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3)
1053화. 얼음의 마왕 (3)
모용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작됐군.’
도검이 부딪치며 공기 터지는 소리가 팔방으로 치달았다.
강렬한 공명음이 압권이었다. 두 사람이 부딪친 지점의 땅바닥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첫 일격부터 진심으로 휘둘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쐐애애액!
모웅백의 직도가 화살처럼 날아왔다.
그만한 충격을 받았는데도 곧장 상쇄한 후 공격한다. 상쇄와 후속 공격 사이의 시간 차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대단한 내구도, 굉장한 탄력이었다. 내공력 이전에 신체가 놀랍도록 단련된 무인이었다.
강량의 철검이 반월을 그렸다.
치링!
두터운 직도를 후려쳐 밀어 내는 검술.
직도의 투로가 흔들리고, 채찍처럼 유연하게 휘어지는 철검이 곧장 모웅백의 목젖을 향해 나아갔다.
빠르진 않지만 극도로 유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모웅백은 재빠르게 상체를 뉘여 목이 베이는 걸 피했지만, 뒤이어 하단을 노리는 철검 참격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모용우의 눈이 번쩍였다.
‘대단하다.’
이제 막 싸우기 시작한 두 사람.
하지만 둘 중 더 놀라운 기예를 보여 준 사람은 강량이었다.
‘패도적인 검법의 소유자가 저리 자연스러운 유검(柔劍)을 구사할 수 있다니.’
강한 힘을 실어서 내치지 않아도 충분히 상대를 위협할 수 있다.
경지가 높고 내공 조절이 원활한 고수들은 평범한 일격으로도 바위를 부술 수 있다.
강량은 그러한 호쾌함과 파괴적인 면모를 접었다. 초전이지만 순수한 검술로 모웅백을 상대하는데, 그 기술이 어찌나 대단한지 모웅백 정도의 실력자도 쉽사리 반격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정한 틀에 얽매인 검법이 아니야. 진신무공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저 정도 위력…… 도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저리 발전할 수 있었을까.’
쉬이이익!
강량의 철검이 서너 개로 나뉘며 뱀처럼 휘어졌다.
살벌한 귀기가 가득한 철검이 채찍처럼 꿈틀거리며 모웅백의 어깨, 명치, 허벅지를 노렸다.
이 또한 격식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에 어울리는, 자신의 힘으로 구현 가능한 최선의 수를 구사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절정의 무공처럼 보였다.
치리리링!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강량에 이어, 몇 번이나 물러나던 모웅백 역시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쩌저저정!
강량의 검이 뱀처럼 유연하다면, 모웅백의 이번 칼질은 빛살처럼 빠르고 탄력이 넘쳤다.
힘의 승부를 유도하다가 한 방 먹었다.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줄 차례인 것이다.
피슉!
갑작스레 치고 나오는 모웅백.
강량의 철검이 모웅백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얕지도, 깊지도 않은 상처. 하지만 그 안에 실린 내공은 강력한 침투력을 자랑했다. 거죽만 스친 거라면 모르되, 그보다 깊은 검상이라면 귀왕진기의 침투경으로 인해 모웅백의 왼팔은 한동안 움직이기도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웅백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진 직도를 짧게 끊어 칠 뿐.
치링! 터엉!
강량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도검이 부딪치는 순간 이미 후방으로 물러날 준비를 마쳤다. 충격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 봐라.’
물러난 강량은 오른팔 전체에 은근한 통증을 느꼈다.
‘흘려 내지 않았다면 큰일 났겠어.’
진신절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들 언제나 만전의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그였다.
그런 그에게 이 정도 충격을 안겨 주었으니, 모웅백의 무공 역시 강량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봐야 했다.
“강하군.”
쉬이이익!
물러난 강량을 향해 돌진하며 직도를 휘두른다.
순간 새하얀 한기가 연기처럼 휘몰아치며 주변 공기를 얼리기 시작했다.
“정말 강하구나, 대륙의 검사.”
내리치는 직도가 백색의 반월을 만들었다.
쩌저저저정!
일격이지만, 받은 충격만 보면 네다섯 번의 연환기를 방어한 것 같았다.
강량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일순간 귀왕진기를 폭발적으로 운용해 막았지만,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압력이 강했다.
“백월탄(白月彈)과 맞서고도 멀쩡했던 자는 많지 않아. 강건한 몸이다.”
“시끄러워!”
번쩍!
벼락처럼 움직인 강량의 철검이 모웅백의 옷깃을 베었다.
자연스럽고 유연한 검술을 구사하다가 일순간 폭발적인 속도를 구현했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놀랄 수밖에 없다. 이토록 다른 유형의 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수는, 당장 성천을 뒤져도 흔치 않을 것이다.
“퉤! 저릿저릿하구만.”
바닥에 침을 뱉는 강량의 모습에선 품위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모웅백은 그를 나무라지도, 우습게 보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주시할 뿐.
실제로 파락호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강량에겐 일말의 빈틈도 없었다.
“몇 합 나눠 보지도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가만히 강량을 바라보던 모웅백이 자세를 풀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강량이 모웅백에게 검을 겨누었다.
휘이이이이잉!
자연스럽게 일어난 귀왕진기. 폭발적으로 운용하지 않아도 온몸으로 스며드는 내공이 강량의 기세를 뿌리부터 바꾸었다.
모웅백의 표정이 돌변했다.
강량의 등 뒤에서부터 번져 나오는 시커먼 어둠은 북해의 한풍보다 차가웠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보다 깊은 공포를 자아냈다.
펄럭!
강량의 등 좌우로 퍼진 흑색의 기운은 마치 거대한 박쥐의 날개를 보는 듯했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겠지?”
“…….”
“왜? 무섭나?”
강량의 웃음기 어린 말에 모웅백의 얼굴에도 미소가 드리워졌다.
평소 워낙 표정이 딱딱해서인지 미소가 묘하게 어색했다. 그런 면이 오히려 그의 진심을 잘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운이 좋군. 우수한 전사를 만났어.”
“동의한 걸로 알겠다.”
훅!
강량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합의된 순간, 상대에게 힘을 모을 시간 따위는 주지 않는다.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뿐이었다.
모웅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로?!’
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는 강량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는 사실을 직감함과 동시에 한빙호극공(漢氷皓克功)을 극성으로 전개, 빙궁의 절기인 빙파참경(氷波斬勁)을 구사했다.
화아아아악!
반투명한 백색 기운이 구름처럼 모여들며 그의 직도를 에워쌌다.
그것만으로도 장관이었지만, 이후 직도를 에워싼 백색의 기운이 청백색 조각으로 나뉘며 빛의 산란을 일으켰다.
설명까지는 길었지만, 벼락같은 움직임에 질풍처럼 빠른 진기 운용이었다.
빙파참경의 도법이 허공으로 올라가고, 허공에 뜬 강량의 검은 진양과의 수련으로 완성된 귀화마검식(鬼火魔劍式)을 전개했다.
모웅백의 눈이 흔들렸다.
‘낫?’
적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한 자루 거무튀튀한 철검에서 뽑힌 흑회색 검기가 마치 낫처럼 휘어져 보였다. 한데 그 크기가 집채만 했다.
거대한 겸형(鎌形)의 검기가 휘어져 내려온다. 속도가 이전보다 더 빨랐으며, 검기에 실린 경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대지를 디딘 모웅백의 발에 더 강한 힘이 실렸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검기, 대지에서 치솟아 올라가는 도기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쾅!
화려한 굉음과 함께 반경 오 장을 아우르는 충격파가 대지에 실금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호쾌하고 강렬하기 그지없는 힘의 싸움이었다. 모웅백은 비틀거리며 일 장을 넘게 물러났고 허공에 뜬 강량은 충격파에 휩쓸려 날아가다가 겨우 착지했다.
그때였다.
파라라라락!
부딪혀 깨진 경력이 흑회색으로 물들며 소름 끼치는 검기 다발을 만들어 냈다.
조각조각 흩어진 검기 다발이 강량의 몸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내 수백 개의 조각이 하나씩 합쳐지며 세 줄기 검기를 형성했는데, 놀랍게도 그 검기는 강량의 몸을 호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웅백의 눈이 흔들렸다.
‘이것이 대륙의 무공?’
화아아악!
삼검기(三劍氣)의 호위를 받는 강량의 기세가 이전보다 더 강렬해졌다.
충격을 받았는데도 기세는 갈수록 불타오른다. 기세만 보면 충격은커녕 아직 제힘을 제대로 써 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파아아앙!
이전과 같이 은밀하고 쾌속한 보법이 아니었다.
마치 네 발 달린 맹수가 달리는 듯 낮은 자세로 돌진하는 강량의 두 눈은 동공까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위험!’
양손으로 직도를 쥔 모웅백이 힘차게 일도를 휘둘렀다.
강량의 기세가 살벌했지만 모웅백이라고 뒤지진 않았다. 지닌 모든 내공을 폭발시켜 또 한 번 일도를 휘두르는데, 빙파참경의 도법과 살을 찢는 얼음 조각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강량을 노렸다.
강량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하얀 치아가 다 드러날 만큼 큰 웃음이었다. 흰자위까지 검게 물든 사이한 귀안(鬼眼)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입가의 조화가 지극히 섬뜩하다.
강량이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이전보다 더 거대해진 낫 모양의 흑회색 검기가 얼음 조각의 호위를 받는 빙파참경의 도기를 휩쓸었다.
콰르릉!
안 그래도 작은 얼음 조각들이 완전히 분쇄되어 흩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격은 모웅백의 내부에도 큰 충격을 전달했다. 직도를 쥔 손에 피가 흐르고, 빗장뼈를 스치고 간 검기가 새하얀 의복을 붉게 물들였다.
치이이익!
강량이라고 멀쩡하진 않았다.
그의 몸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이는 부위에는 서리가 꼈고, 왼팔 상박에는 제법 깊은 도상이 새겨졌다.
그래도 핏물은 없었다. 상처가 나자마자 한기로 인해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모웅백이 눈을 부릅뜰 때.
“으아압!”
파바바박!
강한 기합과 함께 강량의 몸에 형성된 서리가 모조리 폭발하며 사라졌다.
모웅백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내공력!’
빙궁의 최고급 신공에 맞으면 날카로운 한기가 파고들어 움직임이 느려진다. 몸 곳곳에 피어나는 얼음꽃은 내상을 유발하고 독한 동상을 만들어 낸다.
대륙에서 말하는 암경(暗勁)과 유사하면서도 더 치명적인 술수라고 할 것이다. 한데도 강량은 진기를 폭발시켜 그 모든 기운을 날려 버린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아아아악!
부서진 검기가 모여들며 육검기(六劍氣)를 형성했다.
한기를 머금은 육검의 호위를 받는 강량의 기세는 조금 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변화. 싸우면 싸울수록 거대해지는 마물과 상대하는 것 같았다.
강량이 씨익 웃었다.
내상으로 창백해진 안색이 상대로 하여금 더 깊은 두려움을 자아내게 했다.
“자, 또 준비해라!”
그때였다.
콰앙!
강량과 모웅백 사이에 강력한 폭발이 일었다.
“……?!”
돌진하려는 강량, 방어 태세를 취하던 모웅백 둘 모두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충분하다.”
낮고, 또 굵다는 느낌도 있지만 사내의 음성은 아니었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난 사람은 키가 큰 여인이었다. 모웅백처럼 머리카락과 눈썹이 하얀 여인은 오히려 모웅백보다도 더 젊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는 무극수의 그것이라.
달아오르기 시작한 강량의 기세도, 얼음처럼 차가웠던 모웅백의 기세도 숨을 죽이고야 말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서로의 진심을 깨달았으리라 본다.”
말투가 엄청나게 딱딱했다.
새하얀 의복을 가로지르는 붉은 겉옷은 마치 승려의 가사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단순해 보였다.
강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멀리서 볼 때는 사내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눈이 번쩍 뜨이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빙궁주?”
“그렇다.”
여인, 모자선(毛紫璇)이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내가 당대 빙궁의 주인 모자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