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0)
1050화. 폭풍전야(暴風前夜) (6)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간 서신으로 연락만 주고받았지, 이렇게 얼굴은 뵌 것은 정말 몇 년 만인 것 같습니다.”
“몇 년은 무슨. 과장도 심하구먼.”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요, 마음이.”
제갈문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자네, 아주 신수가 훤해졌구만? 어디 가서 거지라고 말도 못 하겠네.”
가득상이 킬킬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무림맹의 군사를 뵈러 오는데 냄새를 풍길 수는 없지요. 반나절 동안 때를 싹 밀었습니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사실 예전에 한 번 뽀득뽀득 씻어 봤는데, 그 느낌이 아주 좋더라고요. 그때 이후로 없던 가려움증까지 생기지 뭡니까? 그다음부터는 주기적으로 한 번씩 씻습니다.”
“그거야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반가운 소리지만, 자네는 개방의 작은 주인이 아닌가? 씻지 않는 게 문규이거늘 방주께서 용케도 그걸 용인하셨구먼?”
“어차피 제가 물려받을 건데요.”
“자유분방함이 도가 지나쳤군.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용두방주님께서는 잘 계신가?”
가득상이 쓰게 웃었다.
“안 좋으십니다.”
“어디가? 설마 몸이?”
“왼종일 누워 계십니다. 아마 오래 못 사실 것 같아요.”
그런 얘기를 잘도 담담하게 하는 그였다.
제갈문호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아, 그러면 진즉 연락을 하지 그랬는가!”
“연락한대도 딱히 수도 없고요. 사부도 괜히 바쁜 사람들한테 심란한 얘기 전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뭐……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라서요.”
“병이 아니면?”
“노쇠죠.”
노쇠, 노화.
제갈문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용두방주님의 연세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미 일가를 이루신 분이 아닌가. 강룡결(降龍訣)을 익히셨으니 신체의 강건함이 범부와는 전혀…….”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혀도 노화는 어쩔 수 없더라고요.”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군사님도 아시겠지만, 정보를 다루다 보면 정말이지 매일같이 목숨이 쭉쭉 빠지는 게 느껴집니다. 하물며 사부는 역대 방주 중 손에 꼽힐 만큼 방 내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신 분이라, 이것저것 고려할 것도 많으셨을 겁니다.”
“으음.”
“본인도 만족하시더군요. 충분히 잘 살아왔다고. 떠날 때 떠나는 거라 아무 미련도 없고 오히려 상쾌하다고 하셨습니다.”
제갈문호가 탄식을 토해 냈다.
용두방주 화진천은 그의 말마따나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강호를 살아온 무림의 어른이었다.
그 정도로 열심히 살아왔으니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말도 수긍이 간다. 자신이라면 달랐겠지만, 화진천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래도 도리가 아니지. 한번 찾아는 뵈어야겠네.”
“그거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것까지 막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래.”
용두방주에 관해 얘기하니 초장부터 분위기가 무척이나 뒤숭숭하다.
가득상이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언제 출발한답니까?”
“빙궁 쪽 말인가?”
“그렇지요.”
“빠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새벽에는 떠날 걸세.”
“음, 그렇군요.”
“왜? 따로 전할 사항이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다만…….”
가득상이 품에서 깨끗하게 접힌 서신을 꺼냈다.
“이것부터 보십시오.”
“이게 뭔가?”
제갈문호가 서신을 펼쳐 읽었다.
잠시 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그렇습니다.”
가득상이 피식 웃었다.
“정말 빠르지요? 아무리 사전에 준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벌써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서신에는 묵룡부가 흑제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흑도 연맹을 천명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제갈문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 소부주, 아니 이제는 연 성주라고 해야겠군. 예전부터 추진력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빠를 줄이야.”
“아무래도 하루빨리 끝장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요.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조직의 변화는 빠르고 분명할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어떻게, 자네도 성주 얼굴 본 지 한참 되었을 터인데 한번 다녀오지 그러나?”
“그럴까 생각 중입니다. 뭐, 군사님처럼 서신으로 연락 정도는 하니까 당장 갈 필요는 없어요.”
“그렇구먼.”
“아, 그리고 빙궁 건에 대해서는 흑제성도 알아차렸답니다.”
“벌써?”
흑제성은 무림맹보다 꽤 남쪽에 있었다. 북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먼저 알아채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시잖습니까? 흑도의 정보력. 사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개방 이상입니다. 워낙 생존에 특화된 인간들이라.”
“그건 알고 있지만…… 놀랍군. 그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는데.”
“전 부주, 아니 태상이라고 해야겠지요. 양 태상이 오래전부터 정보력을 키우는 데에 많은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벌어들이는 자금 대부분을 쏟아부은 게 그대로 성주에게 전해진 것이지요.”
“대단하군.”
“그때부터 직감했던 모양입니다. 후계에게 부주 자리를 이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력이라는 걸 말입니다.”
“어쨌거나 흑제성도 빙궁 건에 대해 알았다면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려 들었을 것인데.”
“그래서 벌써 사람을 보냈답니다.”
“누구 말인가?”
“흑제성 오대신장(五大神將)의 하나, 검마(劍魔) 강량입니다.”
검마 강량.
흑제성을 대표하는 다섯 고수에 대한 소문은 한 달 전부터 돌고 있었다.
그중 강량에 대한 소문이 유독 빨리 돌았는데, 그가 멸문한 흑도제일검문의 후계자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배신이 판을 치는 동네라지만, 멸문지화를 이끈 조직으로 후계자가 들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당연히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악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악소문이 보름 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흑도제일검문의 후계자라고는 해도 강량은 너무 젊었다. 그런 사람이 흑도 연맹의 대표 고수라고 하니, 다혈질에 호승심 넘치는 흑도의 고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강량에게 도전을 청했다.
강량은 열일곱 개의 도전을 하루 만에 전부 해치웠다.
강량의 검에 열일곱 고수가 모조리 고혼이 되었으며, 그들 중 가장 강한 고수가 강량의 삼 검(三劍)에 무너지고 사 검째에 목이 달아났다.
즉, 흑도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과의 생사결에서 칼질 네 번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승부를 본 무수히 많은 이들이 경악하며 강량을 두려워했다. 흑백무제 연호정이야 워낙 규격 외의 인물이니 그렇다 쳐도, 그보다 어린 강량의 실력이 대문파 장문인 수준을 넘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강량의 별호는 검마가 되었다. 그 별호가 백도 정파가 아닌 흑도 사파에서 먼저 오르내렸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흐음.”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검마가 부대를 이끌고 움직이고 있다…… 이왕이면 같이 발을 맞추는 게 나을 텐데.”
“중간에서 연락을 주고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게 낫겠네.”
“그나저나 정말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북해빙궁에서 사람을 보냈다…….”
가득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영 껄끄러운데요.”
“나도 그렇다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화산과 종남에서도 나선다 하니, 설령 싸움이 벌어져도 큰일은 없을 걸세. 다만 그들이 정말 삼교와 손을 잡았다면 성동격서의 계책을 쓸 수도 있으니 개방의 정보력을 황궁과 동해 쪽으로 집중시켜 주게나.”
“물론입니다.”
* * *
히히힝!
투레질하는 말의 입에서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대룡단주가 물었다.
“어째서 멈추십니까?”
모용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이 오고 있네.”
“예?”
그때였다.
두두두.
땅에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대지를 박차는 말발굽 소리. 대룡단주가 놀라서 남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
대룡단주의 눈이 흔들렸다.
서산으로 지는 붉은 햇빛을 받으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그중 선두에 서서 말을 모는 이에게서 말 못 할 기세가 느껴졌다.
‘어둡다.’
마치 거대한 그림자를 모포처럼 두른 귀신이 함께 달려오는 듯하다.
어둡고 섬뜩하지만, 그 와중에도 강렬한 생기를 지닌 고수였다. 천하의 신검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드리우면서도 묘하게 패도적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워, 워.”
서서히 말을 멈춘 강량이 웃으며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오.”
“예전처럼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럴 수는 없소. 게다가 이건 공무이니 더욱 예를 차려야 마땅하오.”
“하하, 여전하십니다.”
“강 신장도 마찬가지구려.”
“성격은 그대로지만 무공은 또 다르군요. 멀리서부터 느꼈는데, 그 잠깐 사이에 몰라보게 발전하셨습니다.”
모용우가 마주 웃었다.
“나야 좋은 무공을 익혀서 그렇지만, 강 신장도 나 못지않게 발전했구려. 이제는 생사결을 벌인다 해도 이길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질 않소.”
“그 무슨 약한 말씀을. 소맹주의 벼락같은 검이 단숨에 제 심장에 박히는 그림이 바로 보이는데요.”
“하하, 과찬이시오.”
모용우가 강량의 뒤를 바라보았다.
강량의 뒤에는 하나같이 광기 어린 눈빛을 지닌 삼백의 고수들이 있었다.
“묵룡부, 아니 흑제성의 도룡단(屠龍團)이구려.”
“그렇습니다.”
흑도 연맹 최강의 부대는 용아철기단이었지만, 철기단과 함께 명성을 떨치는 세 개의 부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도룡단이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적을 난도질하기로 악명 높은 광기의 부대였다.
“시간이 없으니 일단 출발합시다.”
“그러시지요.”
그렇게 무림맹과 흑제성의 부대가 도열한 채 달렸다.
시끄럽고 자세도 편안치 않지만, 모용우와 강량은 서로 대화를 함에 있어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성주는 어떻소? 잘 지내고 있소?”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그래도 워낙 아랫사람들을 잘 다뤄서 이제는 알아서 잘 굴러가고 있지요.”
“좀 쉬엄쉬엄하면 좋으련만.”
“그 양반, 쉬는 걸 더 어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요새는 잠을 푹 잡니다. 얼추 세 시진 이상은 자는 것 같아요.”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로군. 고수라도 잠을 못 자면 몸을 망치기 마련이거늘, 편히 잔다니 다행이오.”
“그쪽 분들은 다 잘 지내십니까?”
“물론이오.”
“하긴, 제갈 군사께서 맹원들 휘어잡는 맛에 하루하루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하하.”
농담 몇 마디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든 강량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시점에 빙궁이 어인 일로 왔을까요?”
“맹 측에서도 확신은 하지 못하고 있소. 들어온 위치나 진군 속도를 보면 싸움을 거는 건 아닌 듯한데.”
“저희 쪽에서도 싸움이나 계략보다는 동맹일 확률이 조금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소한 당장 싸우자고 오는 길은 아닐 거요. 빙궁의 명성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화산과 종남이 버티고 선 곳에서 싸움을 벌일 만큼 무모하지는 않을 테니까.”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일단…… 만나 봐야 알겠지요.”
그렇게 흑백을 대표하는 조직은 며칠 만에 섬서 소화산 인근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소화산 인근에 진을 친 백색 일색(一色)의 고수들.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에게서 유독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졌다.
인간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자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비인간적인 막강함.
모용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극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