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67)
1067화. 불과 얼음 (2)
그날 밤.
사마현을 제외한 오대신장과 회포를 푼 연호정은 성주가 거하는 성루 꼭대기로 올라왔다.
사방을 둘러보니 어둠만이 한가득했다.
겨울날의 밤하늘치고는 구름도 많지 않았다. 모자선을 데리고 올 때만 해도 우중충했는데 그새 날이 갠 것이다. 반짝이는 별빛들을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많구나.”
연호정은 어느 한 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연하게도 별을 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별 하나를 잡으려고 주먹을 쥐었을 때, 그곳에 있던 별빛은 사라져 버렸다.
그 별빛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뜻하는 성광(星光)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미래? 혹은 나의 과거?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목숨인가?
내공을 풀고 술을 마셨더니 간만에 술기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육체가 완벽 그 이상으로 나아갔는데도 술에 취했다. 독째로 들이부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아아악!
황룡기를 운용하니 단숨에 주기가 날아가 버렸다.
취기에 편승해 몸을 불리던 감성이 진정되었다. 연호정은 다시 한번 자신이 쥐려 했던 별을 바라보았다.
별도, 별빛도 그곳에 있었다.
연호정은 쓴웃음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오셨소?”
“좋군.”
기천웅이 연호정 옆으로 와 성루 난간에 양손을 올렸다.
편안한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는 기천웅의 얼굴은 담백한 여유로움을 담고 있었다.
“여기는 처음 와 보네. 성주의 거처이니 크고 웅장한 거야 당연하지만, 이래도 되나 싶군. 너무 크면 적들의 습격을 쉬이 허용할 수 있는데.”
어느 조직이든 수장의 거처는 가장 웅장하고 멋지게 지어지지만, 동시에 외부에서 확인할 수 없도록 절묘하게 숨기는 것이 기본이었다. 기천웅의 말마따나 적의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최고의 경비가 있지 않소.”
“음?”
“나 말이오.”
내가 이곳에 있으니 누구도 날 노릴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연호정을 노릴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나타난다면 거처를 숨기는 게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기천웅이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지. 그래서 자네가 비범하다는 거야. 아랫사람 걱정해 주는 수장들이야 많지만, 그들을 위해 목숨 내놓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
“내 목숨 중요한 건 나도 아오. 마냥 수하들 생각해서 이런 곳에 내 거처를 마련한 것은 아니외다.”
“하면?”
“흑도 무림은 배신이 판을 치고 사람 목숨이 동전 한 푼만도 못한 곳이오. 어떤 놈들은 제 부모 형제를 죽인 걸 동정을 뗐다며 자랑하지. 그게 진짜 쾌남으로 통하는 동네도 있소.”
“미쳤구만.”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판을 치는 곳이오. 극단적인 약육강식은 천륜도 돌멩이 취급을 하게 만드오. 그렇기 때문에 흑도 무림의 수장은 더더욱 목숨을 걸고 자신의 능력과 배포를 보여 줘야 하는 거요.”
“하지만 자네가 다스리는 흑제성은 다르지 않나.”
“다르게 만들고 있소. 묵룡부 때부터 조직화된 이곳 무사들은 예의 없고 난폭하긴 해도 최악은 아니오. 그러나…….”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
“천성이 선한 사람도 극단적인 환경에서 살다 보면 천품을 잃고 짐승이 되기 마련이오. 나는 그들이 짐승이 되지 않도록, 불안해하지 않도록 통제해 주는 마지막 선이오.”
“마지막 선이라.”
“하물며 백도의 무가 출신이 와서 흑도의 우두머리가 되었잖소? 내 나름대로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게 있어야 그들도 안심하고 날 따르지.”
“자네의 명성에 감화된 이들이 그렇게 많던데.”
“명성이 높기에 더더욱 못난 모습을 보여 줘선 안 되는 것이오. 지금의 내 모습은, 흑도인들이 보기에 제법 호쾌해 보일 거요.”
기천웅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신기하군. 자네는 백도 출신이라면서 어찌 그리 흑도 무림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내가 원체 똑똑하오.”
“그거야 잘 알지. 다만 자네의 행동을 보다 보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 뒷받침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다.
말은 쉬워도, 생각과 경험의 차이를 한눈에 꿰뚫어 보는 것은 보통 안목으로 불가능하다.
연호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뛰어난 안목으로 아드님의 배신이나 빨리 꿰뚫어 보지 그러셨소.”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이었다. 듣는 기천웅 입장에서는 눈이 돌아갈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기천웅은 여전히 차분했다. 천적인 모자선을 만났을 때처럼,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있었다.
“그나마 빨리 알아본 것이네. 그리고…… 원래 부모는 자식을 냉정하게 보기 어렵지.”
연호정이 일부러 아들을 언급했다는 걸 기천웅 역시 모르지 않는다.
그 경지가 무극에 올랐든 혹은 그 이상으로 넘어갔든.
천륜으로 이어진 관계는 희미해지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기천웅은 아들과 생사대전을 치러야만 한다. 만에 하나라도 사적인 정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되면 중원 무림도 힘겨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호정은 잊을 것 같을 때마다 한 번씩 신화교의 소교주를 언급했다. 기천웅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오늘 새삼 교주의 무력을 다시 봤소.”
기천웅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느꼈나?”
“산꼭대기에 올라갔다기에 혼자 분위기나 잡고 내려오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더군.”
“고작 분위기 잡으려고 그 먼 곳까지 올라갈 필요 있겠나.”
기천웅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그나저나 그 변화를 알아봤단 말이지.”
“그렇소.”
“자네 정도 되면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그 경지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 정말 대단하구먼. 그래도 내가 자네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는데.”
“비무라면 거의 무조건 교주의 승리일 거요.”
“생사결이라면 다르고?”
“죽이자고 하는 싸움은 누구라도 다를 수밖에 없소. 무공 한 줌 안 배운 어린애가 탄 독에 천하제일고수도 죽어 나가는 곳이 무림이외다.”
“내 몸에 독이 통할 거라 보냐고 묻고 싶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이 세상에 완전은 없고 완벽도 없으며 부동의 천하제일 따위도 없다.
진짜 천하제일이 되려면 모든 것을 초월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는 애초에 사람이 아니다.
“파탄 났던 상단전이 점점 더 활성화되고 있다네. 솔직히, 절대로 고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좋아질 수 있음에 놀랐네.”
“무당의 상단전 관리 능력은 압도적이오. 아마 소림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무당을 따라가기 힘들 거요.”
“한데 탁무자 그 양반은 왜 여태 못 고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 위대한 무당 무공으로 욕심을 냈으니 교주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일 거요. 아마 죽을 때까지 고치기 힘들 것 같소.”
연호정이 기천웅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곧 마음의 창이라지만, 그들 정도가 되면 눈빛에서 다른 것도 읽을 수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교주께서는 여느 신화교도들과는 완전히 다른 무공을 연마하고 있구려.”
“그리고 아들놈과도 다르지.”
“다 전수하지 않은 거요?”
“전수는 다 했지. 다만 폐관에서 교주의 무공을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형태로 바꾸었을 뿐이야. 그러다가 상단전까지 불타 버렸지만, 위력 하나는 발군이라고 생각하네.”
“그걸 교정했군. 상단전을 연마하지 않는 쪽으로.”
“……자네는 정말이지.”
기천웅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나이에 어쩌다 그런 괴물이 되었나?”
“칭찬 고맙소.”
연호정이 난간에 상체를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빙궁주 말은 어떻소?”
“진심 같더군.”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아는데 왜 나를 이용하나?”
“또 한 번의 점검이오. 어쨌든 처음 보는 사람이고 그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으니까.”
“불쾌한 여자이기는 해도 거짓말은 안 할 것 같더군.”
“어쩌면…….”
“음?”
“어쩌면, 빙궁주와 교주가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소.”
기천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극은 무슨. 그냥 불쾌할 뿐이야.”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었다.
성루 난간에 기대 하늘을 보며 제각기 다른 상념에 접어든 두 사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성주님.”
어느새 성루 꼭대기로 복면을 쓴 누군가가 나타났다. 암무단주였다.
“무슨 일인가.”
암무단주는 말없이 두 장의 서신을 건넸다.
그중 하나를 펼쳐 본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기천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사부님이 궁에서 혼례를 치렀다고 하오.”
“오호?!”
서신 하나의 내용은 바로 양천의 혼인 소식이었다.
드디어 황제의 딸과 황궁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그였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조용히 진행되었지만, 제국의 미래를 꿈꾸는 고관대작들과 궁인들 수백 명이 모이는 앞에서 치러졌다고 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부디 잘 지내십시오.’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 엮은 혼인이었지만, 정보통에게 듣기로 공주가 양천의 호방한 성격에 제법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삼십 년 나이 차를 무시하고 혼인하는 이들이 흔했다. 와중에 양천은 맨손으로 세상에 나와 무림을 뒤흔든 거물로 성장했고, 그 무력 역시 궁극에 달하여 중년의 외양으로 보였다.
공주 역시 황궁 사람답지 않게 무공에 심취했다고 했다. 혼인할 때가 훌쩍 지나 버렸지만, 호방한 성격에 무(武)를 갈망하고 있다면 양천만 한 배필이 없을 것이다.
지금의 연호정은 진심으로 양천의 혼인을 축하할 수 있었다. 본인이 주도한 계략이라고는 하나, 양천 역시 마음에 없었다면 끝까지 거부했을 혼약이었다.
기천웅이 휘파람을 불었다.
“늘그막에 아주 복 받았구먼. 다만 그이 성격이 보통이 아니던데, 배필 될 사람이 고생깨나 하겠어.”
“공주의 성격도 만만치 않다고 하오. 화합하여 잘 지내든 파탄이 나든,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 거요.”
“어쩐지 자네는 좋은 결과를 확신하는 듯하군.”
“과거의 사부님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좋은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오.”
시간을 내서라도 꼭 가서 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연호정은 다른 서신을 펼쳤다.
“……!”
첫 번째 서신을 읽을 때와는 달리 그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왜 그러나?”
“…….”
“연 성주?”
“이것들 봐라?”
연호정의 눈이 새파란 안광을 토해 냈다.
“이 정도 움직임이라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
“그렇군. 폐하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움직인 것이로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다른 쪽과의 연계 없이 단독으로 결정했을 확률이 높다는 건데.”
의미를 알기 힘든 말.
기천웅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연호정이 암무단주에게 물었다.
“이 서신의 내용, 사실인가?”
“정보의 신뢰도는 구 할 이상입니다.”
사실상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특유의 미소는 싸움을 코앞에 둔 호장(虎將)의 그것이었다.
“교주.”
“말씀하시게.”
“그래도 인연은 인연인데,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갑시다.”
“아직 흑제성의 기반도 다지지 못했는데 또 나선다고?”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소이다. 사흘 정도 이것저것 지시하다가 떠나면 될 것 같소. 나 아니어도 능력 있는 사람들 많으니까.”
“거참, 자네는 어지간히 세상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군.”
“그래야만 할 일이 생겼소.”
연호정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본 기천웅은, 문득 자신의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 우리가 먼저 시작해야 터진다고 보았는데, 너희 쪽에도 애가 닳은 놈들이 있었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