하에 다섯 명의 고수를 두고 조직을 철저히 통제하겠다고 하였다.
물론 그 다섯 고수는 무력의 상징이며 그들을 중심으로 전쟁에 나서는 것이지, 부내 행정 부문에 관해서는 일말의 관여도 하지 않도록 하겠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흑도의 새 주인이, 어떠한 조직도 운용해 본 적 없는 고수들을 데려와 심복으로 삼았다. 그 심복들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주어졌는데, 그 위치가 부주 바로 아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격적인 데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이건 파격을 넘어 불가해한 승진이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
“장강의 여러 수로채를 다독이고 악행을 금한 것. 그것이 바로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 이상은 저의 역량으로 불가능합니다.”
솔직담백한 고백이었다.
“저는 이 자리에 미련이 없습니다. 언제까지고 수로채의 맹주로 남을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생각을, 이 자리에 모인 다른 문주님들께서도 하고 계실 겁니다.”
몇몇 수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러나야 할 순간이 온다면 언제든 물러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부주님께서 이런 파격적인 인사 처리를 감행하게 되면, 각 조직의 장들이 휘하 부하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곳에 모인 다섯 개의 흑도 명문을 위시로 녹림과 수로채, 그리고 세 개의 상단들은 초기 묵룡부를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들이라 할 수 있었다.
양천의 절대적인 무력과 무시무시한 위엄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한 문파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 묵룡부가 여기까지 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양천이 연호정을 소부주로 삼기 전, 열 명의 장로를 처리하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때를 봐서 머리통을 날려 버릴 생각은 있었지만, 묵룡부의 기반을 다진 조직의 수장들을 섣불리 죽이면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기에 우선은 살려 둔 것이다.
연호정은 그것을 단숨에 해치워 버렸다.
삼교가 없었다면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힘들었을 일이다. 물론 워낙 죄질들이 나빠 반드시 무너트렸겠지만, 시간을 들이며 알음알음 장악해 나간 연후에야 박살을 냈을 거란 말이다.
그러나 연호정에게는, 아니 중원에는 시간이 없었다. 당장 코앞으로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데, 그런 작자들과 함께 무언가를 도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호정이 과감하게 일을 처리한 데에는 그런 연유가 있었다. 그리고 미봉책으로나마 당장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인재들을 골라 뽑은 것도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었다.
“소부주님의 명성과 무력은 부주님의 그것과 또 다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소부주님에 대한 불만이 일어날 것이며, 그것은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 열 개 조직 전체로 퍼질 겁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
여전히 평온했지만, 벽운호의 목소리에는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들은 각자가 맞이한 앞날을 지나치게 온건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 같소.”
“예?”
녹림의 새로운 총채주, 임거숙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산적 놈이라 어려운 말은 모릅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가르침은 내가 아니라 관련자가 내려 주는 게 낫지 않겠소?”
덜컹.
벽운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다섯 명의 남녀가 들어왔다.
장로들은 깜짝 놀랐다.
‘저들은?!’
다섯 남녀는 바로 연호정이 휘하에 두겠다는 그 고수들이었다.
벽운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섯 남녀 모두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그중 사마현은 다소 삐딱한 자세였지만, 그래도 충분한 예의는 표했다.
가운데에 선 여인, 묵비가 말했다.
“기별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온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묵비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고개는 숙였지만, 그것이 결코 비굴하거나 느슨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행동에 다른 장로들도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벽운호가 말했다.
“장로들께선 욕을 하려면 이 사람에게 하시오. 이분들을 여기로 뫼시는 데 있어 모두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러마, 했던 사람은 나요.”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무리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부탁이 무리한 건지 아닌지는 이 자리가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겠소?”
“그럴 수도 있겠군요.”
벽운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회의장 탁자를 가리켰다. 알아서 시작하라는 말이었다.
묵비가 자세를 곧게 하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계신 장로님들은 닷새 후 묵룡부가 이전될 때, 함께 이주하지 말고 이곳에서 자리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묵비의 말은 예측 불가의 날카로움을 담고 있었다.
“그게 싫으시다면 장로직을 내려놓고 각자의 조직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