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5)
1055화. 얼음의 마왕 (5)
식솔과 땅을 잃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가볍지 않았다. 제아무리 모용우라도 일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모자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 대륙 땅도 나쁘지 않군. 북해에 비할 수야 없지만, 겨울철 날씨도 제법이야.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아주 무덥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적응하면 살 만은 하겠지. 남쪽까지 내려갈 순 없겠지만.”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북쪽이라.’
그는 모자선의 말에서 거짓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 모용우도 비슷할 것이다.
게다가 워낙 추운 지방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이니, 만약 중원에 정착한다면 북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모자선의 말은 몹시 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삼교와 손을 잡았다면, 북쪽에 거하며 적과 내통하여 진입로를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쟁 걱정이 없는 시대였다면 북해빙궁이 들어오든 삼교가 정착해 살든, 강량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중원 무림과 삼교의 전쟁이 가시화되었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어떤 조직이든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강량이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모용우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주고받지 않았지만 서로가 느끼는 게 비슷하다는 뜻이리라.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빙궁에 큰 문제가 터졌군요.”
“그런 셈이지.”
터전을 잃었다는 말을 하면서도 모자선은 담담했다.
제아무리 눈치가 빠른 모용우라도 무극에 이른 고수의 심경을 낱낱이 알아내긴 힘들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판단은 했지만, 도대체 어떤 생각을 품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예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저 역시 묻고 싶은 것을 묻겠습니다.”
“…….”
“궁주님의 무공은 능히 천하 정점을 논할 만합니다. 제가 그 경지에 오르지 않아 정확한 수위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중원에서 최고라 불리는 성천과도 거의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말하면 왕급은 되는 듯했다. 이 역시 추측에 불과하나, 모용우가 보기에 모자선의 무공은 최소한 삼제급에 우위를 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 무공이라면 외적과 맞서 싸울 의지를 불살라도 이상하지 않은데, 어찌하여 식솔을 이끌고 예까지 오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궁금함인가? 아니면 무림 대표로서의 궁금함인가?”
“제가 무림을 대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무림맹을 대표할 정도는 됩니다.”
“같은 의미 아닌가?”
“다릅니다. 무림맹은 백도 정파 연합일 뿐, 흑도가 따로 있으니까요.”
“흑과 백이라.”
“어찌 되었든, 저의 질문은 사적임과 동시에 공적입니다.”
모자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변화였지만, 강량은 그녀의 표정에서 씁쓸함을 읽었다.
“무(武)에는 끝이 없어. 끝이라 생각하면 언제나 새로운 경지가 있음을 저 북두(北斗)의 별들이 알려 주지. 각자가 보는 광경도 다르기 때문에 나아가는 길 또한 다르며, 결과적으로 절대무적(絶代無敵)은 존재하지 않아. 하늘이 독존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최강자의 명성을 드리워도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천적(天敵)이 숨 쉬고 있지.”
감정 없고 딱딱한 말투 속에 아득한 세월과 깊디깊은 깨달음이 함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대지에서 정점에 이른 나의 존재도 또 다른 세상의 절대자에게는 한낱 먹잇감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하물며 나에게는 지켜야 할 식솔들이 있어. 내 자존심이야 도주라는 단어를 용납하지 않지만, 물밀듯 쏟아지는 적의 공세 앞에서 천년 빙궁의 역사가 스러지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이라 하심은…….”
“차라리 싸우다 죽는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지. 그러나 죽지도 못하고 적에게 능욕이나 당할 처지라면, 군주인 나의 선택은 도주밖에 남지 않아.”
강량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삼교입니까?”
모자선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깊은, 그리고 그만큼의 한기를 품은 눈동자였다.
“그대들이 말하는 삼교가 혈교삼공가(血敎三公家)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삼공가 전체가 나선 것은 아니야. 삼공가 중에서 그나마 숙적이라 할 수 있는 화가(火家)는 없었다. 이성 없는 미친 마귀들과 사이하고 음탕한 귀신들이 손을 잡고 들이닥쳤지.”
광혈과 사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야말로 뜻밖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해빙궁은 그 이름부터가 신비였으나, 그들의 무력이 중원의 어떠한 대문파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는 사실은 끊임없이 회자되었다.
그런 그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라면 삼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와중에 두 곳이 힘을 합쳐 공략했다는 것이 놀랍긴 했지만.
‘아니, 오히려 그게 합리적이다.’
중원 무림과의 전쟁을 코앞에 둔 삼교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전력 누수를 막아야 한다. 그런데도 빙궁을 없애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힘을 합쳐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타당하다.
‘도대체 어디까지 건드리는 것이냐.’
강량은 삼교의 광적인 파괴 행위에 질리는 것을 느꼈다.
당장 중원 무림의 터전만 해도 광활하기 그지없었다. 놈들은 이 대륙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도 모자라, 대륙 밖 세상까지 집어삼키려 들고 있었다.
모용우가 물었다.
“혹 적들의 의도는 알고 계십니까?”
모자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쳐들어와서 싸웠다. 죽음은 무섭지 않으나 놈들의 노리개가 되느니 도주하여 후일을 도모한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가만히 들어 보니 궁주님께서는 그들의 목적이 단순 파괴가 아니라고 보시는 듯합니다.”
“당연하다. 본 궁은 폐쇄적인 집단이지만 바보는 아니다. 몹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나, 본 궁에 위협이 될 만한 적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만큼 미치지 않았다.”
“삼교에 대해 알아보셨다는 것이군요.”
“수백 년 전부터 그랬지. 아는 것이 많진 않아. 그러나 그들이 힘을 합치면 어떤 국가와 조직이라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같은 종파가 아닌 이들을 노예만도 못한, 아니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 미친 작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모자선의 눈이 깊어졌다.
“그에 대한 대비는 꾸준히 있어 왔다. 그리고 꾸준히 실패했지.”
“어째서 실패하셨습니까?”
“외인에게 그것까지 말해 줄 의무는 없다. 그러나 자네가 보고 겪은 세상이 있다면, 사람 일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많았다.
‘결국.’
이곳에서, 이런 상태로 대화를 나누어 봤자 알아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이곳에 모인 빙궁의 무력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당장 궁주 혼자만 날뛰어도 모용우와 강량을 위시한 흑백의 정예 부대 두 곳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모용우가 고개를 숙였다.
“빙궁 입장에서는 민감할 수 있는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자네들은 지나치게 미안해하고, 지나치게 감사해하는군. 다른 건 다 이해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워.”
“잠시나마 중원에 정착하려 하신다면, 저희의 태도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자선의 눈이 번뜩였다.
“우리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건가?”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모용우의 대답은 분명하고 간결했다.
사아아아악.
빙궁인들의 몸에서 매서운 한기가 일었다.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염병.’
일순간 치솟은 한기가 바람에 실려 전해지는데, 그 단호한 압박감이 대단했다. 자칫 싸움이 벌어지면 정말 제대로 피를 보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모자선이 손을 들었다.
후웅.
동시에 빙궁인들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기세의 발현이 자유자재였다. 개개인도 강했지만, 군율에 가까운 조직력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당가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수장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과 신뢰는 오히려 당가 이상으로 보이기도 했다.
“건드리겠다?”
“정확히는, 제안을 드립니다.”
“듣고 있다.”
“전시가 아니라면 빙궁이 중원에 정착하든 말든, 저희는 관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무슨 의도인지 알아내기 위해 정보원들을 투입하긴 했겠으나, 긴장은 해도 날 선 대립을 하진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지금은 다르다?”
“아시겠지만 저희는 삼교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궁주님께서는 삼교와 싸워 이곳까지 왔다고 하셨지만, 직접 그 광경을 보지 않은 저희가 덥석 믿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타당한 의견이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로, 빙궁 측에서도 뒤탈 없이 편안한 주거를 원하신다면 아까 말씀하셨던 무림의 대표들과 대화를 나누심이 어떨까 합니다.”
“무림맹의 주인, 그리고 흑도 연맹의 주인과 말인가?”
“그렇습니다. 둘 중 누구와 대화를 나누셔도 우리는 그 뜻에 따라 빙궁을 같은 대륙인으로, 혹은 적대자로 대할 수 있을 겁니다.”
모자선의 미소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그대들의 상황을 이해한다. 우리라도 그랬을 테니.”
“감사합니다.”
“좋다. 그대의 제안을 수락한다.”
모용우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느 곳을 원하십니까?”
“흑백 두 곳 중 한 곳을 고르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두 곳 모두를 가겠다.”
“예?”
“그대의 말을 이해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이왕지사 신뢰를 얻고자 한다면 흑백 양도 모두에게 우리의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 그대들에게도 좋을 것이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거리상 무림맹 먼저…….”
“흑백무제라고 했던가.”
“……?”
“북해의 땅에서는 듣지 못했던 이름이다. 남하한 지 열흘째 되던 날, 대륙에 전설적인 인물이 나타나 천하를 통합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진정한 통합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그가 위대한 인물인 것은 맞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삼교는 진즉 대륙을 침공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겠지요.”
모용우의 눈이 아련해졌다.
“그는 진정 대륙의 영웅이라 할 만합니다.”
“나는 그와 만나고 싶다. 빙궁을 대표하는 사람이 나니, 대륙을 대표하는 자와 만나는 것이 빠르지 않겠는가.”
확실히 중원 무림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왜? 흑백무제가 괴팍한 사람인가?”
강량이 작게 중얼거렸다.
“가끔 지랄맞긴 하지.”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흑백무제, 흑도 연맹의 주인인 흑제성주는 적아가 분명하고 진실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제 말은, 궁주님 입장에선 미지의 세상으로 오셨는데 병력을 나눠도 괜찮겠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말라. 우궁주와 빙궁인은 강하다. 저 이름을 알 수 없는 검사에게 밀리긴 했지만, 죽음을 각오한다면 무림맹 역시 기둥뿌리 몇 개는 날아갈 것이다.”
“그렇군요.”
“패배와 죽음이 무서워서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야. 사람으로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온 것이다. 그리고…….”
“…….”
“적어도 내 눈에 비친 그대는 말이 장황하긴 해도 실로 믿을 만한 사람이다. 그런 자가 무림맹의 작은 주인이라면, 잠시나마 내 식솔들을 맡겨도 괜찮을 거란 판단이다.”
모용우가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에서의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모자선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긁적이던 강량이 헛기침을 했다.
“가십시다, 선배.”
“선배?”
“나이 많고 세면 다 선배지요.”
모자선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이해 못 할 사람들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