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68)
1068화. 불과 얼음 (3)
“…….”
서신을 읽는 팽무강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어렸다.
한참 동안 서신의 내용을 훑어본 그는 빠르게 방을 나섰다.
거처를 나서 몇 개의 성문을 지난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어전 근방의 거대한 공터였다.
쩌어어엉!
공터 입구로 가니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두 사람, 두 명의 검사가 싸우고 있었다.
한 명은 중년의 사내로 언뜻 봐도 비범한 보검을 들었고, 다른 한 명은 노도사로 구름 문양이 새겨진 장검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는 흉흉한 기세도, 위압감 넘치는 기파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몸에 아무것도 담지 않은 듯 표정조차도 담담했다. 그저 느릿하게 상대방을 보며 원을 그리다가 결정적일 때 한 번씩 검을 휘두르는 게 전부였다.
쩌어엉! 쩌어어어엉!
서로가 가볍게 휘두른 검인데도 부딪치니 산천초목이 떨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팽무강은 그 소리에 귀가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울림이 과하여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소리 하나는 청아하다.
그 안에 얼마나 지고한 깨달음이 깃들어 있을지.
다급함에 이곳까지 달려왔지만, 두 초고수가 검을 부딪치는 광경을 보니 자신 역시 당장이라도 도를 뽑아 들고 그 안에서 어울리고 싶었다.
쩌엉! 치리리링!
몇 번이나 충돌했던 두 검의 마지막 부딪침은 검날의 기묘한 긁힘으로 끝이 났다.
연위가 숨을 몰아쉬었다.
“어렵군요.”
“어렵지.”
탁무자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어렵지만, 그걸 또 해내는구먼. 자네는 정말 몇 번이나 나를 놀라게 할 셈인가.”
“부족하기 그지없는 무공입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거야 보기 좋은 덕목이지만, 자네가 창안한 그 무공들까지 낮추지는 말게. 자네가 무당의 사람이었다면 당장 나부터 배우고 싶다고 떼를 썼을 만큼 대단한 무공들이야.”
“과찬이십니다. 아직 그럴듯한 구결도 창안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으로 휘두르는 검에 어찌 구결을 쓰겠는가. 다만 자네가 보고 들은 깨달음을 풀어 낸 비급이라면, 만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가치를 지닐 걸세.”
“하하.”
탁무자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조정연검이라 이름 붙인 그 심검도 심검이지만, 뇌기(雷氣)에 가까운 진기를 드리운 그 삼검(三劍)의 무공도 엄청난 것이었네. 단순해 보이면서도, 아니 단순하기 때문에 도리어 검리(劍理)의 극치를 담아낸 무공이야.”
“감사합니다.”
“그 삼검의 이름은 무엇인가?”
“처음엔 감히 절대삼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긴 했습니다만.”
“절대삼검. 광오하기 그지없는 명칭이나, 실로 어울린다고 아니 말할 수 없겠네. 당장 일초만 제대로 구사해도 당금에 받아 낼 무인이 몇 없을 게야.”
절대삼검.
무극에 오르기도 전에 연위가 창안했던 검법이었다.
검법의 심오함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절대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절대삼검이라 부르던 그 무공들은 지금에 이르러 완숙하게 무르익었다.
당장 연위의 심검인 조정연검부터가 절대삼검의 깨달음 속에서 튀어나온 무공이었다. 연위에게는 여러모로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검법이라 할 것이다.
“지금은 감히 그렇게 부르진 못하지요. 저 스스로는 여의파검(如意破劍)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여의파검이라……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일세. 하나하나가 숭고한 검리를 담고 있으면서도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니, 자네의 마음가짐에 따라 모든 것을 깨트려 부술 수 있을 것이네.”
탁무자가 재밌다는 듯 킥킥댔다.
“세상의 평화를 바란다는 마음으로 심검지도에 조정연검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면서, 정작 전투 무공은 모든 것을 깨부수고 멸하는 힘을 지녔군. 이토록 상반된 힘을 다루기란 쉽지 않지.”
연위가 얼굴이 어색해졌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의검을 만들 때는 저 역시 욕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세상천지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나마 자네 같은 선인(善人)의 손에서 탄생한 무공이니 다행일세. 그 두 개의 검법, 부디 천하를 위해서 써 주게나.”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좋네, 좋아.”
탁무자가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우리끼리의 대화가 너무 길었군.”
“예.”
그제야 대화가 끝났음을 직감한 팽무강이 빠르게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탁무자 선배님을 뵙습니다.”
“새삼스레 인사는 무슨. 그래, 무슨 일인가?”
“큰일 났습니다.”
팽무강이 두 사람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두 사람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폐하께서 예측한 것과는 다른 결과인데?”
연위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당연히 나쁜 일이지.”
“모두가 예측하던 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저쪽이 우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저쪽에도 나름의 분열이 있거나.”
“……!”
“이쪽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진즉에 치고 들어왔을 겁니다. 제가 보기엔 삼교 쪽도 완벽한 하나가 되진 못한 듯합니다.”
“저들은 본디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라고 하지 않았나. 서로를 경쟁자로 보면서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고 움직이는 이들이라 했네.”
“물론 그렇습니다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지요.”
팽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에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있듯, 저쪽 역시 그럴 겁니다. 저쪽에도 이 기나긴 대치와 치열한 수 싸움에 지친 이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런 이들이 수뇌부라면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연위가 팽무강에게 말했다.
“가주께서는 어르신들과 중진들을 모아 주시오. 나는 폐하께 가겠소.”
“알겠소.”
* * *
“후우우.”
내쉬는 숨이 몹시 산뜻하고 가벼웠다.
천천히 눈을 뜬 양천의 얼굴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세상만사 걱정이 없는 듯한 그 얼굴은 백서가 투왕이라는 고수를 모시면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백서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 보이십니다.”
“음.”
양천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그의 손 위로 서서히 흑색의 기운이 일어났다가 이내 귀신처럼 사라졌다.
“신기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내가 이룩한 경지에 자부심이 있다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곳보다 더 높은 곳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그것도 무수히 많이.”
“…….”
“연호정을 필두로 수많은 천재가 세상에 나타났네. 그런 후배들의 성장세는 나를 강하게 자극했어. 하여 하루라도 수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네.”
“예, 저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발전 속도가 느렸지. 발전한다 한들 눈곱만큼의 성장이 나를 조롱했어. 몇 번은 퇴보한 적도 있었다네.”
바로 그 점이 대단한 거라고, 백서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경지에서도 발전은 힘들었다. 목숨 걸고 노력해서 발전할 수 있는 게 무공이었다면, 백서는 누구보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을 것이다.
무극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한데도 양천은 소소하게나마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했다.
그것은 노력의 차이가 아닌 재능의 차이였다. 양천은 그토록 지고한 경지에 오르고도 몸부림치는 노력만으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호정은 나를 제쳐 버렸지.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오리라 생각은 했네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
“성주의 재능이 워낙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솔직히 무인으로서 맥이 빠졌다네. 이후 수련다운 수련은 하지 않았어. 무공을 포기한 게 아니라, 여유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야. 한데…….”
양천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근래 혼인이다 뭐다 바빴는데, 어느새 내가 모르고 있던 미지의 경지로 올라왔구먼.”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대공이라 할 것까지도 없네. 그저 흑사자기(黑獅子氣)에 이런 경지도 있구나, 싶어서 신기할 뿐이야.”
백서가 농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 어린 주모(主母)를 맞이하여 주군의 마음에도 큰 변화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하루하루 얼굴에서 빛이 나신다 싶었어요.”
“커험! 이 사람이 못 하는 말이 없어.”
“제가 감히 주군의 경지에 대해 논할 수는 없으나 무극수도 사람이라면 커다란 기쁨과 안정만으로 무공이 성장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군께서는 언제나 전진만을 하셨으니 이와 같은 생활의 변화가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은 아닐는지요.”
“안정이라…… 솔직히 잘 모르겠네.”
“모른다고 하시기에는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으십니다.”
“어허, 사람 참.”
흑도 연맹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왔기 때문일까.
심복인 백서와 나누는 대화가 예전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말이 주군이고 수하지, 대화 내용만 보면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친구라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혼사 전날 걱정이 많지 않으셨습니까?”
양천이 헛기침을 했다.
“자네 앞이라서 말하는 건데, 정말 긴장했다네.”
나이가 한참 어린 여인과 백년해로하게 생겼다. 무극수도 사람인바, 양천이라고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는 길이기에 평범한 사람처럼 긴장도 하고 걱정도 하는 것이다. 백서는 양천의 그러한 변화가 무척이나 보기가 좋았다.
“주모와의 생활은 어떠십니까?”
“생활이라고 해 봤자 이제 겨우 열흘일세. 이렇다 저렇다 말하긴 애매하지.”
“그래도 좋으시지요?”
양천이 볼을 긁적였다.
“내자(內子)가 나를 많이 위해 주더군. 성격이 괄괄하다고 들었는데 적어도 내게는 잘해 준다네. 그게 고맙고 미안할 뿐이야. 나도 그만큼 잘해 주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네.”
천하의 투왕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조만간 십이지신을 초대해 같이 밥 한 끼 먹고 싶다고 하더군. 본인이 준비한다던데.”
“주모께서 요리도 하십니까?”
“무공에 미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살았던 세월이 얼마인가. 와중에 궁에서 먹었던 음식 맛이 그리워서 숙수에게 이것저것 배우던 게 습관이 되었다고 하더구먼.”
“정말 대단하십니다. 공주 신분으로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그래. 호기심이 많고 뭐든 열정적으로 임하는 사람 같네.”
“저희야 주모께서 초대해 주신다면 영광일 따름입니다.”
“나를 향했던 영광이 어느새 내자에게로 가는군.”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였으니, 저의 충성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양천만큼이나 백서 역시 흑도 연맹 시절보다 훨씬 더 사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주군.”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사람은 바로 주원(酒猿)이었다.
“무슨 일인가?”
“팽가주 쪽에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와중에 흑제성에서도 연락이 왔기에 한꺼번에 들고 왔습니다.”
주원이 양천에게 두 개의 서신을 건넸다.
먼저 팽무강이 보낸 서신을 본 양천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나아가 흑제성에서 온 서신까지 확인한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게 되었군.”
“무슨 일입니까?”
“전쟁이 임박했어.”
“예?”
“그리고…….”
양천이 남쪽을 바라보았다.
“성주가 온다고 하네. 혼사 선물을 들고 온다고 했지만, 흑제성의 정보력이라면 이쪽 사정을 훤히 알고 있겠지.”
“……!”
“도끼 세 자루를 다 들고 올 것 같으니 우리도 못지않게 준비를 해 놔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