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4)
1054화. 얼음의 마왕 (4)
“그렇군.”
소정광의 말을 들은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빙궁의 의도를 알기는 힘들되, 신화교와 유의미한 관계가 있을 확률이 꽤 높다는 뜻이로군.”
“그런 셈이지요.”
묵비가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기천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날 그렇게 보나?”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물어보게나.”
“다소 민감한 질문일 수 있다는 점, 참고해 주십시오.”
“내가 이곳 중원에 들어온 것 자체가 불가해한 일이었지, 자네들에게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되네.”
“그럼 부담 없이 여쭙겠습니다. 현재 신화교의 소교주, 즉 교주님의 자제분은 사음교주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만, 단독으로 우발적인 행동을 감행할 수조차 없는 상태입니까?”
확실히 부담스러운 질문이긴 했다. 소정광조차 기천웅의 눈치를 볼 정도로.
하지만 뜻밖에도 기천웅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말이 꼭두각시일 뿐, 그래도 신화의 무맥을 이었는데 정말 시키는 대로만 하겠는가. 게다가 내 아들이지만, 나와는 성격이 전혀 달라. 물론 나라도 시키는 대로는 안 하겠지만.”
“다르다면 어떤 부분이?”
“어릴 때부터 유독 다혈질이었지. 심중에 화기(火氣)가 과했어. 뭐, 그 덕분에 열양공을 연마하는 데에 큰 재능을 보이기도 했고 경지에 오른 이후로는 많이 차분해졌지만 폭발할 때는 여지가 없었지.”
“지금도 그렇다는 뜻입니까?”
“맞네. 지금도 그래.”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아무리 덤덤해졌다고는 하지만, 폐관에서 나온 직후 아들과 싸웠던 그 순간을 기억하면 차분해지기 어렵다.
“솔직히, 애비로서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자식들에게 좋은 부모인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래서 자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서운함을 느끼는지는 잘 모른다네.”
“…….”
“다만 그 녀석에 대해서는 조금 알아. 야망이 크고 우월감에 도취되어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경향도 강했지만, 적어도 제 사람을 챙길 줄은 아는 녀석이라네.”
“마치 모용가주 같군요.”
“음?”
“변하기 전의 모용가주가 그랬습니다. 제 사람에게는 잘해 줬지만, 또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칼 같이 쳐 내기도 했지요. 워낙 똑똑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 그런 면이 강하지. 대신…….”
기천웅이 입맛을 다셨다.
“무공의 재능만큼은 역대를 논할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네만, 똑똑하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다고 보긴 힘들었어. 물론 못난 건 아니네만, 걸출한 이들과 비교하면 지극히 평범하다고 볼 수 있었지.”
“두뇌는 뛰어나지 않되 다혈질적인 면모가 있고 무공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으니 자부심도 대단할 터, 때에 따라 우발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군요.”
“그래도 한 조직의 우두머리 행세는 하는지라 머리를 안 쓰진 않을 걸세. 실제로 내가 폐관에 들어가기 전 이런저런 업무를 많이 처리하기도 했으니 실무 경험도 없진 않아.”
“애매하군요.”
그렇다. 애매하다.
말로만 들으면 그게 누구라도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생사의 첨예함 속에서 살아가는 무인들의 감은 워낙 날카로워서, 경험만 풍부하다면 인물의 대략적인 성격만 듣고도 행동 양식을 그려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무공 하나를 제외하면 전부 그럭저럭 평범한 사람의 경우는 예측 자체가 불가능했다.
무공을 제외하면 빈말로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할 수 없어 보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일탈을 할 가능성이 크다.
언제나 뛰어난 사람들만 봐 왔던 묵비의 입장에서는 참 해석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데 그것은 왜 묻는 것인가?”
묵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빙궁, 아니 빙륜교의 교도들이 남하할 때 신화교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는 없습니다. 그것은 상식입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건드렸든 그러지 않았든, 최소한 빙륜교도들의 이동을 모를 리는 없었겠지.”
“그렇다면 그들을 그냥 보내 주었느냐, 아니면 손을 잡았느냐의 고민을 해야 할 텐데, 조금 전 들은 말로는 도저히 손을 잡았다고 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렇지.”
“한데 그렇게 폐쇄적인 사람들이 굳이 중원까지 넘어왔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식으로 고민해도 답을 내리기 힘든 문제로군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네. 어느 쪽의 가능성이 더 큰가를 따질 순 있어도 의도를 예측하긴 힘들지.”
“사실상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 뒤이어 고민하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음?”
묵비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이 어렸다.
“신화교가 긴장해야 할 정도로 강한 문파였다면 무극수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
“지역이 다르면 발달한 무공도 다른 법이야. 하지만 모든 무공은 경지에 이르면 다 비슷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게 되지. 빙륜교의 역사는 천 년을 헤아린다네. 천화경에 달한 고수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몰라.”
“많지는 않을 겁니다.”
“왜 그리 생각하나?”
“무공의 발전은 곧 기술의 발전이고, 그것은 곧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본 바로는, 어떤 공부든 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사회와의 접점과 교류가 필수입니다.”
“……그렇지.”
“물론 희대의 천재가 태어나 기존의 틀을 바꾸고 혁명적인 깨달음을 전해 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한 대에 한 명 태어나기도 힘듭니다. 빙륜교가 그렇게 폐쇄적인 집단이었다면, 천 년의 역사를 감안해도 무극수가 많지는 않을 겁니다.”
기천웅이 감탄 어린 눈으로 묵비를 바라보았다.
“자네, 꽤 하는구먼?”
자신도 그렇지만, 똑똑한 소정광 역시 본인이 모르는 조직이나 분야에 대해서는 예측 자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묵비는 달랐다. 오히려 모르는 게 많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경험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확장시켜 대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언제나 최선의 수를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이다.
소정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누님 말대로라면…….”
“음?”
“누님 말대로 무극수가 극히 소수라면, 아니 당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
“그쪽에서 무극수를 보냈느냐, 보내지 않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의도를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기천웅이 의아해할 때, 묵비가 손뼉을 쳤다.
“빙궁이 절대고수를 극소수만 보유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무극수 정도의 고수가 함께 왔다면…….”
“어떤 의도인지는 몰라도, 우리 쪽에서 상대방의 의중을 떠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묵비가 기천웅에게 물었다.
“제 경지가 일천하여 잘 모르겠지만, 무극에 이른 자들은 하나같이 방대한 상단전을 다스리기 때문에 기감이 폭발적으로 예민해져, 경우에 따라 상대의 의중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초능(超能)을 보이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네. 물론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겠지. 서로 공명도 되어야 하고. 하지만…….”
기천웅이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래, 가능성이 있네. 나 역시 상단전이 피폐해진 이후로 타인의 욕구를 읽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생겼으니까.”
묵비가 소정광에게 물었다.
“현재 섬서에 가장 가까운 무극수는 누가 있지?”
“아무래도 무림맹 측 인사들이겠지요. 그곳에는 권왕과 도검의 제왕이 있으니까요.”
“현재 막 선배님의 위치는 파악이 되나?”
“얼마 전 천효락 공자와 함께 감숙으로 들어왔다는 첩보는 받았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입니다.”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당장 운용 가능한 무극수가 있다고 해도 문제일세. 말이 무극수지, 그들 역시 골육을 지닌 사람들이야. 신들린 무공으로 달린다 해도 섬서까지 도달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것일세.”
“결국, 그저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그런 셈이지.”
기천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충분한 대응력을 지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젊은 검사를 보낸 것 아닌가? 나 역시 많은 고수를 봐 왔지만, 그만큼 잘 연마된 검사는 몇 본 적이 없었어. 보아하니 판단력도 유연한 것 같던데.”
“예. 그래서 보내긴 했습니다만.”
“걱정되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무릇 수장이라 함은 아랫사람을 부릴 때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되는 것이야. 믿고 보냈으니 지금은 지켜보는 것만이 답일세.”
묵비가 쓰게 웃었다.
“아랫사람조차도 아닙니다.”
“뭐가 되었든.”
기천웅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성주는 어디 있나? 사람들이 이토록 바쁘게 뛰어다니는데 말이야. 남들 일할 때 혼자 놀 만한 성격도 아니고.”
“아, 성주님이요.”
소정광이 머리를 긁적였다.
“성주님은 성주님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 * *
스르륵.
말에서 내린 모용우가 어느새 강량의 옆에 나타났다.
모자선의 눈이 반짝였다.
“훌륭한 움직임이군. 대륙에 인재가 많다고 하더니, 그 연배에 어울리지 않는 힘이야.”
모용우가 포권을 취했다.
“백도 정파 무림맹의 소맹주 모용우가 북해의 주인을 뵙습니다.”
“너무 과하게 예를 차리는군.”
“중원에서는 당연한 예의입니다.”
모자선이 강량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저 전사는 다르던데.”
“대륙은 넓습니다. 지역마다 문화가 다르듯, 사람 성격도 저마다 다른 법이지요.”
“그럴듯하군.”
“해서, 묻겠습니다.”
모용우가 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갔다.
“빙궁의 고수분들께서는 어인 일로 대륙을 찾아오셨는지요?”
모자선은 주변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땅에 주인이 어디 있나. 금을 그어 둔 것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데.”
“…….”
“그저 올 만하니 왔다.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궁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 생각하나?”
“궁주님께서도 이쪽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몰라 이곳에서 장시간 주둔하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더 움직이면 침략 행위로 간주하고 맞서겠다고 한 것은 그대들이다.”
“그런데도 멈추셨지요. 세상 돌아가는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모자선의 얼굴에 옅은 흥미가 일었다.
모용우는 빙궁 사람들의 성격에 맞지 않는 부드러움을 지녔다.
하지만 그 분위기와 태도는 마음에 들었다. 포장은 부드럽지만 알맹이는 단단하다. 원하는 것을 직설적으로 물을 줄 알았고, 상대의 진심을 끊임없이 파고들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빙궁의 다른 사람들은 그마저도 뱀 같다고 하겠지만, 한 조직을 운용하는 그녀가 보기에 모용우의 화술은 보통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다. 올 만하니 왔을 뿐이야. 쓸데없는 싸움을 벌이기 싫어 주둔하고 있었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결코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물렁하지 않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입니까?”
“물론이다.”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가만히 모자선을 바라보던 그가 재차 입을 열려는 순간.
“궁이 무너지고 얼음이 녹았으며, 오백이 넘는 식솔들이 떼죽음을 당한 우리는 갈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
“그렇게 이곳에 왔다. 그것이 우리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