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48)
1048화. 폭풍전야(暴風前夜) (4)
“……고로, 장로들 전원이 적극적으로 참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고 해요.”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참전은 원래도 했을 거야. 다만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그건 그렇죠.”
“해서, 지금은 어쩌고 있대?”
“대부분 연무장에 쓰러져 있대요.”
“싸웠어?”
“싸웠다기보다는…… 뭐, 싸운 건 싸운 거죠. 사마 공자가 도발을 좀 했다는데, 나중에 보니까 진지한 비무 비슷하게 되어 버렸더라고요.”
“얼씨구.”
정안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너도 연심과 칼부림하다가 가까워진 거잖아.”
“그거야 공통의 목적도 있었고, 애초에 어렸을 때는 친했으니까…….”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다. 어쨌거나 장로들은 내가 다섯 명을 휘하에 두는 걸 편안하게만 보진 못했을 거야. 그러고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시비까지 걸어 주니 옳다구나 하고 칼을 뽑았을 거다.”
“그렇기에는 비무가 너무 배움의 장 같은 느낌으로 진행되던걸요?”
“이해하기 시작한 거지.”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부터 강해져야 한다는 걸.”
“그 정도야 다들 알지 않나요?”
“아는 것과 마음 깊이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야. 실제로 그들이 더 강해지든 아니든, 어쨌거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면 이전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모하겠지.”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이 녀석들, 잘하려나 싶었는데 아주 제법이군.”
결국 무인은 주먹이요, 칼이다.
백도니, 흑도니 구분 따위는 필요치 않다. 무(武)를 익히고 그 속에 나 자신을 던진 사람이라면, 같은 것을 공유하는 이들끼리의 결판도 혀가 아닌 칼로써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됐군. 이따가 시간 나면 슥 가서 열매만 똑 따 먹으면 되겠다.”
“저는 소부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도 함께하다 보면 이해할 거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사부님.”
“부주님께요?”
“슬슬 보내 드려야지. 어른이라고 눈치를 안 보는 건 아니니까.”
* * *
부주전에 들어온 연호정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태사의로 이어지는 계단 밑에 선 양천과 그의 좌우로 선 열두 명의 고수들이었다.
양천은 뒷짐을 진 채 태사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도는 완벽하게 갈무리되어 있었고, 자세 역시 언제나처럼 곧았다.
연호정은 양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왔느냐.”
“예.”
양천은 돌아보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태사의를 향해 있었다.
연호정은 서슴없이 양천의 삼 보 뒤까지 걸어가 멈추었다.
양천이 입을 열었다.
“옛날, 처음 강호에 출도했을 때 말이다.”
“예.”
“솔직히 어떤 정신으로 출도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다만, 첫 상대를 쓰러트렸을 때의 기억은 확실하게 난다.”
“기뻐 날뛰셨겠습니다.”
“두려웠지.”
양천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는 산서에서 알아주는 창술사였다. 창술에 관해서라면 산서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였어. 그중에서는 말석이었지만, 그 동네에서 배에 힘 좀 주고 다닐 정도는 되었지.”
산서 무림은 다른 지역보다 고수가 유독 적은 편이었다. 산서 최고수가 섬서나 하남으로 가면, 구파를 제외하고도 승패를 논하기 힘든 이들이 수십 명은 될 것이다.
게다가 무림인 중 창을 쓰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산서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라고 보긴 힘들 것이다.
“나는 약했다. 기반은 제대로 다졌지만, 이 정도로는 평생 가야 대문파 장문인급에나 겨우 다다를까 싶었지. 나는 그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이왕지사 무공을 익혔으니, 천하제일을 논하고 싶었어.”
“…….”
“하지만 첫 상대로 고른 사람은 그 정도 고수였다. 아직도 기억나. 귀문삼창(鬼門三槍)이라 불리던 송학이란 이름의 사내였지. 나이는 마흔쯤 되었을 게다.”
“기억력도 좋으십니다.”
“우리는 무려 이백 합을 넘게 겨루었지. 내 몸은 창상으로 도배가 되었고, 그 작자는 체력 문제를 제외하면 아무 이상이 없었어. 출도 후 첫 상대에게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양천이 눈을 감았다.
그때의 승부가 아직도 선했다.
“놈의 방심을 유도했고, 기적적인 일격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게 실력 아닙니까.”
“물론 운도 실력이지. 다만, 그 뒤에 나는 믿기 힘든 짓거리를 했다.”
“……?”
“놈의 시체를, 놈이 휘두른 창으로 난도질해 버렸지.”
꽤 끔찍한 얘기였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못 견디겠더군. 이놈에게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
“놈의 창이 무서웠다. 훈련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 내 몸뚱이가 원망스러웠어. 놈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지. 놈의 얼굴과 몸을 난도질하지 않고서는 평생 패배자가 될 것 같았다.”
알아보지도 못하게 훼손을 시켜 놔야 그자에 대한 공포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놈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선명해졌지. 지금도 그래.”
“…….”
“놈과의 싸움에서 승리 후, 나는 곧장 산으로 올랐다. 이 두려움을 없애 버리지 않는 한 두 번 다시 싸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사흘 만에 내려와서 또 다른 창술사와 붙었지.”
“왜 그러셨습니까?”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양천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산서에 이름난 고수들을 꺾고, 하북으로 건너와 또 다른 고수들을 격파했다. 죽을 뻔한 적은 셀 수도 없었어. 자칭 권마(拳魔)라 칭하던 놈과는 한나절을 넘게 싸우다가 겨우 이겼는데, 몸을 회복하는 데만 반년이 넘게 걸렸다.”
내공을 익힌 무림인의 회복 속도는 여느 범부보다 훨씬 빠르다. 그럼에도 반년 동안 원래대로 회복하지 못했다면, 그야말로 치명상을 입은 셈이다.
“이후, 내 몸에 나는 상처들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오 년 뒤, 나는 십수마객(十手魔客)과 싸워 이겼다.”
십수마객은 그 무력이 소림 방장, 무당 장문인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적인 마두였다.
악행도 대단했지만, 특히 신법이 워낙 빠르고 신출귀몰해서 누구라도 싸우기를 꺼렸던 마인 중의 마인이 그였다.
“반년 넘는 회복 기간 동안 큰 깨달음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할 것까지야 없지. 그저 내 무공에 대해 깊이 사색했을 뿐이야. 그러나,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이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을 거다.”
“…….”
“죽음과 두려움의 늪에 빠져도 악귀처럼 살아 돌아왔다. 피투성이가 되어 운신도 못 할 때는 차라리 잘됐다며 내 무공을 점검했지.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나는 투왕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었다.”
양천이 눈을 떴다.
감기 전에 보였던 태사의와 지금 보이는 태사의는 묘하게 달라 보였다.
“사람이 승승장구만 할 수는 없어. 나 역시 패배한 적이 많았다. 기어이 도망쳐서 살긴 했지만.”
“…….”
“패배도 없이, 휴식도 없이 정상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거야. 인생이 그런 게지. 답답하고 공허해도, 이 순간 역시 훗날 내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단 말이다.”
양천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서로를 똑바로 마주했다.
“너는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달려왔다. 너의 잠재력과 천운 덕에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게 내 생각이다.”
“…….”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된다.”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이 말이 부주직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너만 한 녀석이 언제까지 모르고 있을까. 내가 말해 주지 않아도 이상함을 눈치챌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분석에 관한 얘기였다.
이번 전쟁은 중원 무림의 선공이 있기 전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
전쟁이 시작된다면 당연히 연호정이 먼저 움직일 것이다. 양천은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연호정은 그리 마음을 먹었다.
“네가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만천하가 안다. 그리고 그걸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더더욱 잘 알고 있다.”
“…….”
“네 눈에는 차지 않을지 몰라도, 세상에는 강자가 많아. 어쩌면 드러내지 않았을 뿐 너 이상으로 지혜로운 자들도 많을 거다. 그런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부님. 저는…….”
“안다, 알아.”
양천이 연호정의 손을 잡았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담담한 얼굴로, 거친 두 손으로 제 손을 잡는 투왕의 모습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자애로 넘치고 있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그간 본 세월이 얼마이더냐? 지난 몇 년은 남들의 수십 년이 부럽지 않을 만큼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
“네 이 두 손에, 수많은 목숨이 달려 있다. 네가 전쟁의 참화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사람들의 소중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
“그래도 항상 상기해야 한다. 내 손짓 하나, 말 한마디에 수백 명의 목숨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네 출신이 백도라는 걸로 걸고넘어지는 놈들도 하나씩 생길 거다.”
“……그렇겠지요.”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전쟁의 시작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을 거다. 전쟁만을 위해 사는 것도 좋으나, 네 미래도 생각해야지.”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당면한 싸움이 너무나도 크고 치열할 것 같았다.
아닌 말로,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 그런데도 양천은 미래를 입에 담고 있었다.
오랫동안 강호를 전전하며 무력 못지않은 지혜를 쌓아 온 양천이, 설마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연호정의 손을 놓은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야 이 어둡고 컴컴한 동굴에 내 꿈을 놓고 간다. 너는 지상으로 올라가 너만의 꿈과 미래를 그려 보도록 해라.”
“…….”
“이만 간다. 나중에 보자꾸나.”
양천은 인사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런 그의 뒤를, 열두 명의 고수들이 조용히 따랐다.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연호정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주군만을 따르겠다는, 주군이 아닌 이에게는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충심 가득한 고집이 거기에 있었다.
대전을 나서는 양천의 등을 보며, 연호정은 말없이 절을 올렸다. 같은 목적이 있어 엮인 관계였지만, 방금 양천이 보여 준 모습엔 실로 스승다운 가르침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양천이 떠났다.
서산으로 지는 묵룡의 울음소리 너머.
어둠으로 가득한 흑제의 의지가 올라온다.
한 달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