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61)
1061화. 마지막 일인 (3)
막원이 부르는 사형이라는 호칭.
그의 사문은 전설의 문파라는 무종문이며, 무종문은 새 문주에 따라 거처를 옮긴다.
무종문은 각기 다른 무공의 달인들이 모여 만든 문파라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무종문 소속인 막원은 그 안에서 온갖 무공들을 섭렵할 수 있었다. 배우고 익힌 것은 많지 않지만, 눈으로 견식한 것만으로도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구도자처럼 문파를 나와 산중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했으니, 그것이 바로 막원의 독문무공인 천무신병기(天武神兵氣)와 천무병장공(天武兵將功)이었다.
그렇게 막원은 일가를 이루었지만, 이후 한 번도 무종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고향 사람들이 막원을 찾아왔다. 하지만 이러한 만남은 막원이 바라던 게 아니었다.
“오랜만이구나.”
안 그래도 차가운 겨울 공기가 부서진 철 조각을 담은 것처럼 날카롭고 무거워졌다.
막원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더 강해졌다.’
한 자루 흑색 장창을 오연하게 세워 든 노인.
그야말로 한 마리 사자를 보는 듯했다. 실제로 사자를 눈앞에 둔 듯 살벌한 살기와 웅혼한 위엄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싸가지는 어디 안 가는군.”
드높은 경지를 이룩했음에도 품위라고는 조금도 없다.
노인이 차갑고 사나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대사형에게 고개 한번 빳빳하구나.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막원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미소였다.
“그러는 대사형도 전과 다르지 않군요. 나이를 그만큼 잡수셨는데도 여전히 뻣뻣하십니다.”
“정녕 몸뚱이에 구멍 몇 개 뚫려야 버르장머리를 고칠 것이냐?”
“강호에 나와서 많이 다쳤습니다. 그러고도 이 지경인 걸 보면 천성인 것 같군요.”
“하긴, 그렇게 위아래가 없으니 한낱 야인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게지.”
막원이 노인의 뒤를 바라보았다.
족히 오십 기는 되어 보이는 기마다. 처음 보는 사내들이 노인과 똑같은 자세로 창을 든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격은 똑같지만, 그간 많이 타락하셨습니다. 저런 잡스러운 놈들에게 무종의 가르침을 내렸습니까? 패거리를 끼고 다녀야 안심하는 그 새가슴은 여전하십니다그려.”
막원답지 않은 신랄한 말투였다.
화아아악!
노인은 가만히 있는데, 그 뒤에 도열한 창술사들에게서 강력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놀라운 기세였다. 하나하나는 막원의 삼초지적도 되지 않지만, 모두가 모여 뿜어내는 군기(軍氣)는 폭풍처럼 거세고 강력했다.
막원의 눈이 차가워졌다.
콰드드드득!
그의 발밑에서 일어난 실금이 노인이 탄 붉은 기마를 넘어 오십 기 기마들의 발밑을 훑고 지나갔다.
히히히히힝!
파도처럼 쏟아져 나오던 살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날뛰는 기마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창술사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흘렀다.
막원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막 창을 잡기 시작한 애송이들이 누구 앞이라고 눈을 부릅뜨느냐. 대장 믿고 날뛰기 전에 그럴듯한 실력부터 키우거라.”
후우우우우웅!
구름처럼 일어나는 막원의 기세.
노인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기세와 다른, 서로 다른 백 가지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막강한 힘이었다.
강성 중의 강성. 숱한 전투를 치르며 진일보한 막원의 무공은 감히 기마 오십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했다.
자신의 제자들이 당황하며 물러나는데도 노인의 얼굴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냐?”
“…….”
“그것이 네가 창안한 천무신병기라는 것이더냐?”
막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제 무공을 어찌 아십니까?”
“……과연.”
많은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
“늙은이들이 너를 탐내는 이유가 있었어. 그 무공, 아직 완성이 덜 되었군.”
보고가 되었군.
막원은 산중 수련을 하던 자신에게 몇 번씩 찾아오던 후배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영준한 이들로, 세속의 명성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고 오로지 무(武)의 일념만을 바라보고 사는 새싹들이었다.
“완성되었습니다. 개량의 여지는 있지만.”
“그런 것을 두고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사형이야말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게 있어 이 무공은 완성되었습니다. 같은 무공이라도 사람에 따라 해석하고 느끼는 바가 다른 법, 사형은 이미 무종문의 정신도 잃어버렸군요.”
“문파를 버리고 제멋대로 뛰쳐나간 후레자식이 누구 앞에서 정신 운운을 하는 게냐.”
“후레자식일지언정 누구처럼 문파에 망조를 들게 하진 않았습니다.”
“점입가경이 따로 없군.”
“어째 오늘따라 말이 깁니다그려. 왜? 오랜만에 만난 사제가 무섭습니까?”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노인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네 이놈.”
“살기, 눈빛, 창을 고쳐 잡는 손가락. 누가 봐도 덤비고 싶어서 환장을 한 모양새이거늘 어찌하여 혀만 놀려 대십니까.”
치이이이이익!
백뢰창을 양손으로 잡고 자세를 낮춘 막원에게서 희뿌연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이 사제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선수 따위는 양보하지 않아도 되니 언제든 들어오십시오.”
노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나를 상대로 창술로 승부를 보시겠다?”
“창이든 주먹이든 도검이든, 이 사제에게는 똑같은 병기일 뿐입니다.”
“한 길에 목숨을 걸 자신이 없어 잡다한 것들이나 가지고 놀던 놈이 감히 그따위 소리를 해?”
지이이이이잉!
노인의 흑색 창에서 강렬한 울음소리가 터졌다.
푸르륵!
노인이 탄 붉은 말이 투레질을 했다.
막원의 눈이 깊어졌다.
붉은 말의 순수한 눈이 막원을 향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친구를 보는 듯했다.
‘적룡.’
막원이 입을 열었다.
“내려오시지요.”
“말에 올라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적룡이 다칩니다. 내려오십시오.”
“버르장머리 없는 사제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안겨 주는 자리다. 너는 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번쩍!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원의 창에서 뿜어진 경력이 붉은 말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콰앙!
붉은 기마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노인이 흑창을 휘둘러 경력을 막지 않았다면, 그 길로 붉은 말은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노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설마하니 저놈이 진심으로 적룡을 노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막원의 눈빛이 더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승부에서 사사로운 정은 필요 없습니다. 옛 친구의 목숨을 핑계로 패배자의 변명을 주절거릴 생각입니까?”
“……좋다.”
노인이 말에서 내려왔다.
적룡이 몇 번 투레질을 한 후 고요히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기 전, 막원은 적룡의 눈을 보았다.
육성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금수라지만, 그는 적룡의 눈에서 이해심을 느꼈다.
막원은 적룡에게 내친 일격을 미안해하지 않았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전장을 질풍처럼 달렸던 적룡은, 옛 친구의 살수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노인은 막원을 노려보며 제자들에게 외쳤다.
“너희는 백 장 밖으로 물러나라.”
백 장.
아무리 무극에 이른 고수들의 싸움이라도 백 장 거리를 물러나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처사는 옳은 것이었다. 막원은 이것을 싸움이 아닌 전쟁으로 보았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전쟁.
노인은 막원의 기도에서 생사의 기도를 느끼곤 제자들을 전장에서 이탈시킨 것이다.
‘여전하군.’
다른 건 몰라도 저 철두철미함만큼은 전장의 미학이라 할 만했다.
막원은 평생 전쟁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쟁을 싫어했다. 무(武)란 필연적으로 삶과 죽음을 담아내지만, 그에게 무는 그저 일평생 궁구해도 모자람이 없는 혼(魂)의 공부였다.
노인은 평생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입에 발린 소리를 싫어했다. 무(武)란 필연적으로 삶과 죽음을 담아내는바, 그에게 무는 죽을 때까지 죽이고 생존하는 쾌락으로 얼룩진 증명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나 달랐다.
달랐기 때문에 다른 길을 걸었고, 달랐기 때문에 서로를 증오했다.
그렇게, 눈가루 날리는 드넓은 평원 위로 두 명의 사형제가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 섰다.
“승부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노인은 한껏 진지해진 상태였다. 이전과 같은 말싸움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노인은 침묵으로 질문을 허가했다.
“삼교 놈들과 손을 잡았습니까?”
막원의 질문은 노인을 여러 의미로 놀라게 했다. 그중 가장 큰 놀라움은 역시나, 독야청청하던 놈이 속세의 인연에 얽혀 천하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불쾌하기 그지없는 광신도들 따위와 손을 잡는 멍청이도 있다더냐.”
아니라는 말보다 열 배는 더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막원은 안심했다.
무종문의 명예 때문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일생의 마지막 승부라는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 있겠군요.”
무종문이 삼교와 손을 잡았다면, 막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하니까.
그러나 잡지 않았다면 문제없다.
노인과는 언제가 되었든 생사를 두고 싸워야 했다. 그날이 된 오늘, 그 역시 승부에 혼을 싣고 싶을 따름이었다.
“어찌하여 묻질 않느냐?”
“…….”
“내가 너를 어떻게 찾았는지, 왜 하필 지금에서야 찾아왔는지.”
왜 하필 지금.
그 말인즉슨, 노인이 막원의 행선지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막원이 씨익 웃었다.
천무신병기가 불타오르며 승천하는 용이 되었다.
“더는 너에게 궁금한 게 없다, 소현립!”
파아아앙!
막원이 달렸다.
성천의 삼군 중 일인으로 불렸던 사내. 이제는 마군이 사라지고 귀군과 함께 쌍군, 혹은 이군으로 불리나 세상은 시시각각 바뀌고 있으며 막원 역시 과거의 막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원이 지닌 깨달음은 너무나도 확고하고 진실되어, 앞으로 나아갈지언정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백병신군(百兵神君).
백 가지 병기를 다루는 궁극의 고수가 또 하나의 성천이자 같은 사문의 윗사람, 창왕(槍王) 소현립을 향해 질주했다.
백뢰창이 불을 뿜었다.
번쩍!
한 줄기 번갯불이 폭발하는 것 같다.
희고 탄력적인 창대가 쭉 늘어나 소현립의 목을 노렸다. 시작부터 살초다. 그 안에 파괴력 깊은 공력이나 효율적인 투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적을 죽이는 무공, 살법이다.
신마의 백뢰창이 죽음의 의지를 품고 소현립의 인후를 노렸다.
소현립의 흑창, 흑요창(黑妖槍)의 창대가 회전했다.
따아아아앙!
백뢰창의 창날이 목을 쑤시기 직전 튕겨 나갔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순간, 그러나 소현립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백전의 경험으로 쌓아 올린 무공, 그 경험으로 연마된 부동심은 이 정도 공격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막원의 백뢰창이 또 한 번 불을 뿜었다.
쩌저저저저정!
창대가 수십 개로 늘어난 것 같다. 신병의 창날이 소현립의 상체와 하체를 연신 찔러 댔고, 소현립의 마창 흑요는 신들린 움직임으로 막원의 공격을 튕겨 냈다.
콰드득! 콰드드득!
두 사람의 공방은 보이지 않는 충격파를 생성했다. 대지에 원형으로 번지는 실금이 보였다.
수차례 소현립을 공격했던 막원의 자세가 일순간 뒤틀어졌다.
쩌엉!
그대로 회전하여 창대 끝으로 빗장뼈를 공략했다.
소현립은 그조차도 손쉽게 막았다. 피하지도 않는다. 흑요창의 창대를 쳐올려 타격을 튕겨 내는데, 그의 두 발이 복숭아뼈까지 땅에 박혔다.
부웅!
흑백의 장창이 회전하며 서로의 창날을 정확하게 때렸다.
귀청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 삼 장 가까이 튕겨 나갔다.
막원의 얼굴에 환희 가득한 미소가 어렸다.
소현립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두 사형제의 목숨을 건 생사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