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9)
1059화. 마지막 일인 (1)
철썩! 철썩!
파도치듯 일렁이는 강물의 소리가 다시 강렬하게 들려왔다.
모자선이 고개를 저었다.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대들을 받아 줄 수 없다.”
연호정의 목소리는 담백했다.
상대에게 적의 따위는 없다. 괜한 말장난으로 대답을 회피했다면 모를까, 그녀는 자신의 진심을 당당하게 말해 주었다.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적의나 살기를 품지는 않는다.
다만, 적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경계를 할 뿐이었다.
모자선이 고개를 저었다.
“흑제성의 뜻이 그러하다면 나 역시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렇군.”
연호정이 흑룡수부를 거두었다.
화려하기는 하나 두 자가 조금 안 되는 손도끼일 뿐인데, 그 도끼 하나 거두었다고 차가웠던 공기가 제법 훈훈해졌다.
“무림맹은 그대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흑도를 대표하는 내가 그대를 믿지 않는다고 무림맹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다.”
“…….”
“이방인 취급을 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물론 이방인은 맞지만, 그대들이 중원에 들어온 시기가 너무 부적절했다. 시국을 알고 있다 하니, 우리의 이러한 태도 역시 이해해 주길 바란다.”
담백한 끝맺음이었다.
모자선은 그런 연호정의 태도와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다르지만, 연호정은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거칠게 나왔을 뿐 선을 넘지도 않았다.
‘과연.’
무림맹의 소맹주라는 모용우의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태도는 분명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거의 평생을 빙궁인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연호정의 태도가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모자선은 중원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그것은 연호정의 특별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수룩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마음이 넓군.”
“음?”
“그대 말마따나 나는 적이라고 확신할 만한 사람도, 아군이라고 확신할 만한 사람도 아니다. 말하자면 적일 확률도 반이나 된다는 소리인데, 그걸 그냥 보내 주다니?”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대의 진심을 봤기 때문이라고 이해해라.”
“진심 하나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걸 수 있는가?”
“사람의 진심이 세상을 올바름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대가 썩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보았다.”
“지나치게 주관적이군.”
“주관적이지. 다만 나는 나의 안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만약 나의 이 안목과 확신을 배신하고 날뛰게 된다면, 그땐 내가 그대에게 지옥을 보여 주면 그만이다.”
“만민을 아우르는 수장으로서 너무 안일한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럴 리가.”
연호정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들 모두가 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나를 따랐다. 적어도 흑제성은 그러하다. 내가 주인을 자처했다고 주인이 된 게 아니야. 이들이 믿어 주었기 때문에 주인 노릇이나마 하는 것이다.”
“……!”
“나는 언제나 그러한 마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자신감이 과하다고, 혹시 모를 사태가 터지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묻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혹시 모를 사태가 그렇게 걱정된다면 애초에 이 세상에 나오지도 말라고.”
“…….”
“뭐,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무림맹에는 대단한 사람이 많아. 그중에 나 따위는 고개도 못 들 만큼 지혜로운 사람도 있지. 당신이 정말 적이라면, 그들 앞에서 세작임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무림맹은…… 그대들과 다투던 집단이 아닌가?”
“나도 무림맹 출신이다. 그 소문은 못 들었나?”
“……듣기는 했지만.”
“설령 다투던 집단이라 한들 현실은 변하지 않아. 그쪽에 대단한 사람이 많다는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
“괜히 말이 길어졌군. 싸워 보지 않아도 알겠어. 빙궁의 무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대의 무공은 진짜야. 삿된 마공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부디 무림맹과 힘을 합쳐 우리의, 그리고 그대의 싸움에 크나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말을 끝맺은 연호정이 강량에게 말했다.
“좀 더 고생해 줘야겠다. 빙궁주는 중원 지리에 어두운 사람이니 무림맹 인근까지 길을 잡아 줘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 안 한다. 그냥 시키는 거지.”
“자꾸 이런 식이면 신장 노릇 집어치웁니다.”
“남들 다 보는 데서 잘도 그런 싸가지를 보여 주는구나. 돌아오면 넌 뒈졌어.”
“이대로 무림맹에 들어가 버릴까 보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친분 있는 이들끼리만 보여 줄 수 있는 대화였다.
그 대화에 가장 놀란 것은 모자선이었다. 빙궁의 사람들은, 최소한 혈족끼리 존대 같은 걸 하진 않지만 이렇게 수더분한 농담을 허용할 정도로 느슨하지 않았다.
‘느슨한 게 아니다.’
그렇다. 이것은 느슨한 게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불로도 녹일 수 없고 어떠한 칼로도 끊을 수 없는 강철의 끈으로 엮인 인연이기 때문에 이런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모자선은 눈을 감았다.
‘제멋대로 믿기는 쉬워. 하지만 신뢰가 형성되긴 어렵지. 반대로 배신은 어렵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한 번의 배신이 신뢰를 무너트리는 것이다.’
증오와 혐오, 고마움과 서글픔의 대상이 된 이가 죽어 가면서 했던 그 말.
눈을 뜬 모자선이 등을 보인 채 걸어가는 연호정에게 말했다.
“호남의 날씨는 어떤가.”
연호정이 모자선을 힐끔거렸다.
“좋지, 뭘.”
“겨울에 눈은 내리나?”
“펑펑 내린다. 특히 고지대에선 걷기도 힘들 지경이지.”
“지금도 내리겠군.”
“지금도 내리지.”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갑자기 호남 날씨는 왜?”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나.”
“뭐?”
“내가 광혈교 쪽의 세작이 아니라는 걸 어떤 식으로 증명하면 되겠느냐 물었다.”
“……?!”
이번에는 연호정이 놀랄 차례였다.
“당신이 모르는 걸 내가 알 수는 없지. 애초에 당신은 내게 그걸 증명할 생각도 없었다. 지금 와서 왜 그것을 묻나?”
“그대에게 흥미가 생겼다.”
“……?”
“나는 결백하다. 하지만 이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함께 싸울 수 있다면 없는 증명이라도 해야 할 터인데, 정작 나는 그 방법을 모르니 그대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중원의 정서로는 오해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실제 나이는 모자선이 훨씬 많지만, 외양만 보면 연호정과 큰 차이가 없기에 더욱 그랬다.
물론 연호정은 그녀의 발언을 오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아도 당황스러운 건 똑같았다.
“마음에 들었으니 함께하겠다고?”
“빙궁은 오랜 터전을 버리고 떠났다. 언젠가 되찾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
“지금 세대 중에는 고향을 떠나 먼 세상을 둘러보고자 하는 이들도 많다. 빙궁의 전통과 습관을 들먹이며 젊은이들을 묶어 두기에는, 그간 희생된 자유가 너무 많았다.”
“즉, 대륙에 터를 잡기는 할 것이다?”
“그렇다. 고향은 고향일 뿐이야. 되찾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이주할 각오로 그 먼 길을 왔다.”
“…….”
“나는 그대와 다르다. 모두가 원했기에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그대와는 달리, 나는 모두의 염원 따위 신경 쓸 새도 없었다. 그대는 이미 만들어진 주인이고, 나는 주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싸운 주인이다.”
“…….”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자선이 손으로 강량을 가리켰다.
“함께 온 내 사람들 역시 나를 믿는다. 그대들이 보여 주는 신뢰의 형태와는 다르지만, 나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고 그들 역시 나를 위해 불바다에 뛰어들 수 있다.”
“…….”
“그들은 나의 판단을 믿는다.”
연호정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문화가 다르고 성품이 다른 것을 떠나, 이 정도 진심을 보여 주기란 쉽지 않다. 애초에 분석하기가 어렵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모자선은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고 있었다.
‘아니긴 할 거다.’
말했듯 연호정 역시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이들이 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받아들이고 함께하기에는 흑제성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전력의 문제가 아니라 어수선함 때문이었다. 당장 흑제성이 묵룡부의 이름을 버리고 지상으로 이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새외 빙궁의 사람들까지 들이기 시작하면, 얼추 모습을 갖춰 가는 흑제성의 조직들도 흔들릴 여지가 있다.
‘물론, 어떻게든 받으려면 받을 수야 있겠지만.’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내가 마음에 들었나?”
그 질문에 모자선이 더 어리둥절해진 것 같았다.
“사람이 마음에 드는 데에 이유가 있어야 하나?”
“아니 뭐…….”
“굳이 찾자면, 그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대는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적에게는 가차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들어 보니 명성 역시 사실인 듯한데, 그 정도 능력 있는 남자가 오만함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기란 쉽지 않아.”
“끄응…….”
“그대가 보여 준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대의 강함 역시 진짜다. 나는 그대를 가까이서 더 보고 싶다.”
모자선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제멋대로군.”
“그대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제멋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대나 나나 많은 것을 희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가 되면 오히려 뿌리치기가 더 어렵다.
연호정이 신중한 눈으로 모자선을 바라보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대가 광혈의 세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사음이나 신화의 세작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연하다.”
“하지만 그대는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 했고, 나 역시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흑제성으로 갈 수 없다는 뜻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런저런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그대 역시 일문의 주인이고 그 무위가 대단하니 높은 지위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흑제성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적 권한은 없을 것이다. 괜찮겠나?”
모자선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한 몸 의탁하며 싸우러 왔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
“다만 함께 싸워 서로에게 증명을 할 수 있다면, 전후(戰後) 흑제성은 빙궁인들이 새로운 터전을 잡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주길 바란다.”
“그 정도야 우리뿐이 아니라 무림맹까지도 힘을 보태 줄 수 있지. 물론…….”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야.”
모자선의 미소가 짙어졌다.
“딱딱하긴 해도 말이 통하는 남자라서 다행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괜히 들어와서 아쉬운 소리 하지 마라. 이곳은 중원이야. 문화부터 행동 양상까지 모두 받아들이려 애써라.”
“노력하겠다.”
“노력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해야 해.”
“그것까지 확신하진 못하겠다.”
연호정더러 깐깐하다면서, 이런 부분에서는 연호정 못지않게 깐깐한 그녀였다.
연호정 역시 모자선과 마주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훗날 기천웅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이 여자도 마찬가지. 서로의 무공이 천적이라 하였으니, 만약 어느 한쪽이 배신한다면 그에 대한 대비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