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47)
1047화. 폭풍전야(暴風前夜) (3)
묵비의 발언은 평화로운 마을에 화포가 떨어진 것처럼 갑작스럽고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이하가 깜짝 놀라 물었다.
“함께 가지 않는다니요? 아, 아니 그것보다 장로직을 내려놓고 돌아가라는 말은 대체……?!”
“앞뒤 다 잘라 내고 본론만 꺼냈으니 여러분들께서 당황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묵비의 목소리는 참으로 묘했다.
담담한 가운데 거역 못 할 위엄이 담겨 있다. 하지만 듣는 사람 쪽에서 딱히 분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말투 덕분이기도 했다. 강압적인 분위기가 없지는 않지만, 상대에 대한 존중도 확실했다. 거기에 무극을 코앞에 둔 초고수의 기도와 숱한 전장을 겪으며 연마된 강인한 분위기는 회의실을 완벽히 장악하게 만드는 매력을 끌어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지금의 장로님들께선 신(新) 묵룡부, 흑제성(黑帝城)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태어날 조직의 어른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수로맹주 홍국은 수적 출신임에도 신중하고 차분했다.
그러나 그 역시 언짢은 기색을 아예 없앨 수는 없었다. 아닌 말로 차기 부주의 친인이란 명목으로 단숨에 조직의 최고위층이 된 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와 명령하듯 말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 역시 언제고 다섯 분과 대화를 나누어야 할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설명도 없이 남아라, 떠나라 등의 말을 듣는 우리 심정이 어떨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설명해 주십시오.”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작디작은 미소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회의실의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지는 듯했다.
당금 강호인 중에서도 인생 험하게 산 것만 보면 묵비를 따를 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란 말이다.
무인으로서의 기도가 자연스레 강하고 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기도는 누구도 묵비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반대로 그녀 본연이 가진 사람으로서의 매력을 격감시키는 역할도 했다.
큰 키와 무공 연마로 다듬어진 늘씬한 육체, 거기에 또렷한 오관과 깊은 눈빛은 누가 봐도 찬탄을 터트릴 외양이다. 평소에 표정 변화가 많지 않지만, 그렇기에 한 번씩 미소를 지을 때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다행입니다. 장로님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신중하면서도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잘 지키고 계신 분들이라서.”
“……?”
“그래서 더 답답합니다. 제가(齊家)는 신경 쓰지만, 세상을 제대로 읽지 않으시는 것이.”
묘한 말이었다.
세상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읽지 않는다고 한다. 최소한 무능력한 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발언이었다.
“전쟁은 곧 벌어집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될지,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감히 예상컨대, 중원 전체가 전화에 휩싸일 가능성이 큽니다.”
“…….”
“지금 제가를 신경 쓸 때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후대를 생각할 때라고 보시나요?”
홍국의 눈이 흔들렸다.
정이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물론 상황은 그렇습니다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하게…….”
“사태를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의 인내는 신중함이지만, 사태를 낙관하는 사람의 인내는 나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묵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내 조직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누구도 그 태도에 침을 뱉을 순 없지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묵룡부의 장로가 아닙니까?”
“……!”
“흑도 연맹의 장로 직함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코앞에 전화(戰火)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음을 안다면 이래서는 안 되지요. 저는 비록 강호 경험이 일천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
“저 역시 평화로운 대화를 원합니다. 굳이 싸우고, 헐뜯고 이죽거리는 행위로 분란을 야기하는 취미 따위는 없어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지나치게 소심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소심했다는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라면, 조직의 새로운 장이 되었을 때부터 조직의 체제를 정비한 후 곧장 무사들을 훈련함과 동시에 전시에 어느 곳을 사수할지, 어떤 곳에서의 이점을 살릴 수 있을지, 어느 정도까지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지 계획하여 상부에 안건을 올렸을 겁니다.”
장로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묵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연 공자, 아니 연 소부주 덕분에 조직 내의 병폐를 없애고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거기서 끝나야 했나요?”
“…….”
“그대들이 은인으로 생각하는 연 소부주가, 당장 무림맹으로 떠난 후 청해 신마림으로 가서 큰 싸움을 벌였고, 이후 맹으로 돌아와 갖은 수모를 겪다가 귀환했습니다.”
“……!”
“저에게 만약 장로의 권한이 있었다면, 조직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 무림맹으로 달려왔을 겁니다. 부주께서 허가를 내주지 않으셨다 한들, 시도라도 해 봤을 거란 말입니다.”
“…….”
“도대체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연 소부주가 여러분들을 택한 것은, 미봉책일지언정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앉아서 내 집만 챙기지 말고, 그 너머의 미래도 그려 볼 줄 알았어야지요.”
한종림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솔직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들에게는 능력이 있었다. 능력이 있다면 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기존의 수장과 다르다고는 하나 뿌리 깊은 흑도인들이었다. 배신을 혐오하고 호협의 기질을 품고 있으나, 그 싹을 틔워 보지 못한 흑도의 씨앗들.
그들의 눈은 오직 연호정에게만 닿아 있었다. 그와 함께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명령 없이 움직이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연약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악랄한 흑도인이었다면 이 기회에 제 배나 불리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새로운 인생을 거머쥐게 해 준 연호정을 존경했고 나아가 자신들을 이끌어 줄 대장으로 보았다.
내 조직에서는 통찰력 있는 수장이 될 수 있지만, 더 큰 세계에서는 신중함으로 포장된 소심함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겸허하고 솔직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계를 알았다면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했어야 합니다. 내 한계가 이 정도이니 인정하고 잘하는 것만 찾자가 아니라, 한계를 깨고 나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어야 했습니다.”
“…….”
“평화로운 때에는 여러분들 같은 사람도 필요하지요. 하지만 전쟁이 코앞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멈춰 버린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한계를 깨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연 소부주는, 아니 차기 흑제성주는 이 전쟁을 반드시 이기고자 합니다.”
“……!!”
“당신들은 차기 흑제성주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 하지요? 그걸 진즉 알고 있었다면, 이미 싸울 준비가 다 끝났어야 합니다.”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온 묵비의 음성은 처음과 같이 차분하고 담담했다.
“흑제성주가 원하는 것은 승리요, 생존입니다. 그것들은 희생 없이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여러분들이 들고일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그때, 소정광이 입을 열었다.
“한번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 다시 불붙어 일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모두의 시선이 소정광에게 향했다.
자신의 말을 끊었지만, 묵비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소정광은 묵비 못지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곳에 남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이곳의 관리자가 있기도 해야 하지만, 함께 움직여서 득 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여러분들이 이곳에 있어야 우리도 편합니다.”
“편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십대조직의 무사들도 이곳으로 모일 겁니다. 말하자면 그대들은 흑제성을 위한 일차 방어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
“눈에 불을 켜고 창검을 휘두르지 못할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앞마당이라도 지켜 주는 것이 우리에겐 이득입니다.”
장로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움보다는 분노에 기인한 것이었다.
가만히 그들을 보던 진양이 툭 던지듯 물었다.
“부끄럽소?”
“…….”
“부끄럽다면 다행이오. 아직 죽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니까.”
“……?!”
“여기 정광이 말했듯, 한계를 인정하고 안주한 자가 다시 세상과 싸우기 위해 들고 일어나는 경우는 몇 번 본 적이 없소. 하지만 나 역시 한때나마 흑도 문파를 이끌어 본 사람으로서, 그대들과 함께한다면 좋겠다는 마음이오.”
진양의 말을 강량이 받았다.
“나는 흑도 명문 귀철검문의 유일무이한 생존자올시다. 묵룡부주, 투왕 양천의 손에 멸문지화를 당했으니 그야말로 철천지수라 할 수 있소. 그런데도 나는 여기에 있소. 왜일 것 같소?”
“…….”
“은인인 연 형님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기도 했지만, 이 전쟁에서 이기지 않고서는 내 은원조차 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외다.”
“……!”
“뭐, 지금 실력으로 덤벼 봤자 투왕의 삼초지적도 안 되겠지만.”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지만, 기실 이곳에 모인 누구보다도 처절한 인생을 살아온 그였다.
사마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할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함께 싸우는 아군들이라고 하니 한마디만 하겠소.”
“…….”
“겁나면 그냥 탈퇴하고 빠지시오. 대장도 그런 사소한 은혜 따위는 금방 잊을 사람이니까 당신들에게도 이득일 거요.”
“……?!”
“대신 탈퇴비나 좀 내시오. 전쟁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거든. 그 정도 의리들은 있겠지? 대장 덕분에 쏠쏠하게 벌었잖아?”
그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화아아악!
장로들의 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침묵했던 단리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눈 아래로 보는 것까지는 상관없지만, 그 정도로 배은망덕한 졸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을 수 없소.”
“그래? 그럼 어쩌실 건데?”
쾅!
회의실 탁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그간의 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녹림의 신임 총채주, 임거숙의 두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어쩌기는 뭘 어째! 흑도를 대표하는 우리가 언제부터 겁먹은 지렁이로 전락했단 말이냐! 내 비록 산적 출신이지만, 의리도 모르는 벌레 새끼는 아니다!”
“산적 출신이 아니라 지금도 그냥 산적 아니오?”
“저 새끼가?”
임거숙의 얼굴이 활화산처럼 변했다.
“너 이 새끼! 소부주님 지인이라고 가만 들어 줬더니 못 하는 말이 없어! 안 되겠구만. 너 나와, 인마!”
“안 나가, 인마.”
“뭐, 뭣이라?!”
“한판 붙는 건 언제라도 환영이다. 우리와 싸우고 싶다면 자신의 거취부터 분명하게 한 연후에 칼을 뽑아라.”
“뭘로 들은 거야! 녹림은 무조건 참전이다!”
“그럼 댁은 나와. 실력 좀 보자고.”
임거숙이 씩씩대며 회의장 문을 박찼다. 사마현이 피식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어수선해진 회의장 속.
묵비의 잔잔한 음성이 그들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반나절 동안 생각할 시간을 드리지요. 결정이 끝났다면, 이번엔 그대들이 우리에게 찾아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