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6)
1056화. 얼음의 마왕 (6)
“쿨럭!”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각혈도 하지 않았고 가래가 끓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목을 긁는 듯한 기침이 나오는데, 한 번 할 때마다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몇 번의 기침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진 화진천은 가만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쌕…… 쌕…….
믿을 수가 없었다.
화진천은 자신의 숨소리가 이토록 병자 같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용두방주니 십만개방의 주인이니 떠들어 대던 인간이, 이 얼마나 비참한 꼬락서니란 말인가.’
후회는 없다. 정말 후회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고, 매 순간 시간이 아까워 자기 비하에 빠진 적도 없었다.
달리고 또 달려온 인생.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는 거지였다. 운이 좋아 개방의 장로 눈에 띄어 입방했고, 이후 전대 방주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후개가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 후 불혹에 용두방주가 되었다.
거지 주제에 무림에서도 존경받는 인사가 되어 천하를 누볐으니,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 할 만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봐도 하루하루가 영광스럽기 그지없었다.
‘날 때부터 거지였던 인생, 다시 거름이 되어 사라지려 할 뿐이야.’
화진천의 눈이 흐려졌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이지.’
본디 사람은 잠을 자는 존재다.
어둠이야말로 진정 사람의 본질일 것이다. 그래서 잠을 자고, 그래서 죽는다.
하지만.
포근한 어둠이 인간의 본질이라 한들, 빛나는 인생이 없다면 칠흑의 장막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모를 것이다.
인간은 어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언젠가 가야 할 곳을 더 편히 만들기 위해 빛나게 살아야 한다.
화진천은 응당 빛나게 살았다.
수많은 실수를 반복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실패도 맛보았다.
그러한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기어이 빛을 좇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대륙을 뛰어다녔으며, 마흔이 되기도 전에 머리가 하얘졌다.
몸과 머리, 심(心)과 신(身)을 화려하게 써먹었다.
그렇게 써먹고도 일흔이 훌쩍 넘도록 살았으니 가히 축복받은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랴.
‘좋구나.’
화진천은 혼자가 되었다.
죽을 때는 혼자가 좋다. 그처럼 열정 가득한 인생을 살았으니 후계에 대한 아쉬움, 개방의 앞날에 대한 걱정 따위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편안하고 안온하게.
육신은 고통을 노래하고 있었지만, 죽음까지의 여정을 웃으며 기다리는 것도 인생을 제대로 살아 본 자의 특권이 아닐는지.
‘그러고 보니 하나 걸리는 건 있는데.’
후회 없이 살았다고는 하나 아쉬운 건 있다.
그것은 바로 민중의 안위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자신처럼 정성을 다해 생을 살아 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가여웠다.
가난해서, 병에 걸려서, 배고파서,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해서 가여운 게 아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인생에 크나큰 빛이 될 수 있음을 모르고 죽어 가는 게 가여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다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게 될 많은 사람의 가능성이 가여웠다.
수명이 남았다면 그런 그들을 위해 뭐라도 더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욕심이지.’
나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 본 자야말로 타인의 인생을 진심으로 걱정해 줄 수 있는 법이다.
화진천은 죽기 직전에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 자부했고, 삼도천 강물이 아른거릴 즈음에야 이름 모를 무수히 많은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쩔 수 없지.’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조차 후회는 아니었다.
이것이 내 인생의 한 조각이라면 이 또한 빛나는 삶의 일면이 아니겠는가.
사아악.
환상인가, 환청인가.
어둠으로 가득한 장포를 두른 누군가가 뿌연 안개를 피워 올리며 나타나는 게 보였다.
‘나를 염왕에게로 안내할 차사(差使)인가.’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차사의 몸 주변에서 은은한 황금빛 광휘가 피어올랐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포근한 빛이었다. 어떠한 빛보다 성스러웠고, 어떠한 기운보다도 엄격했다.
어느 한 가지 기질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빛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황홀감이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제 날 데리고 가 다오.’
그때였다.
황금빛 광휘가 일순 파도가 되어 화진천의 몸을 집어삼켰다.
“허억!”
치이이이익!
온몸 가득 쌓인 탁기가 줄줄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소모된 생기(生氣)가 차오르는 건 아니었지만, 육신을 고통으로 이끌던 탁기는 사라진다.
점점 시야가 또렷해지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봤자 걷고 서는 정도일 뿐이겠지만, 그마저도 지금의 화진천에게는 놀라운 기력이라 할 수 있었다.
탁한 빛이던 화진천의 동공이 십만 거지를 이끄는 용두방주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폐장이 오그라드는 기침도, 눈에서 줄줄 흐르던 진물도 멈추었다.
그렇게 화진천은, 황금빛 광휘를 몸에 두른 어둠 가득한 인간이 실재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간을 기다리다가 죽음의 늪으로 빠졌고, 이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억조차 잊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화진천은 담담했다.
“오셨는가.”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어둠으로 가득한 인간이 말했다.
“오랜만이오.”
“자네의 지위가 공고하니 나 또한 우대를 해 줘야겠지만, 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핑계로 말미암아 평대하겠네.”
“마음대로 하시오.”
화진천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보이는군.”
어둠의 인간이 고개를 저었다.
“바쁘오. 매일이 힘들고 정신 사납기 이루 말할 수가 없소.”
“한때는 자네가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라 생각했지.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너무 많이 들은 말이라 감흥조차 없소이다.”
“다만, 지금 이 세상에 자네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칭찬 고맙소.”
건조한 목소리였다.
화진천이 벽에 등을 기댔다.
벽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만큼 낡아 빠진 목재 벽이었다. 살이 빠져 여인보다도 가벼워진 화진천이 기대는데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리가 제법 먼데, 용케 예까지 달려와 주었네.”
“그러게나 말이오. 방주께서 주책만 안 부렸다면 훨씬 쉬웠을 터인데.”
“자네는 끝까지 툴툴대는군.”
“내게 있어 방주는 그런 사람이오. 툴툴대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
“푸헐! 내가 자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화진천이 피식 웃었다.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잘도 저런 말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안다. 오히려 이 사내의 이런 모습이, 걱정과 슬픔으로 가득한 방도들의 모습보다 만 배는 더 나았다.
어둠의 인간이 화진천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나는 왜 불렀소? 홀로 떠나기는 좀 아쉬워서 불렀소?”
“그게 아쉬웠다면 멍청한 제자 놈이나 장로들을 불렀지, 뭐 하러 자넬 불렀겠나?”
“차라리 그렇게 하지 그랬소? 이게 무슨 주책이오. 다 허물어져 가는 폐가에서 맞는 마지막이라니, 천하제일방(天下第一幇)의 주인이라는 명성이 울겠군.”
“죽는 마당에 명성은 얼어 죽을. 방주니 뭐니 해도 어차피 거지야. 거지에게 폐가 정도면 감지덕지하지.”
“뭐, 틀린 말은 아니구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어둠을 둘둘 말고 있던 젊은 청년이었다.
“혼자 가고 싶어 취옥장(翠玉杖)에 서신까지 장로에게 맡기고 간 분이 나를 왜 불렀소?”
“나는 자네가 부러웠네.”
뜬금없는 말이지만 청년은 넙죽 반응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청춘을 부러워하는 건 당연하오.”
“처음 봤을 때, 그리고 다시 봤을 때도 자네는 한결같았어. 지나치게 위험해 보였고, 그처럼 위험한 인간이 천하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걸 보며 그 진위를 의심했다네.”
“…….”
“사천의 일이 마무리되고 자네를 봤을 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네. 자네는 진정 삶을 아는 자야. 어떠한 의도도 없이, 그저 내 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천하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이었지.”
“누구나 그럴 것이오.”
“누구나 그런 생각은 하지. 하지만 누구나 행동하진 못해.”
“…….”
“자네는 내 사람이 소중한 만큼 천하 만민들도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네. 그래서 그렇게 움직인 것이야.”
“대단한 착각이오. 나는 그저 삼교 놈들이 싫었을 뿐이니까.”
화진천이 미소를 지었다.
“부끄럽나?”
“솔직히 조금?”
“푸하하!”
넉살 좋은 청년의 대답에 화진천이 폭소를 터트렸다. 그 정도 웃을 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면서.
청년 역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은원이든 뭐든, 놈들은 대륙을 정벌하려 하오. 많이들 죽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쓰겠소? 웃으며 화해할 놈들도 아니니, 남은 건 각 잡고 날려 버리는 것뿐이오.”
“그래, 그걸로 충분하네.”
“해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뭐요? 나를 치켜세워 주는 거 말고 말이오.”
화진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북해빙궁 측 사람들이 섬서로 들어왔다는 건 알고 있을 걸세.”
“알고 있소.”
“……솔직히 모르겠네. 장로들에게도 말은 해 뒀지만, 자네에게만큼은 따로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이리 불렀네. 보고 싶기도 했고.”
“뭔데 그러시오?”
“아무리 개방이 정보로 제일을 다툰다 해도 새외 측 정보까지 얻기는 힘들어. 하물며 빙궁은 더하지. 애초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먼 곳에 있으니까.”
“그렇겠지.”
“다만, 우리는 운이 좋게 당대 궁주에 대한 극비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네.”
화진천이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청년이 서신을 받아 들며 말했다.
“오기 전에 돌아가셨으면 정말 헛걸음할 뻔했군.”
“내 품 뒤졌을 거 빤히 다 아네.”
청년이 말없이 서신을 펼쳐 읽었다.
잠시 후.
“사실이오?”
“그렇다네.”
“얼음의 마왕이라…….”
“현시점에서 그녀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여기까지 온 건지는 알 수가 없네. 그 정도 정보를 손에 넣은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보고 있어.”
“여하간 이 서신에 적힌 내용은 사실이다?”
“팔 할 이상의 확률로 보고 있네.”
개방에서 말하는 팔 할이라면 거의 무조건 사실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이거, 마지막 내용은 또 뭐요?”
“통천에 관한 내용일세. 후개 놈에게 그 서신을 보여 주게. 그럼 알아서 움직일 거야.”
“흥미진진하군.”
“변수가 많아질수록 머리가 아프게 마련이지. 자네는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머리가 아픈 건 그놈들도 마찬가지니까.”
“하긴, 것도 그렇구먼.”
화진천이 숨을 몰아쉬었다.
탁기가 전부 배출되어 몸은 편했지만, 사지가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생기가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함세.”
“그러시오.”
“내 후계, 가득상 그놈은 나보다 훨씬 더 세상을 위할 줄 아는 녀석이야. 재능도 넘치고 안목도 높아. 하지만 정보 조직의 수장치고는 지나치게 선해.”
“……알고 있소.”
“자네와는 막역한 사이이니, 그 녀석이 흔들릴 때 친구로서 한 번씩 잡아 주길 바라네.”
“걱정 마시오. 방주는 몰라도 후개는 내게 있어 처음으로 진심을 나눈 친구요.”
“허허, 다행이군.”
서신으로는 적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얼굴을 보고 진심을 담아 얘기해야 안심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후회는 없어도 아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구먼.’
화진천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거지는 거지답게 활개 치고, 거지답게 사라져야지.”
그 말을 끝으로 화진천의 몸에서 모든 생기가 빠져나왔다.
한참 동안 죽은 화진천을 보던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나중에 그쪽 세상에서 봅시다.”
잠시 후.
인생 첫 기억에 살았던 폐가로 돌아온 화진천은, 새 시대의 영웅의 정성 어린 화장 속에서 집과 함께 귀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