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7)
1057화. 얼음의 마왕 (7)
별빛이 고왔다.
수백 리 길을 쉬지도 않고 달렸지만 지치진 않았다. 그의 몸은 불과 한 달 전과도 달랐고, 두 달 전과는 훨씬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잠은 꼬박꼬박 잘 자고 있었지만 딱히 수련이라는 것을 하진 않았다. 물론 이 경지에 들면 실질적인 수련 행위가 없어도 경지가 상승하거나, 불행한 경우 퇴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경지의 상승과 하락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예전보다 더 강해졌고, 더 세밀한 부분까지 활성화되었음을 느꼈다.
신비한 일이었다.
이미 무한의 경지에 발을 들인 순간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해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경지가 상승하면서 완벽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허술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전에도, 또 그전에도 그랬다.
이번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그의 육체는 어느 한 군데 모자람 없이 완벽했다.
그런데도 발전했다. 발전하고 나서야 또 한 번 자신의 확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하나의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무(武)에 한계가 없다면, 그것을 다루는 육체에도 한계가 없는 법.’
무한의 경지에 진입하지 못하면, 아니 그 경지에 진입한다 한들 깨닫지 못하면 육신의 발전은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다.
발전이 없는 육신은 곧 쇠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몸과 마음은 물론 물건과 개념마저도 정점에서 노닐다가 서서히 쇠퇴를 맞이하는 게 세상이다.
청년은 깨달았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은 아직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육체는 몰라도 무리(武理)에 관해서라면 한계가 없다.
청년은 안도와 만족, 그리고 아득함을 느꼈다.
무도에 한계가 없음은 예전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만 있었을 뿐, 진정으로 체감한 적은 없었다.
정확히는, 무력감을 느낄 정도로 깊이 체감하지는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넓구나.’
누군가는 말했다. 저 우주(宇宙)는 무한할 것이라고.
청년은 비로소 자신이 우주에 발을 들였음을 깨달았다.
끝이 없는 우주에 발을 들였으니, 당연히 그 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를 무력하게 했다.
광활함에 한계가 없는 우주에 발을 들였으니, 깨닫지 못한 이치들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것이 그를 기쁘게 했다.
내가 성장하는 만큼 우주도 성장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그를 안심케 했다.
그 누구도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면 결국, 무인과 무인 간의 싸움이란 누가 더 넓은 우주의 영역을 품에 안았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건 또 아닐 것이다.’
우주란 단순히 어떠한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방향이 있었고, 고금과 미래를 담는 시간이 있었다. 만물이 존재하며, 이해할 수 없는 힘의 흐름도 있었다.
순간 청년은 과거 스승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옛사람들은 저 하늘 너머의 세상을 우주라 표현하였다. 끝이 없는 이 대륙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무한(無限)의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 우주가 유한하든 무한하든 천지 만물을 포함하고 있다면, 우리는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로이 부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제자는 스승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네가 사신(四神)을 뛰어넘어 금빛 세상으로 나아간다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에.’
‘사람은 자유롭다. 하지만 누구도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반복되며, 그 그릇을 넓히기는 쉽지 않아. 네가 오르고 또 오르기 위해선 나 자신이 진정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유…….’
‘본래부터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그 모순된 순간 속에서 비로소 괴롭기까지 한 궁구(窮究)가 해방될 수 있다.’
푸스스.
밟은 돌멩이가 자연스레 가루가 되었다.
걸음을 멈춘 청년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순간에, 언제나 스승님께서 해 주셨던 말씀이 떠오르는 걸 보면 저도 아직 꼬맹이에 불과한 모양입니다.”
그리움과 씁쓸함으로 버무려진 목소리.
하늘로 올라간 스승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미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한 놈이 엄살도 심하다.”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청년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서신의 내용을 확인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때 묻은 서신에 깃든 한 거지 대왕의 마음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거지답게 가셨소이다.’
화진천의 마지막은, 비록 툴툴거리기는 했으나 청년에게 있어 큰 충격을 주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관된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분노, 공포, 서글픔, 씁쓸함, 미련, 후회, 답답함…….
두 번의 생을 살고 있는 청년도 진정 자신의 죽음을 안온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몇 명 본 적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화진천은 유독 특별했다.
그는 진정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 봤다고 자부하며 죽었다.
실제로 그처럼 대륙을 종횡무진한 사람은 없었다. 청년도 근 몇 년 동안 삼교의 세작을 없애고 중원의 힘을 모으기 위해 쉼 없이 뛰어다녔지만, 화진천은 평생을 그러고 다녔다.
게다가 주요 정보들을 분석하고 언제, 어떻게 활용할지를 개방도가 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고민했다.
사람마다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사는 기준은 다를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화진천처럼 일말의 후회도 없이 인생 잘 살았다며 만족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정말 흔치 않을 것이다.
‘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본래의 품으로 돌아간다…… 부럽구나.’
말로는 왜 구질구질하게 폐가로 와서 혼자 죽냐고 했지만, 청년은 화진천의 마음을 이해했다.
공수래공수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어미의 배 속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났다.
화진천은 맨손으로 태어나 천하제일방의 정점에 이른 남자였다. 인생을 누구보다 제대로 살아온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당연한 순환이었다.
그런 길을, 슬픔 가득한 내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그 폐가는 그에게도 특별한 장소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런 장소에서, 죽기 직전에 자신을 불렀으니 이는 실로 영광이라 할 만했다. 용두방주라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삶을 완성한 사람의 부름이었기에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그처럼 대단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에, 번민에 휩싸여 이승을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이 서신이었다.
‘이 선물, 잊지 않으리다.’
청년은 다시 한번 서신을 펼쳐 보았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몇 번이고 읽은 그가 다시 서신을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청년이 숲 어딘가를 향해 물었다.
“거기 있는가.”
스르륵.
귀신처럼 나타난 복면의 사내가 청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충(忠)! 암무단주(暗霧團主)가 성주님을 뵙습니다.”
암무단.
성천의 투왕이 오랜 세월 천문학적인 자금을 들여 만든 당대 흑도 무림 최고의 정보 부대였다.
암무단 소속 정보원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오직 투왕과 청년만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유사시에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 이들인지 아는 사람 역시 둘뿐이었다.
청년이 물었다.
“빙궁주에 관한 최신 정보는?”
암무단주는 그간의 일을 짧게 설명했다.
“그래? 하면 강 신장과 함께 남하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경로는?”
“섬서에서 그대로 남하하여, 호북의 강길을 타고 무한까지 도달 후 호남으로 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위치는?”
“사흘 전 단강구 옆을 지나고 있었다는 보고입니다.”
“알겠다. 애들 시켜서 묵 신장에게 연락해라. 빙궁주를 마중하러 가겠다고.”
“성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암무단주는 그 말을 끝으로 연기처럼 흩어졌다.
사마현만큼은 아니지만,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신기(神技)의 은신술이었다. 은신술로는 사마현에게 뒤질지언정 신법만큼은 사마현 이상일 것이다.
게다가 암무단주는 정보 부대의 수장이면서도 무시무시한 무력까지 갖춘 만능이었다. 오대신장과 개인적인 연이 있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흑제성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암무단주를 보낸 청년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었다.
“가 볼까.”
팍!
금빛 섬광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이미 청년은 산 하나를 넘어가고 있었다.
* * *
“…….”
어두운 밤.
바다처럼 넓은 강물을 바라보던 모자선의 눈이 깊어졌다.
“날이 제법 차군요. 아, 궁주님께는 그렇지 않겠지만요.”
“밤에는 괜찮다. 기분 좋은 날씨다.”
“낮에는 많이 힘드십니까?”
“한서가 몸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 그저 마음의 문제일 뿐이다.”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불침의 육체는 그 역시 지니고 있었다. 배우고 연마한 무공에 따라 무종 전에도 한서불침의 육신을 지니는 자들이 많다.
하물며 모자선은 무극에 오른 절대고수였다. 기후의 변화가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육신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 새벽에 또 배를 갈아타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지요.”
“그럴 필요 없다.”
“뭐, 궁주님의 경지라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굉장한 강자가 오고 있어.”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모자선의 표정과 기도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굉장한 강자라고까지 말한다면 무극수일 확률이 높았다.
‘이런 젠장할.’
세상에 강자와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다지만, 또 무극수가 튀어나온다고 하니 눈앞이 다 아득해지는 듯했다.
어쩌면 무극에 도달한 고수는 또 다른 무극수를 부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끼리는 십 리 밖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고 들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안 되는데.’
기본적으로 무극수들은 하나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들이었다. 연위와 연호정, 공공대사 같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했다.
강량이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후.
스르르륵.
각자의 거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도룡단이 일제히 강량 앞에 도열했다.
모자선이 담담하게 말했다.
“훈련이 무척이나 잘되어 있군.”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들은 필요 없을 거다. 이 정도 강자라면 머릿수는 무의미해.”
“그래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 말은 옳군.”
모자선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거의 다 왔다.”
잠시 후.
훅!
차가운 강바람을 일거에 날려 버리는 기운이 있었다.
강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기운은?!’
저벅저벅.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저 멀리 수풀의 그림자를 벗어 던지며 걸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광룡의 이름을 두른 대부(大斧)는 어디에 뒀는지, 우측 허리춤에 흑룡수부(黑龍手斧) 하나만 달랑 매단 채 걸어오는 청년의 모습은 이 어둠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강량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도룡단 전원이 무릎을 꿇었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청년,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고 모자선을 직시했다.
“마왕이라…… 도저히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