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62)
1062화. 마지막 일인 (4)
화향의 등에 업힌 천효락.
타고난 천형 때문에 극상승의 무공을 연마했음에도 싸울 수 없는 몸이다. 천효락은 그러한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을지언정 절망으로 삶을 망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천효락은 절망에 가까운 심정을 느꼈다.
‘선배님.’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자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제야 천효락은 자신이 마음속 깊이 아버지를 의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만 그것을 티 내지 않았고, 스스로도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신마의 상황이 정리되자 막원이 남았다.
막원은 큰형님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천효락을 챙겨 주었다.
딱히 대단한 무언가를 하진 않았지만, 곁에서 툭툭 던지는 말에는 자상함이 가득했다. 어떨 때는 진탕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기도 했다.
어느새 막원은, 천효락에게 있어 반쯤 혈육과도 같은 은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빈 자리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꽉꽉 채워 준 사람이다. 성품 자체가 연약함과는 거리가 먼 천효락에게도 막원의 존재는 화향 못지않게 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들을 보내고 알 수 없는 위협에 맞서 싸우려 한다. 심지어 그 위협은 막원조차 긴장할 정도로 사납고 막강한 것이었다.
‘내가 거침없이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중왕마공(重旺魔功)은 신마림에서도 손에 꼽히는 마공이었지만, 최고의 마공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중왕을 선택한 것은, 중왕마공 자체가 인간 신체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내 대기 중에 떠도는 기(氣)의 실체를 잡아 조종하는 데에 능한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허공섭물, 능공허도, 기압 조절 등 마공임에도 자연기를 조종하는 데에 특화가 된 무공이다. 이런 무공이라면 자신의 천형을 고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아버지도 십단공에 이르면 타고난 천형에서 벗어나 무공 구현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이후, 파천결을 연성하여 궁극의 경지를 넘보라 하셨다.
‘필요한 순간에, 나는 왜 항상 이런 꼴을 보이는 것인가.’
목계담의 흉계를 막을 수 없어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후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소중한 인연이 된 막원이 죽음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걸 지켜볼 수조차 없이 도주한다.
화아아아악!
천효락의 몸에서 불안정한 마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내공 운용을 통한 신체 감각의 활성화는 예전부터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불안정한 내공이 새어 나오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화향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공자님!”
걱정 어린 그녀의 외침을, 천효락은 듣지 못했다.
공공대사의 무상대능력 앞에서 성장한 중왕마공, 이후 신마림이 무너지고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구단공까지 치고 올라갔다.
십단공까지는 오직 한 계단만 남은 상황에서, 천효락의 방대한 내공은 도리어 붕괴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천효락의 눈이 멍해졌다.
‘왜 항상 나는 절망해야 하는가.’
이 썩어 빠진 몸뚱이는 대체 왜 기능하는가.
소중한 인연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 물렁해 빠진 몸뚱이는, 절망 외의 감정을 안겨 준 적이 있던가?
‘죽고 싶다.’
모두가 죽고 혼자 살아남아 봤자, 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주르륵.
천효락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화향은 어깨 어림을 적신 핏물을 보곤 깜짝 놀랐다.
“공자님!”
신법을 멈추고 커다란 나무에 천효락을 기대 앉힌 화향이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을 다잡으세요! 위험합니다!”
주화입마(走火入魔)였다.
손과 발이 아닌 내 의지로만 움직이는 진기(眞氣)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보통은 사람이 절망하거나 지극히 기뻐하는 것만으로 진기가 폭주하는 일은 드물다. 사마외도의 무공은 예외지만, 그것도 중왕마공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무공이라면 여느 신공에 비해도 안정성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지금 이 상태가 된 것은 천효락의 절망이 그만큼 깊다는 뜻이었다.
사아아악!
화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천효락의 눈은 죽은 생선 눈알보다도 생기가 없어 보였다. 코와 입에서 흐르는 핏물의 양은 적었지만, 그 색이 거뭇하여 누가 봐도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신에서 발해지는 마기였다.
초절정고수인 화향조차도 감히 접근하기 힘든 마기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무공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기가 막힌 현실 속에서도, 온갖 영약과 깨달음으로 쌓아 올린 천효락의 내공은 화향의 수배에 달했다.
거기에 중왕마공의 대성을 코앞에 둔 지금, 천효락의 마기는 화향의 마기보다 훨씬 더 높은 질을 자랑했다.
그만한 마기가 온 산을 지옥으로 만들 듯 뿜어져 나오고 있으니, 화향으로서는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
천효락의 귀가 움찔했다.
절망에 절망을 더한 세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건?’
한 줄기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자신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그 빛 너머로 화향의 커다란 눈동자가 보였다.
‘누구더라.’
눈물 섞인 눈이었다. 오직 걱정만이 가득한 그 눈빛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
동생을 낳고 병을 얻어 돌아가신 어머니.
천효락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요.’
자신을 이렇게 낳아 준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때는 원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생(生)의 기쁨을 알게 해 주신 부모를 원망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저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을, 어디에도 없는 부모에게 속삭여 본다.
‘훗날을 기약하기엔, 내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이제는 막원까지.
‘이런 나에게도 살 자격이 있는 겁니까.’
그때였다.
“누가 죽었다는 것이냐.”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천효락이 등 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거기에는 혁련휘가 있었다. 마선이라 불리던, 마도 무림 최강자로 군림했던 자신의 아버지가.
혁련휘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죽지 않았다. 싸우고 있을 뿐이다. 한데 너는 이미 그자를 마음속에서 죽였구나.”
“……?!”
“설령 죽었다 한들, 그것은 그자가 내린 선택일 뿐이다. 네가 중왕을 십단까지 익히고 천형에서 벗어났다 해도, 파천결을 연마하지 않은 이상 그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너의 절망과 고민은 지금 이 순간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네가 왜 절망하고, 왜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함께 싸울 수 있었음에도 저는 천형이라는 핑계 아래 생존만을 모색했습니다! 그렇게 이십 년을 넘게 살았는데 어찌……!”
“그렇다면 나아가라.”
“……예?”
“그처럼 절망할 바에야, 싸울 수 없는 몸뚱이로라도 돌아가 그와 함께 죽어라.”
“……!!”
“너의 부모라 하여 너의 인생과 선택에 간섭하고 싶지 않다. 내 자식이지만 너는 너다. 매 순간의 선택이 삶을 좌우하는 법,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라면 기꺼이 죽으러 가는 것 역시 너다운 삶이 아니겠느냐.”
“…….”
“싸울 마음은 있어도 죽을 마음은 없다면, 적어도 이곳은 너의 전장이 아니다. 너다운 인생을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도주해라.”
“도주…….”
“도주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진정 부끄러운 것은 도주했다는 사실에 후회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다.”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천효락의 두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저는 이미 저만의 인생을 찾았습니다. 그런데도 습관처럼 도주했군요.”
“…….”
“더는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혁련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그의 모습이 어두워졌다.
“지금 당장 네가 죽는다 하여, 너를 사랑하고 아껴 주었던 이들의 마음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가라. 가서 네 삶이 이미 네 것이었음을 확인하고 또 한 번 쟁취해라.”
그렇게 혁련휘가 완전히 사라진 후.
번쩍!
어둠은 사라지고 온 세상이 빛으로 물들었다.
“쿨럭!”
현실로 돌아온 천효락이 한 바가지의 피를 토해 냈다.
“공자님!”
온 산을 뒤덮을 듯했던 마기가 사라졌다. 화향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
화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각혈 후 자연스레 가부좌를 튼 천효락. 반개한 두 눈에 절망 따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도가 현문(玄門)에서는 큰 깨달음을 얻을 때 각혈을 한다고 하였다.
천효락은 마공을 연성했음에도 현문의 깨달음과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지극히 짧은 순간에 감정의 바닥을 훑고 올라온 그의 정신은 마학(魔學)의 생리로는 이해 불가의 영역에 올라 있었다.
화아아아악!!
사라졌던 마기가 다시 불처럼 일어났다.
밀도는 높되 불안정했던 이전과 달리, 불처럼 거칠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그의 기세는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춤을 추는 모닥불을 닮았다.
‘이건?!’
화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중왕마공이 변화한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나 천형으로 인해 무공 구현이 불가능했던 천효락이, 짧고 깊은 깨달음을 통하여 중왕마공의 십단공을 개화하기 시작한다.
우둑! 우두둑!
몸 곳곳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그의 골격이 조금씩 조금씩 달라졌다.
오랜 세월 숨죽인 채 절망과 싸워 왔던 젊은 마룡(魔龍)의 비상이었다.
* * *
쾅!
포탄처럼 쏘아진 백뢰창 일격에 소현립의 몸이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지이잉! 지이이잉!
곧게 뻗은 백뢰창의 창대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창을 뻗은 자세 그대로 소현립을 노려보던 막원이 왼손으로 창대 끝을 잡았다.
“그대로 죽을 생각은 아닐 테고.”
“…….”
“네 무공은 언제 보여 줄 것이냐?”
소현립이 흑요창의 창대를 털어 냈다.
창대를 휘감고 있던 막원의 경력이 부서지며 흩어졌다.
“이해할 수 없군.”
자연체에 가까운 자세로 여유로이 말을 한다.
그런데도 빈틈은 없다. 막원이 소현립을 공격하지 않는 이유였다.
“죽지도 않는 문 내 늙은이들은 너의 무공을 무종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여겼다.”
“받아 보니 어떻더냐.”
“이래서 죽을 때가 지나서도 끈질긴 생을 부여잡고 있는 늙은이들의 말은 믿어선 안 되는 것이다.”
소현립의 자세가 낮아졌다.
오른손으로는 창대의 중간을 강하게 잡고, 왼손으로는 창대의 끝부분을 가볍게 쥐었다.
조금은 이질적이면서도 모범적이라 할 만한 창술 자세였다.
훅!
자세 하나 제대로 잡았다고 기파가 달라졌다. 막원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분명 뛰어난 무공이기는 하나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다. 너의 그 무공, 나의 무공으로 뿌리부터 박살을 내 주마.”
“어디 한번 해 봐라.”
그때였다.
화아아악!
저 먼 산에서 심상치 않은 마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막원의 눈이 흔들렸다.
소현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어려.”
번쩍!
흑요의 섬광이 단숨에 막원의 팔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