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60)
1060화. 마지막 일인 (2)
“날이 참 거칠군요.”
아주 낮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은 청년의 목소리는 몹시 듣기 좋았다.
“공자님. 털옷을 하나 더 입으시지요.”
“괜찮아.”
“하지만…….”
“선배님의 도움으로 진기 순환이 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다. 조만간 남들만큼은 하게 될 거야.”
청년의 목소리에는 담담한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청년의 시종이자 호위무사인 여인은 그런 청년이 걱정되면서도 대견함을 느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견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이 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 청년의 연약했던 모습을 수도 없이 봐 왔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주인은 어떠한가.
수많은 시련을 이겨 내고 이 자리에 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의 시련은 사라지지 않았다. 혈육에 대한 걱정과 고통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끔찍할 것이다.
그런데도 청년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라면 밤잠을 설쳐 가며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일의 선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마(魔)의 힘을 품고 있음에도 평정을 유지했다.
‘더 강해지셨어.’
마공이 성장해서가 아니었다. 사람 자체가 성장했음을 여인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의 주인이 전대(前代)보다도 더 위대한 군주가 될 것임을.
그간의 악연을 불사르고 진정한 자유를 건네준 전대 덕분에 청년은 진정 강해질 수 있는 발판을 디디고 섰다.
‘언제고 공자님께서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는 순간, 세상은 한 천재의 등장에 놀랄 것이다.’
문득 여인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천재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그 사람도 떠올랐다. 빈말로도 좋은 인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없었다면 자신도, 자신의 주인도 지금과 같은 현실을 맞을 수 없었을 것이다.
‘흑도 연맹의 주인이라…….’
그때, 청년이 말했다.
“연 소부주, 아니 이제는 연 성주라고 해야 하나?”
“네? 아, 네.”
“그래…….”
청년이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오늘따라 연 성주님이 뵙고 싶구나.”
여인이 불만 어린 얼굴로 말했다.
“공자님. 그러한 존칭은 삼가 주십시오.”
“그 거대하다는 흑도 연합을 휘어잡은 사람이다. 지파를 떠나 존경받기에 부족함이 없어.”
“그렇긴 합니다만.”
청년은 여인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인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하기 때문이리라.
“향아.”
“네, 주인님.”
“너도 알다시피 세상에는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많다. 그는 그중에서도 정점에 이른 진짜 괴물이야.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했다.”
“주인님. 주인님께선 언젠가 반드시 그자를 굽어다 볼 위치에 올라설 것입니다.”
“하하, 말이라도 고맙다. 그래, 진정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그분 덕에 너와 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게 됐어. 나에 대한 충심은 고맙지만, 그분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떨리는 눈으로 청년을 보던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멀리서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종 간의 애정 어린 대화, 아주 듣기가 좋구먼.”
낭랑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듣기만 해도 쾌남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청년, 천효락이 웃으며 말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엇차.”
중년 사내, 막원이 등에 지고 있던 큼직한 짐을 청년 앞에 내려놓았다.
짐 안에는 아홉 개의 수통과 아직 식지 않은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주변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하더군. 슬쩍 들어 보니 북해빙궁 쪽 인사들이 중원으로 들어온 모양이야.”
“빙궁이요?”
“그래.”
천효락의 눈이 반짝였다.
북해빙궁이라면 그 역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가히 천 년의 역사를 헤아리는 신비의 문파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극상승의 빙공(氷功)을 연마하는 신비인들이 얼음 궁전을 지어 산다고 했다.
물론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큰 힘을 지닌 조직이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시국이 이러한데 빙궁인들이 중원에 들어왔다니…… 설마 삼교와 연관이 있을까요?”
막원이 닭다리를 하나 뜯으며 말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애초에 나는 무림에 대해 그리 잘 아는 편이 아니야.”
“그리 말씀하시기엔 선배님의 안목이 지나치게 출중하십니다.”
“칭찬을 반찬으로 먹으니 닭다리살이 더 맛있네그랴.”
“하하하.”
“뭐,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긴 해.”
천효락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빙궁과 삼교가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까?”
“말했듯, 나는 무림에 대해 잘 몰라. 나아가 그들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는데 어떻게 알겠어? 다만, 이거 하나는 안다.”
“…….”
“이 세상에 숙명은 있어도 우연은 없다는 말이 있지.”
“그런 말이 있었습니까?”
“내 사부님께서 종종 하시던 말씀이지.”
“그렇군요.”
막원이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탁 트인 평야, 하얗게 쌓인 눈밭 위로 강풍이 불어닥쳤다. 강풍에 따라 흩날리는 눈가루가 장관이었다.
“빙궁은 새외에서도 한참 먼 동북쪽에 있다고 들었다.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누구도 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지.”
“그랬지요. 신마림이 있는 청해에서는 거의 세상 끝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교 측에선 멀긴 해도 충분히 자신들의 영역 안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물론 삼교의 본거지는 모르지만, 놈들이 북쪽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잖아?”
“그렇지요.”
“연관이 아예 없지는 않을 거야. 우호적인 관계든 원수지간이든, 뭔가 있기는 할 거다.”
화향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도 아니면, 이미 빙궁도 삼교 측에 잡아먹혔을 수도 있지요.”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어쨌거나 나는 그들이 삼교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
천효락이 고기를 뜯으며 말했다.
“어서 가 봐야겠군요.”
막원이 천효락을 보며 말했다.
“속도를 올리는 거야 좋지만, 가서 뭘 하게?”
“제가 문제가 아니라 막 선배님이 문제지요. 선배님이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허이구, 중원에 걸출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데.”
“성천에 이른 절대고수 하나가 사라지면 그 무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거대 문파 하나 이상은 더해져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막 선배의 영향력은 그처럼 대단하지 않습니까?”
막원이 피식 웃었다.
“영향력 따위 행사하려고 세상에 나온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연 동생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 백병신군이라는 별호보다 한 남자의 동생, 한 여인의 남편, 한 노인의 자식 소리가 훨씬 더 듣기 좋다.”
막원의 이 말이야말로 그의 성품이 얼마나 소박한지를 알려 준다.
천효락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리 차분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막원 덕분임을.
막원은 연호정처럼 날카롭지도, 제갈문호처럼 똑똑하지도, 신선제왕의 여러 노선배들처럼 경험이 많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는 강했다. 좋은 사람이었으며, 더불어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멋진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빨리 가시지요. 이쪽 사람들 말로는 내일이 되면 바람이 더 강하게 분답니다.”
“그래? 그런 건 또 언제 물어봤대?”
“향이 고생 좀 했습니다.”
화향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저는 별로 한 게 없습니다, 공자님.”
막원이 크게 웃었다.
“보기 좋구먼. 일단 알았다. 얼른 먹고 오늘 안에 저 멀리 눈밭까지만 넘어가 보자고.”
“예.”
그렇게 일행은 오랜만에 푸짐한 식사를 마친 후 빠르게 눈밭을 가로질렀다.
세상이 어두워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지만, 빨리 넘어가지 않으면 방향을 잡기조차 어려워진다. 고수의 눈도 속일 수 있을 만큼 이 지역의 밤은 신비롭고 또한 무서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
선두에서 걷던 막원의 걸음이 멈추었다.
천효락이 물었다.
“선배님?”
“…….”
“선배님.”
막원이 화향을 바라보았다.
“소저는 이 녀석을 업고 오늘 내로 저길 넘을 수 있겠나?”
막원이 가리킨 곳은 눈이 한가득 쌓인 평야 너머에 흐릿하게 보이는 산이었다.
화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여기서 저 산까지의 거리는 얼핏 봐도 수백 리에 달했다. 단시간에 그 거리를 주파하고 나서 산까지 넘어가는 건 무극의 고수라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나왔고, 대답이 나온 이상 화향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릴 것이다. 막원은 그것으로 족했다.
천효락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개인적인 일이다.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
“섬서로 향하려 했지만, 혹시 모르니 사천으로 가는 게 낫겠다.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 사천으로 진입하려면 꽤 힘들 거야. 지형 자체가 그래. 그래도 화향이 있으니 괜찮을 거다.”
“선배님!”
“당가로 가라. 가서 일시적으로 보호를 받은 후 무림맹이나 흑제성으로 가. 내 말, 알아듣겠나?”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걱정하지 마라.”
그 말이 끝이었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천효락은 몇 번을 물어도 막원이 대답해 주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화향이 재빨리 천효락을 업고는 신법을 펼쳤다.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제기랄.”
막원이 한숨을 쉬었다.
“뭔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죽자고 달릴걸.”
손에 쥔 백색의 창이 우웅, 하고 울음을 토해 냈다.
이것은 신마림에서 보유하던 보병 중 하나로, 백뢰창(白雷槍)이라 했다. 천효락이 막원에게 선물해 준 신병이기였다.
사아아아악!
신병이 울자 차갑고 건조한 바람을 타고 흐르는 살기가 막원의 피부를 쑤셨다.
막원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
흐르듯 휘몰아치는 눈가루 너머로 말을 탄 누군가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도 먼 거리라 말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막원은 생각했다. 한 번 고삐를 쥐고 흔들면 순식간에 이곳까지 달려올 수 있을 거라고.
거리가 그렇게 멀고, 그림자만 흐릿하게 보이는데도 말의 체구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었다.
막원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적룡(赤龍).’
적룡.
잊고, 잊고 또 잊었던 이름 중 하나.
휘이이이이이잉!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사방으로 눈가루를 던져 냈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막원의 시야에도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거대한 말, 그 위에 탄 거대한 남자.
그리고 그 뒤로 수십 기의 기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막원의 눈에 오직 적룡이라는 신마(神馬)를 탄 단 한 명의 남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 회백색 머리카락은 사자의 갈기처럼 사방으로 뻗쳤다.
피부는 고목과 같았지만, 그것이 도리어 남자의 위엄 가득한 기세와 잘 어울렸다.
체구는 막원보다도 컸고, 특히 한 손에 들고 있는 흑색의 장창은 보기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무시무시한 신기(神氣)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 자루의 흑색 신창을 든 모습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말을 타고 오연하게 세상을 굽어보는 그 눈빛은, 수십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막원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