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65)
1065화. 마지막 일인 (7)
천효락이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세상이 바뀌었다.
“공자님.”
화향의 얼굴이 격동으로 물들었다.
“…….”
천효락은 고요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것이구나.’
중왕십단에 오르기 전에도 내공으로 감각을 활성화하거나 기감을 증폭시키는 일은 가능했다.
중왕십단이라 함은 곧 신공의 대성을 일컫는다. 신마림에서도 손에 꼽히는 초상승 무공의 대성이란 곧 자연스레 무종을 돌파했다는 소리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희대의 천재로 불리던 그의 깨달음은 이미 태산의 팔 부를 넘보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중왕마공의 성취를 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공의 성취 속에 가려진 무인으로서의 깨달음.
그것이 중왕십단을 완성한 그의 몸을 완벽하게 일깨우며 신세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나 다르구나.’
의식적으로 내공을 운용하여 감각을 증폭하는 것과, 전신의 혈도를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진기가 융통무애(融通無碍)의 경지에 들어 시시각각 세상의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두 눈은 더 멀리,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고, 두 귀는 이전에 듣지 못했던 대자연의 소리를 잡아냈다. 후각도, 미각도, 촉각도 전부 이전과 달랐다.
이것이 바로 고수가 보는 세상, 고수만이 체감할 수 있는 영역이다.
‘아직은 부족하겠지.’
중왕마공을 익히기 전부터 이 순간을 얼마나 바라 왔던가.
강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던 상상 속에서 그는 남들처럼 날 듯이 움직였고 치명적인 초식으로 적을 죽였다.
그 환상 같은 깨달음을 지금으로서는 온전히 풀어내지 못할 것이다.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상상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육체적인 경험 또한 필요했다.
그래도 지금의 그는.
그렇게 바라고 또 바라 왔던 산을 넘은 그는 꿈을 이룬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보람과 뿌듯함에 몸서리쳤다.
화향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대공(大功)을 축하드립니다.”
천효락이 웃으며 말했다.
“산 하나를 넘었을 뿐이야. 십단에 이르고서야 알겠다. 내 앞에 얼마나 많은 산이 줄지어 서 있는지.”
“공자님께서는 능히 그 산들을 정복할 수 있으실 겁니다.”
“고맙다.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네 덕분이다.”
“지나친 과찬이십니다, 공자님.”
천효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깃털이라도 된 것 같았다. 땅을 박차면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고, 주먹을 휘두르면 그 풍압만으로 바위도 갈아 버릴 수 있을 듯했다.
넘치다 못해 주체할 수 없는 힘.
뿌듯함에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순간에도 천효락은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우우우웅.
한없이 무겁고 단단한 중왕마기(重旺魔氣)가 이렇게도 산뜻하게 움직일 줄이야.
‘차분하자.’
오랫동안 이 순간을 꿈꿔 왔다는 것은 곧, 이 순간에 도달했을 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다 생각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천효락은 차분해지려 했고, 실제로 차분해졌다. 중왕마기는 말 잘 듣는 적토마가 되어 온몸을 휘돌며 격동으로 힘이 들어간 근육들을 풀어 주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속도마저도 이전보다 훨씬 더 빨랐다. 천효락은 이것이야말로 심(心)과 의(意), 그리고 기(氣)가 일체화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후우우.”
가볍게 숨을 내쉬며 격동의 찌꺼기를 내뱉은 천효락은 저 멀리서 폭풍과도 같은 기파가 부딪치는 걸 느꼈다.
‘선배.’
천효락의 강렬한 눈빛이 그 먼 거리를 관통하여 휘몰아치는 눈가루 무리를 포착했다.
“향아.”
“네!”
무극수들의 싸움이다. 천효락이 중왕십단을 완성했다 하더라도 그 싸움에 끼어들 수는 없다.
그러나 화향은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
주인을 위함이 지나쳐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도 있지만, 동시에 그녀는 천효락을 막을 수 없을 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이상 천효락을 보호하려는 건 주인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찢어발기는 일이었다. 십단에 이르기 전이라면 원망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말렸겠지만, 꿈에 그리던 경지에 오른 주인의 행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주인이 위험에 빠지면 자신이 나서면 그만이다. 온몸이 찢겨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주인만큼은 살리리라.
“가자.”
파아아악!
두 사람이 땅을 박찼다.
화향이 얼마나 기를 쓰고 달렸는지, 이곳에서 격전지까지의 거리는 상당했다.
처음으로 신법을 구사하는 천효락.
첫걸음은 신선했고 두 번째 걸음은 어색했다. 세 번째 발자국을 대지에 남겼을 때는 몸이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네 번째부터는 달랐다.
신마림 최고의 신법, 마황익(魔皇翼)이 제대로 된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화향의 속도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던 그의 신법이 순식간에 그녀의 신법 속도를 따라잡았다.
화향의 얼굴에 경악과 뿌듯함이 일었다.
‘벌써 마황익을!’
초절정고수인 그녀는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세 걸음 만에 자신의 몸과 진기의 상태, 상상 속에서 구사했던 몸놀림과의 차이를 완벽하게 깨달은 천효락의 네 번째 걸음은 하늘이 내린 천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쏘아지듯 날아간다. 날아가듯 쏘아진다.
화향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야만 했다.
경지를 떠나 천효락의 단전에는 천하 정점을 논할 만한 내공이 잠자고 있었다. 거기에 마황익은 소림사의 금강부동(金剛不動), 일위도강(一葦渡江)에 뒤지지 않는 초상승의 신법이었다.
천효락이 화향 이상의 속도를 보여 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달리면 달릴수록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발이 땅에 닿을 때 미세하게 흔들리는 신체의 중심을 통제하고, 앞뒤로 흔들리던 두 팔은 날개를 접은 새처럼 뒤로 뻗는다.
내공이 전부가 아니다. 무공이 궁극의 영역에 도달해도 신체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한다.
번쩍!
어느새 화향과 이십여 장의 거리를 벌렸던 천효락은 다시 속도를 줄여 그녀와 발을 맞춰 달렸다.
화향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대단하십니다, 공자님.”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가고 있다. 그렇게 감탄만 할 상황은 아닌 듯하구나.”
“그럼 저는 빠져도 되겠군요?”
천효락이 미소를 지었다.
“어딜 빠져.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나한테 충성했잖아?”
“역시 저 혼자 날름 빠지기는 좀 그렇지요?”
“의리 있게 살자고, 우리.”
주종 관계를 맺은 이후 처음으로 나누는 장난기 어린 대화였다.
무극수들이 일으키는 충격파만으로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다. 사지(死地) 중의 사지라 할 만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어떠한 공포와 긴장도 없었다.
훅!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삼백여 장이 남은 거리까지 도달하니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이것이 궁극의 영역에 이른 자들의 싸움.’
십단에 이르기 전에는 몰랐다. 쏟아지는 중압감을 화향이 쳐 내거나 애초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하다. 호흡조차 곤란할 정도야. 향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보호하고 있었단 말인가.’
천효락이 화향을 바라보았다.
화향의 얼굴에도 긴장이 피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호흡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몸으로 느껴지는 압박감 속에서도 꽤 자유로운 듯했다.
무공의 경지를 떠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의 풍모였다.
‘나 때문에 정말 많이 고생했구나.’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내 몸으로 느끼는 것의 괴리는 무공에만 있는 게 아니다.
천효락은 새삼 화향에게 큰 감동을 느꼈다. 그녀는 이런 순간을 수도 없이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 번을 힘든 티를 낸 적이 없었다.
‘고맙다.’
이 고마움은 평생에 걸쳐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고도 다 갚지 못할 은혜였다. 수하였지만, 그에게는 부모 못지않은 은인이었다.
고마움을 뒤로한 천효락이 다시 두 초인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콰드드득!
충돌 후 튕겨 나온 무형의 경력이 대지에 거대한 고랑을 만들었다.
마치 거대한 이무기가 몸부림이라도 친 것 같은 흔적이었다.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튕겨 나온 힘의 잔재만으로도 저 정도의 위력이 나오다니.’
백오십 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오히려 숨쉬기가 편안해졌다. 그 잠깐 사이에 호흡을 바꿔 신체가 받는 부담까지도 최소화한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백 장 안쪽, 거의 칠십여 장까지 진입했다.
그 정도 거리까지 들어오자 초인들의 대결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번쩍!
허공에 뜬 막원을 향해 소현립이 수십 개의 흑창을 날렸다.
화향의 입이 떡 벌어졌다. 천효락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일었다.
‘어검(馭劍). 저건 어검이구나.’
그것도 평범한 어검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내공력으로 수십 개의 창을 만들어 어검술을 시도하다니,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경지였다.
‘아니, 나는 저와 비슷한 무공을 알고 있다.’
당관의 만천화우도 저러했다.
그리고.
‘만마진군행(萬魔進軍行)과도 유사해.’
신마림 최강의 검법 독행마검(獨行魔劍)의 절초 중 하나가 저와 유사한 위력을 보여 줄 것이다.
‘선배!’
그때, 천효락의 눈은 허공의 폭발 속에서 무언가가 벼락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포착했다.
화아아악!
천효락과 화향의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거리가 이 정도로 떨어졌는데도 상당한 압력이 두 사람의 몸을 휘청이게 했다.
칠십 장 너머에서도 이 정도다. 저 안에서 두 사람이 받는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천효락의 마안(魔眼)이 벼락처럼 막원을 좇았다.
막원의 몸에서 강철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기운이 일었다. 피범벅이 되었지만, 폭발력을 생각하면 거의 멀쩡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힘이……!’
막원과 소현립, 두 사람 모두 불안정한 기파를 발산하고 있었다. 기의 질은 여전히 엄청났지만, 내공량만 따지면 화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한다.
천효락의 눈이 부릅떠졌다.
찰나의 찰나를 쪼갠 그 순간, 극한으로 예민해진 그의 기감은 소현립의 창에서 뿜어지는 거대한 경력이 막원의 기파를 미세하게 넘어섰음을 포착했다.
팍!
본능이었다.
화향이 말릴 새도 없이 날아간 천효락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었다.
끌어올릴 수 있는 모든 힘을 장심(掌心)으로 집중시켰다. 다급함이 이끌어 낸 본능은 진기 운용을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구현해 냈다.
쾅!
장심에서 폭발한 경력이 회전하며 흑색의 돌풍을 일으켰다.
상상 속에서 수만 번을 구사해 봤던 신마림의 절정무공, 열심장(裂心掌)이었다.
용비등천을 밀어 넣는 소현립의 기세가 움찔했다. 충돌 직전 벼락처럼 날아온 장력이 등쪽 혈도 전반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콰르르릉!
폭음과 함께 소현립의 몸이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쿨럭!”
한 움큼 피를 토한 막원이 떨리는 눈으로 천효락을 바라보았다.
“너?!”
“우웨엑!”
그 반탄력이 어찌나 거셌는지 천효락 역시 한 사발의 피를 토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죽을 수가 없었다.
중왕마공이 저절로 일어나 상처 입은 내부를 무서운 속도로 치료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선배님.”
놀란 눈으로 천효락을 보던 막원이 이내 저 멀리 튕겨 나간 소현립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소현립은 미동도 없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복잡해진 얼굴로 소현립을 보던 막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의 결과를 바라진 않았는데.”
천효락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저도 모르게 승부에 끼어들었습니다. 저 때문에 자존심이…….”
“지나고 보면 자존심보다 목숨 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냐. 덕분에 덤으로 얻은 목숨, 더 소중히 쓰면 된다.”
말과는 달리 막원의 얼굴에는 씁쓸함만이 가득했다.
“……이 승부는 또 뒤로 미뤄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