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2)
1052화. 얼음의 마왕 (2)
모용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화산과 종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저 멀리 우측에 작게 보이는 깃발엔 화산파를 상징하는 매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좌측, 화산파의 검수들이 있는 곳보다 더 가까운 산악 지형에서는 종남파의 검수들이 수많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어쩔 수 없겠지.’
느닷없이 북해빙궁에서 무사들을 파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불과 얼마 전, 사음교의 병력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섬서였다. 특히나 그 전투는 종남대전(終南大戰)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살벌한 전투였다.
각지에서 온 지원군과 종남 고수들의 독기로 버텨 이뤄 낸 승리였지만, 피해는 막심했다.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려갈까요.”
강량이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화산과 종남이 나서지 않는 것도 무림맹에서 사람이 올 걸 알았기 때문일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가도 될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같소.”
모용우가 대룡단주에게 말했다.
“부대원 넷을 둘로 쪼개 화산과 종남의 문도들에게 보내게. 기다려 줘서 고맙고 우리 쪽에서 먼저 해결을 본 연후에 부르겠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름의 조치를 취한 모용우와 강량이 부대를 이끌고 산맥을 타 내려갔다.
얼마나 다가갔을까.
‘차갑다.’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차갑고 깊어. 거대한 얼음산이 둥둥 떠다니는 바닷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 같다.’
굳이 자신의 기도를 감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려하게 뽐내는 것도 아닌데, 백여 장이 넘는 거리에서도 빙궁의 무극수가 풍기는 존재감이 뼈를 시리게 했다.
히히힝!
오십 장 거리에서 부대를 멈춘 모용우와 강량은 따로 이십 장 거리 앞까지 말을 몰았다.
훅.
멀리서는 독한 한기를 느꼈는데, 막상 가까워지니 오히려 운신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모용우가 외쳤다.
“우리는 백도 정파 연합 무림맹, 흑도 사파 연합 흑제성에서 온 이들이오. 그대들의 정체를 밝히시오.”
이미 빙궁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들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만 했다.
그때,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모용우의 눈이 깊어지고 강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걸어 나온 사람은 모용우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장년의 사내였다.
하지만 그 사내가 장년이라는 것은 기도의 완숙함으로 예측한 것일 뿐이었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보면 이십 대 청년이라 해도 아무 위화감이 없었다.
허리까지 기른 하얀 머리카락, 심지어 눈썹조차도 하얗다. 피부 역시 서역인의 그것처럼 희며, 실제로 오관이 서역인과 닮았다.
강량은 기천웅과 기우희를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서역인의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저들과는 달랐다.
기천웅과 기우희가 더 오관이 뚜렷하고 광대와 턱이 약간 더 도드라진 편이었다. 두 사람 모두 희대의 미남 미녀임은 분명했지만, 확연히 중원인과 다른 용모를 하고 있었다.
반면 빙궁 대표로 나온 장년의 사내는 중원인보다 서역인에 가까운 외모를 하고 있으되, 눈두덩이나 턱은 중원인에 조금 더 가까웠다.
‘혼혈?’
단순히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 뒤에 도열한 빙궁인들의 얼굴도 어째 비슷한 특성을 지닌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강하다.’
저 장년 사내의 무력은, 놀랍게도 모용우와 큰 차이가 없었다.
‘세상에 천재는 많다지만, 어떻게 보는 사람마다 다 이러는지 모르겠군. 강호가 미쳐 돌아가는구만.’
강량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때, 빙궁 측의 장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북해의 얼음 궁전에서 온 사람들이다.”
강량은 저도 모르게 혓바닥도 얼어서 말투가 그 모양이냐고 물을 뻔했다.
“나는 궁전의 작은 주인이다. 너희는?”
모용우가 담담하게 답했다.
“백도 정파 연합의 소맹주 모용우요.”
강량은 대놓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흑제성의 강량이다.”
강량의 태도가 제법 발칙했지만, 장년 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웅백(毛雄白)이다.”
이름만 짤막하게 말하고 만다.
어색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모용우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반갑소. 새외의 신비 문파이자 제일가는 강자라는 빙궁의 무사들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장년 사내, 모웅백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초면에 과한 호의를 보이는 자, 믿어서 좋을 것 없다고 하였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오.”
“그대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내 입장에선 당연한 예의일 뿐이오.”
“이상한 사람들이군.”
강량이 말했다.
“초면부터 예의 밥 말아 먹는 놈들과도 엮이지 말라고 했지.”
모용우가 움찔했다.
“강 신장.”
“그대들에겐 그대들 나름의 문화가 있는지 모르겠다만, 이쪽 동네까지 기어들어 왔으면 그에 맞는 예의를 차려라.”
모용우가 가늘어진 눈으로 모웅백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모웅백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감정의 동요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대들의 예의를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덮어놓고 이해해 달라는 건가?”
“…….”
“하나 알려 주지. 최소한 그대의 언사가 우리에게 좋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알아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기분이 불쾌하기도 했지만, 강량이 이렇게 나가는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싸우자고 온 놈들이라면 굳이 기분을 맞춰 줄 필요가 없을 것이고, 목적이 있어 온 놈들이라면 당연히 중원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왔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이야기가 쉬워지며, 후자라도 결국 저쪽이 바뀌어야 할 일이었다. 강량이 당당할 수 있는 이유였다.
모웅백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했고, 조소를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표정이든 남자인데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럼 우리가 어찌해야 하나?”
“그런 것까지 강의해 줄 의리는 없다. 알아서 배우든 말든 그대들 문제다. 말 몇 마디에 칼 뽑을 일은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눠서 기분 나쁘다고 나중에 찡찡대지만 마라.”
화끈하다면 화끈한 대응이었다.
어쩐 일인지, 모웅백은 그런 강량의 언행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아주 미세하지만, 강량에 대한 호의마저 엿보이는 듯했다.
“그대의 말은 옳다. 나름의 준비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급하게 나선 길이었다. 이쪽에도 사정이 있었음을 이해하길 바란다.”
“아주 강요를 하고 있구먼. 알겠다. 그것까지는 이해하도록 하지. 해서, 그대들이 이곳으로 온 목적은 무엇인가?”
모웅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그때였다.
훅!
한 줄기 세찬 한풍이 불어닥쳤다.
제아무리 강심장인 강량이라도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는 기세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용우는 물론 그들 뒤에 도열해 있는 도룡단과 대룡단까지도 긴장케 만드는 기도였다.
모웅백이 뒤를 돌아보았다.
“우궁주(右宮主).”
심해의 무거움을 그대로 담은 목소리.
모웅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말해.”
그의 대답에 모용우는 물론 강량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말해라니? 아무리 봐도 저보다 높은 사람이 분명한데 저렇게 싸가지 없이 대답해도 되는 건가?
두 사람이 놀라는 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극수가 말했다.
“서로 목적이 있어서 만난 자리다. 우리도 저들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한낱 대화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을 터.”
“…….”
“전사의 마음은 전사밖에 모르는 것이다. 몇 번의 달을 보내고도 아무도 오지 않아 실망했거늘, 이제야 괜찮은 전사가 나타났다.”
“알겠다.”
모웅백이 다시 모용우와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대체 뭔 말이야?”
“우리 궁주(宮主)는 대화가 길어지길 원치 않는다.”
“우리라고 그러고 싶겠냐?”
“짧은 대화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면 그뿐이다.”
“그러니까 그러자고 하잖아, 지금.”
“둘 중 누가 하겠나?”
“지금까지 내 목소리 안 들렸니?”
“그대인가?”
“이건 뭐 발성까지 써야 하나 싶네. 오냐, 나는 나다.”
“뭔지 모르겠지만, 좋다. 내려오라.”
“……엥?”
두 사람의 정신 나간 대화를 듣던 모용우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강 신장.”
“예?”
“저 사람들은 무공을 겨루며 상대의 진심을 확인해 보자고 하는 거요.”
“그게 뭔 소립니까? 분명 대화를 하자고…….”
“…….”
“그게 그거였습니까?”
“그렇소.”
“저치들 진짜 말 한번 더럽게 하네요.”
“괜찮겠소?”
“파벌은 달라도 맹의 후계자가 나서면 되겠습니까. 딱 제 위치 정도가 그림이 맞을 겁니다.”
모용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하시오.”
강량이 웃으며 말에서 내렸다.
“차라리 잘됐지요. 소문 자자한 빙궁의 무공을 맛볼 수 있게 되었잖습니까.”
모용우가 강량의 말을 몰아 부대가 도열한 곳까지 갔다.
순식간에 양 진영의 대표들이 비무를 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번개 같은 진행이었다.
“서로의 진심을 알자고?”
강량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검을 툭툭 건드렸다.
“칼 부딪친다고 생각까지 읽을 수 있다면 세상에 비밀도 없을 것이다. 진심으로 붙어서 알 수 있는 건 서로가 지닌 호의나 악의를 구분하는 정도다.”
“우리는 적으로서 오지 않았지만, 그대들도 명확한 확인이 필요할 것이다.”
“그걸 굳이 싸워서 확인할 필요는 없어.”
“대단한 전사로 보이는데, 설마 겁이 나는가?”
이 새끼가?
강량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우리는 너희와 달리 쓸데없이 칼을 뽑지는 않거든. 하지만…….”
스르릉.
어두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한 기운이 담긴 검이었다. 사악하다거나 흉악하다는 등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수많은 적을 마주하며 격파한 그의 철검은 이제 귀검(鬼劍)으로 변해 있었다. 그 자신이 지닌 내공과 살기, 적의 원혼으로 제련된 검이었다.
모웅백 역시 강량의 검을 보고는 꽤 놀란 기색이었다. 평범한 검에 귀기가 서려 마검화(魔劍化)가 되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한번 뽑으면 끝장을 본다. 각오는 해 둬.”
흔치 않은 검에, 피워 올린 기세 또한 진짜들만 보여 줄 수 있는 묵직함으로 가득했다.
모웅백의 얼굴에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
“전사들의 싸움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지.”
모웅백이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어디선가 칼 한 자루가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검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직도(直刀)라고 볼 수 있는데, 여느 직도보다 칼날 면의 너비가 조금 더 넓었다.
손잡이는 질 좋은 흑색 가죽으로 묶여 있으며, 손잡이 끝에는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었다. 환도(還刀) 계열의 직도였다.
스르릉.
직도가 뽑혀 나왔다.
놀랍게도 칼날이 반투명했다. 명확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달리 보면 칼날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형의 병기였다.
강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미있는 한판이 되겠어.”
“기대하겠다.”
“혹시 몰라 묻는데, 너희 쪽 싸움은 뭐 봐주고 그런 거 없냐?”
“칼을 뽑았으면 피는 봐야 한다.”
“그건 참 마음에 드는구먼. 나중에 고향 규칙 따로 있다는 변명 같은 건 하지 말자고.”
“말이 길군. 시작해도 되겠나?”
“……진짜 밥맛이구만.”
화아아아아악!
강량의 귀왕진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번쩍!
벼락처럼 달려든 강량이 호쾌한 일검을 내지르고, 거의 동시에 움직인 모웅백의 직도가 반월을 그렸다.
쩌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