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8)
1058화. 얼음의 마왕 (8)
‘이 남자인가.’
흔들리지 않는 표정, 그리고 기도.
그러나 모자선은 크게 놀랐다.
‘이 자가 흑백무제라 불리는 당대 무림의 정점.’
무력으로는 그 이상을 넘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당대 제일을 넘어 고금 제일을 논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바로 흑백무제라 하였다.
그 정도로 흑백무제 연호정의 명성은 대단했다. 오죽하면 대륙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흑백무제라는 별호 네 글자만큼은 간간이 들릴 정도였다.
‘젊다고는 들었지만.’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주시한 부분은 흑백무제라 불리는 고수가 행한 업적과 영향력이었지, 그의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젊을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서른 언저리인 듯한데, 이처럼 출중한 기도를 뽐낼 줄이야.
‘달라.’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빙궁 기준으로 봤을 때야 하얗지는 않지만 피부가 무척 매끈하고 탄력이 있다. 거기에 지고한 경지를 이룬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신비로운 기도까지, 누구라도 매료될 수밖에 없는 존재감이었다.
하지만 모자선은 신비로운 기도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포악한 힘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
북해의 무공과 이곳 대륙의 무공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하지만 지고한 경지에 이르면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무공을 연마한 이들 사이에도 많은 공통점이 보이게 마련이다.
모자선은 연호정에게서 어떠한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펑퍼짐한 소매 속, 모자선의 섬섬옥수가 질끈 쥐어졌다.
‘이 자도 전사다.’
전사도 그냥 전사가 아니었다.
백전(百戰)이 우스운,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
이룩한 경지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저 신비로운 기도 속에 감춰진 전사의 기도였다. 이제 서른 언저리로 보이는 청년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토록 소름 끼치는 여유를 보여 주는지 알 수 없었다.
“평생 볼 일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인연이 이런 식으로 닿아서 보게 되는군.”
왜일까?
모자선은 연호정의 목소리가 무척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뒷짐을 진 채 강가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연호정. 걸음에 따라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흑룡수부가 철컹 소리를 냈다.
“나를 보고 싶었다고?”
연호정의 말투는 서슴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도 공대 따위는 없었다.
기실 전생까지 합치면 그 역시 인생의 황혼까지 살다 왔다지만, 유치하게 나이 때문에 이런 식의 발언을 내뱉는 건 아니었다
이것은 격(格)이었다.
연호정은 자신의 격이, 상대에게 전혀 뒤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모자선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우궁주 모웅백처럼 어설픈 미소였다. 그래서 진심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나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나.”
“그대가 중원으로 들어온 순간, 온갖 정보 단체가 그대들을 주시했다.”
연호정은 여전히 모자선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둠 가득한 하늘 아래 철썩이는 강물을 바라보니 감흥이 제법 남달랐다.
“인상적이군. 우리와 체계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무공이야. 그 경지에 들어섰으니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대의 부하들과 내 부하들이 싸우면 피 좀 보겠어.”
“싸울 것을 미리 상정하는가.”
“웃으면서 대해 주다가 칼 맞는 취미 따위 없다.”
연호정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참 듣기가 편했다. 제법 긴장감이 넘치는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강량조차 연호정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고 느낄 정도였다.
말은 살벌한데 목소리는 편안해서, 분위기를 첨예하게 만들지 않았다. 신비로운 능력이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모자선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때였다.
스르릉.
흑룡수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소리는 편안했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 번의 행동으로 인해, 철썩이는 강물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모자선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무슨 뜻인가.”
후우우웅.
모자선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일었다.
딱히 기(氣)를 발산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병기를 뽑는 순간 긴장을 느꼈고, 그 긴장이 자연스레 그녀가 지닌 기질을 발산한 것이다.
스르륵.
강량과 도룡단이 자연스레 십 장 밖으로 물러났다.
물러난 그들의 자세는 편안하면서도 도발적이었다. 명이 떨어지는 순간 언제든 칼을 뽑을 수 있는 자세였다.
이곳까지 웃으면서 함께 왔지만, 성주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사적 인연 따위는 불에 탄 종이만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모자선을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강량과 도룡단을 둘러본 모자선이 다시 연호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한 번 죽었다.”
“……?”
“그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미 내게 한 번 죽었다.”
“죽일 마음이 없다는 걸 안다.”
“죽일 마음이 없어도 죽여야 한다면 죽인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이, 초면인데도 이런 살벌한 대화를 나눈다.
오히려 신화교주 기천웅 때보다 훨씬 더 딱딱한 자리였다. 연호정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모자선의 눈이 깊어졌다.
“해서, 싸우고 싶은가?”
“대답에 따라서 그럴 수 있겠지.”
“재미있는 상황이다. 나는 그대를 만나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한데 그대 역시 그러했던 모양이군.”
“예측 못 하는 재미가 한가득하기에 인생은 재미있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었지.”
말없이 연호정을 주시하던 모자선이 다시 입을 연 것은 반 각이 지난 후였다.
“이곳으로 오면서 대륙의 차를 마셔 보았다. 다소 이국적이고 진했지만, 나름대로 마실 만하더군.”
“…….”
“서로가 서로에게 별다른 유감이 없다면, 좋은 차 한잔 대접받을 수 있겠나?”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묻고 싶은 걸 물어라.”
연호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찌하여 성씨를 모씨라 하는가.”
“…….”
“그대의 성씨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강량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성이 다르다니? 그렇다면 모자선은 모씨가 아니란 말인가?
모자선이 특유의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빙궁의 고위 혈족들은 모두가 모씨를 쓴다.”
“문제는 그대가 혈족이 맞느냐는 것이지.”
심상치 않은 발언이었다.
“아니면, 빙궁은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혈족이라는 표현을 쓰는가?”
“그렇다.”
당당하게 대답한다.
연호정은 모자선의 그 솔직한 발언에 제법 놀랐다.
‘아는군.’
성씨가 무엇이냐고 캐묻는 순간 모자선은 짐작하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그런데도 돌려 말하지 않고 당당하게, 진실하게 대답했다.
“혈족이 되기 전 그대의 성씨는?”
“알 수 없다.”
“대답을 회피하는 건가?”
“진실로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 다만, 나도 하나 묻겠다. 내 대답이 그대에게 그리 큰 의미가 있는가?”
“나만이 아니지.”
편안했던 연호정의 목소리가 끈적끈적해졌다.
듣기 좋던 목소리에서 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한순간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곳 중원에 사는 모두에게 있어 크나큰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대가 지금 나와 말장난이나 하자고 온 게 아니라면, 그 의미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지금 미증유의 적과 싸우고 있다. 그들과의 전면전이 벌어지면 추산이 불가능한 수의 목숨이 날아간다.”
“그렇겠지.”
“그 수많은 목숨을 등에 이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날이 서 있을 수밖에 없음을 한 조직의 주인이 몰랐다면, 그대에게는 빙궁을 이끌 자격이 없는 것이야.”
모자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씁쓸한 기색이 그녀의 눈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 애초에 나는 궁주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대의 질문에 대답했으니, 이번만큼은 대답을 회피하지 마라.”
“…….”
“본래의 성씨가 무엇이냐.”
“나의 대답은 같다. 진실로 알 수 없다. 나는 나의 성씨를 제대로 물려받지 못했어.”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흑룡수부에 은은한 황금빛 기운이 꿈틀거렸다.
문답무용이다. 더 이상의 입씨름은 필요치 않다. 연호정은 진심으로 모자선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각오를 했다.
그때, 모자선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굳이 성을 들먹인다면…… 누군가에게는 천씨라고 여겨질 수 있겠군.”
강량의 눈이 번뜩였다.
천씨.
연호정에게 신마림, 그리고 광혈교에 관한 얘기를 전해 들은 그는 천씨 성에 얽힌 비화에 대해 알고 있었다.
후우우웅.
흑룡수부를 감돌았던 황룡기가 잠잠해졌다.
“자세히 설명하라.”
“해묵은 옛날 일일 뿐이다. 남들 다 듣는 곳에서 하고 싶은 얘기도 아니지.”
“…….”
“그대가 알고 싶은 것은 모씨 성을 쓰기 전 나의 성이 무엇인지 아니었나?”
“질문이 그러했다고 내용까지 표면만 훑지 마라.”
연호정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가 광혈교 사람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다.”
화진천이 건네준 서신에는 한 가지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바로 당대 궁주, 얼음의 마왕이라 불리는 여인이 과거 광혈교주의 사생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얼음의 마왕이라는 이명 역시 빙궁인답지 않은 잔혹한 손속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역대 빙궁주들과는 확연히 다른 손속과 단호함으로 모두가 그녀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치세가 안정화된 이후, 그녀의 유독 날카롭고 단호한 치세는 여러 빙궁인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북해마후(北海魔后).
한때 모자선의 무시무시한 숙청 작업이 있던 당시 그녀에게 붙은 진짜 별호였다.
모자선의 눈이 깊어졌다.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광혈의 사람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
“그러나 내 피에는, 미친 악귀의 피가 돌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믿을 만한 정보 단체에 의하면 십 대 중반쯤 빙궁으로 넘어가 그들의 보호 아래 무공을 연마했다고 들었다.”
“보호? 사육이겠지.”
무뚝뚝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강렬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분노였다.
오십을 넘어 육십에 가까워진 연배임에도 그녀의 분노는 생생했다. 마치 당장 벌어진 일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의 분노는 뜨겁고 생기가 넘쳤다.
연호정은 속으로 물었다.
‘사실인가?’
누구에게 하는 질문인가?
놀랍게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들려왔다.
‘사실이다.’
모자선이 보여 주는 저 분노는 투명하기까지 했다. 빙궁을 향한 강렬한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연호정이 주시한 쪽은 광혈 쪽이었다.
미친 악귀의 피가 돌고 있다는 모자선의 발언에는 직후의 분노 못지않은 혐오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휘하 사람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이유가, 죽음이 무서워서가 아닌 능욕당하는 삶을 살기 싫어서라고 들었다.”
“…….”
“그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선 쉽게 할 수 없는 말이지. 그대는 광혈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었군.”
모자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대답해라.”
연호정이 흑룡수부로 모자선의 목을 겨누었다.
“그대가 광혈의 수족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라. 그 증거를 확인하면, 무림맹은 몰라도 흑제성은 그대를 귀빈으로서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