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63)
1063화. 마지막 일인 (5)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핏물이 극한으로 연마된 막원의 눈에 전부 보였다.
흐르는 핏물의 양은 많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순간 천무신병기를 이용, 지혈과 동시에 최대한 상처를 봉합한 덕이었다.
“반응이 아주 좋구나.”
소현립은 막원의 가슴에 구멍을 뚫을 기세로 창을 내쳤다.
하지만 실제로는 막원의 왼팔 상박을 스치고 지나갔다. 팔을 뚫어 버린 모습은 환상이었다. 막원의 움직임이 교묘하고 빨랐던 덕분이었다.
“그러나 네 창술은 전부 다 보았다.”
창대 끝을 잡은 소현립의 왼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
막원의 눈이 부릅떠졌다.
‘온다!’
번쩍!
그야말로 벼락과도 같은 창술이었다.
연타는 없지만, 일격의 속도가 무척 빨랐다.
막원의 옆구리에 피가 번졌다. 이번에도 겨우 피했다. 한 발만 늦었어도 갈비뼈가 부러지고 간장(肝臟)이 사라졌을 것이다.
지이이잉!
백뢰창이 긴 울음을 토해 냈다.
광활한 대지를 연상케 하던 천무신병기가 날카롭게 조여졌다. 풍성한 기운을 사방으로 깔아 두어 풍부한 공격력의 바탕으로 사용했지만, 이 정도 속도의 창격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선 신체의 반응 속도를 올려야만 했다.
소현립의 흑요창이 불을 뿜었다.
번쩍! 번쩍! 번쩍!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막원은 세 번의 창격을 다 피해 냈다. 하지만 어느 하나 완벽하게 피해 낸 것은 없었다.
어깨, 허벅지, 승모근 쪽에 상처가 났다. 깊지도 않았고 출혈도 많지 않았지만, 상처 부위에 남은 소현립의 공력은 끊임없이 내부로 침투하려 하였다.
그 침투경을 몰아내는 데에 소모되는 내공량 역시 많지는 않았지만, 중첩될수록 손해를 보게 될 것이며 종국에는 승리를 놓치게 될 것이다.
막원이 숨을 몰아쉬었다.
“무서운 창술이군.”
소현립과의 거리는 오 장이 넘었다. 그 거리를 무시하고 창격이 쏟아지는데, 막기는커녕 피하기도 급급했다.
접근을 불허하는 창술.
이것이 바로 소현립이 무종의 무공들을 기반으로 창안하고 중원의 고수들과 싸워 완성한 해무용섬(解霧龍閃)이었다.
천하 만 가지의 창술에 능통한 소현립에게 있어, 이제 창술의 격식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초식이니 뭐니 하는 것도 골치 아픈 소리일 뿐이었다.
해무용섬은 삼 식(三式)의 창술이었다. 복잡다단한 구결을 일수유에 타고 흐르는 내공으로 단박에 적을 물리치는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창술인 것이다.
창왕이라 불리는 소현립이 보고 배우고 연마한 모든 창술의 총화.
소현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는 내 옷깃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온다!
막원은 창끝의 살기를 읽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번쩍!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막원은 소현립의 창을 완벽하게 피해 냈다.
“오호.”
해무용섬이 궁극의 창술이라면, 막원의 천무신병기 역시 그에 못지않은 신공이었다.
“어디, 계속 피할 수 있을지 볼까.”
번쩍!
또 한 번 날아드는 창격.
이번에도 막원은 소현립의 공격을 피해 냈다. 막지는 못했고 접근이 어려운 것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단 두 번의 완전 회피로 소현립의 창술 자격(刺擊)을 완벽하게 읽었다.
‘좋아.’
막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거리를 좁힌다.’
파아악!
오 장이 넘던 거리가 순식간에 삼 장 거리로 좁혀졌다.
소현립의 창이 또 한 번 불을 뿜었다.
번쩍!
터져 나오는 섬광이 막원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리가 줄어든 만큼 완벽한 회피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거죽만 상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박수를 받아도 부족함이 없는 회피 기동력이었다.
‘거리가 충분해. 이제 내 차례다.’
막원의 백뢰창이 살기를 품을 때.
‘……?!’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막원은 등을 노리는 은밀하고도 유연한 살기를 읽었다.
푸화악!
땅을 구른 막원이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삼 장 거리가 다시 칠 장 거리로 벌어졌다.
‘제길.’
등이 길게 찢어졌다.
찌르는 게 아니라 베어 내듯 휘두른 창격 경파에 휘말렸다. 구르지 않았다면 척추가 쪼개졌을 것이다.
“호오? 그걸 피했단 말이지?”
의외였던 모양이다. 소현립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대단하구나. 몇 합 만에 창식에 익숙해진 것도 모자라 일섬(一閃)과 연동된 환유창(幻柔槍)까지 막아 내다니. 솔직히 놀랐다.”
해무용섬은 소현립의 진신절기지만, 그것만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그보다 수준 낮은 창식을 이용해 상대를 죽이기도 한다.
그에게 무공이란 가장 합리적인 살인술일 뿐이기 때문이다. 위력 강한 무공에 집착하여 힘 싸움으로 몰고 가는 우(愚)를 범하지 않았다.
“후우.”
또 한 번 숨을 몰아쉰 막원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소현립의 눈이 깊어졌다.
“감히 여유를 부리다니. 그것도 내 앞에서?”
막원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벅차다. 피하는 것조차도. 하지만…….’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도 막원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쩐지 이 싸움, 질 것 같지가 않아.’
화아아악!
날카롭게 조여졌던 천무신병기가 다시 구름처럼 일어났다.
서늘하고 차가운 철(鐵)의 기운이었다. 소현립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주 공격하겠다? 멍청한 놈. 일격필살에 속전속결이냐?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시끄러워, 이 양반아.
속으로 소현립의 말을 자른 막원이 더더욱 자세를 낮추었다.
창술을 펼치기에는 지나치게 낮은 자세였다. 두 다리가 쫙 벌어지고 상체는 거의 엎드리듯 기울어졌다. 마치 짐승과도 같은 외양이었다.
소현립이 혀를 찼다.
“추한 자세로고. 어디 그 자세 그대로 받아 보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현립은 결코 막원을 얕보지 않았다.
자신보다 십수 년을 늦게 입문한 녀석이지만, 고작 몇 년 만에 자신의 경지를 따라잡은 천재였다. 단순 재능만 따지면 무종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휘이이이잉!
막원의 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일었다.
소현립의 볼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너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저놈에게 야망이 있어 문 내 모든 무공을 통합하고 철저하게 실력을 행사했다면, 소현립 역시 그에게 고개를 조아릴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막원은 자신의 재능을 푹 썩힌 죽일 놈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막원은 죽일 놈이었다. 적어도 소현립에게는 그러했다.
“심장에 구멍을 뚫어 주마.”
자세를 푼 소현립이 처음으로 한 발을 앞으로 움직였다.
일 보(一步)를 내딛는 순간.
소현립의 흑요창은 이미 막원의 가슴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서걱!
막원의 가슴에 기다란 창상이 났다.
찔러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저 베는 데 그쳤다. 창이 닿기 전 벼락처럼 몸을 틀어 피해 낸 것이다.
소현립의 눈이 흔들렸다.
섬전장보(閃電長步)에 이은 해무용섬 일식, 용광섬(龍光閃)이 실패로 돌아갔다. 미리 살기를 읽어도 피해 낼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날카로운 일격이었는데도.
‘어떻게?’
진기로 신경의 반응 속도를 극한까지 올렸던 조금 전에도 겨우 피해 냈던 놈이다. 한데 반응 속도를 버리고 강력한 공격력에 모든 것을 실은 지금, 어떻게 이 공격을 피해 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온다.’
막원의 백창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소현립이 재빨리 흑요창을 세워 반격에 대비했다.
쩌어어엉!
소현립의 눈이 흔들렸다.
‘각법?!’
낮은 자세에서 올려 친 각법.
흑요창의 창대가 울음을 토할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승부를 결정지을 만한 타격은 아니지만, 그 일격에 소현립의 몸이 주춤거렸다.
소현립은 깜짝 놀랐다.
위력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 자세에서?!’
초절정이니 무극이니 말들은 많지만, 결국 경지의 구분이라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할 수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다.
하지만 막원의 각법은 인체 구조상 불가능한 각도에서 날아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파바박! 쩌어엉! 쩌정!
불가해한 무공이 잇따라 날아온다.
각법을 시작으로 막원의 몸이 순식간에 접근하더니, 팔꿈치와 주먹, 장타(掌打)에 이어 힘을 모은 백뢰창 일격 이후 창술 연타까지 날아왔다.
갑작스레 반전되는 승부였다. 소현립은 정신없이 물러나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뭔가?!’
각법, 팔꿈치, 주먹, 장타.
말하자면 체술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체술이었다.
발로 차고 접근한 후 왼팔로만 팔꿈치와 주먹, 장타를 연이어 쳤다.
양팔을 연달아 쳐 냈다면 모르겠지만, 한 팔로 그 모든 무공을 구현하는데도 엄청나게 빠르고 위력적이었다. 시간차를 두고 타격한 것도 아니었다. 눈으로 빤히 보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왼팔 삼 초의 공격을 끝낸 후, 힘을 모아 내친 백뢰창으로 위력적인 발경을 뿜었다. 그 발경을 막자마자 또 다른 창격의 쾌공이 날아오는데, 그것도 여전히 오른손 하나로 쥔 창의 공격이었다.
무공의 섭리를 넘어 인체, 나아가 힘의 흐름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무공이었다. 마치 백타의 고수와 창술의 고수가 동시에 튀어나와 공격하는 것 같았다.
왼팔은 백타술, 오른팔은 창술이다. 한데 그 속도와 유연함은 양팔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사이한!’
훅!
이해할 수 없는 무공은 멀리서 봐야 잘 보이는 법이었다.
섬전장보로 거리를 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오 장 거리가 벌어졌다.
‘……!!’
소현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막원이 그의 코앞까지 쫓아와 백뢰창을 휘둘렀다. 한데 그 창술이 이상했다.
찌르고 후려치는 창술 고유의 움직임이 아닌, 휘둘러 타격해 뭉개 버리는 초식을 구현했다. 그 기다란 장창으로!
‘곤봉술!’
육 척이 넘는 장창으로 석 자도 안 되는 단봉을 휘두르는 것처럼 무공을 구사했다.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무공이었다. 백전으로 연마된 소현립도 이런 종류의 무공은 본 적이 없었다.
쩌어어엉!
소현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번 일격은 실로 강했다. 대단히 위력적인 발경이나 필살기(必殺技)라 할 만한 살법도 아닌데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였다.
“이놈!”
백뢰창의 창대를 튕겨 낸 소현립의 몸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상체를 틀어 힘을 모은 후, 용광섬을 터트리려 했다.
그때였다.
터어어엉!
낮은 자세에서 올려 친 각법이 움직이기 시작한 흑요창의 창대를 튕겨 냈다.
부와아아앙!!
빛살처럼 쏘아진 경력이 대각으로 휘어져 천공을 갈랐다.
흑요창을 쳐 낸 막원의 왼발이 피범벅이 되었다. 신발이 찢겨 날아가고, 바짓단까지 가루가 되었다.
소현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힘의 흐름대로 움직인 오른팔이 통째로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구현까지가 어려울 뿐 구현한 순간부터는 아무도 막지 못했던 투로가 발길질 한 방에 휘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빠각!
소현립은 눈앞이 번쩍이는 걸 느꼈다.
한 발로 몸을 지탱했던 막원이 강하게 땅을 박차며 소현립의 턱을 이마로 받아 버렸다.
‘미친!’
박치기다.
창이나 손발을 휘두르기 애매한 거리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설마 이 정도 경지를 구축한 자가 머리로 상대를 가격하다니. 소현립은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충격 속에서도 어이가 없음을 느꼈다.
거리가 벌어진 두 사람.
막원의 천무신병기를 한껏 머금은 백뢰창이 섬광으로 화하여 소현립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퍼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