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69)
1069화. 불과 얼음 (4)
황궁으로 가기로 한 그날, 작은 회의가 있었다.
“또 가요? 또?”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너희를 보낼 수도 없잖아.”
“이럴 때 저희를 보내야지요.”
“황궁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만 봐도 너희를 보내선 안 돼. 너희까지 같이 간다면 몰라도.”
“그건…….”
“그렇지? 나도 없는데 너희까지 없으면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소수만 데리고 간다는 거다.”
“이러다가 삼교와 싸우기도 전에 성이 와해되겠는데요.”
“그럴 리가 있나.”
연호정의 자신감은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다.
사람 보는 안목이 원체 뛰어나기도 했지만, 실제로 성내 수뇌부들의 움직임만 봐도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무(無)에 가까웠다.
작금의 흑제성은 무림맹보다도 집결력이 좋았다. 연호정은 양천이 직접 인정한 후계 적통인 데다 능력도 출중했으며, 드리운 명성 역시 중원 최고를 달렸다.
오히려 흑제성에서 반란을 주도하려는 자가 나오면 그자야말로 전 중원의 적이 될 것이다. 게다가 오대신장들 역시 무력만큼 뛰어난 일 처리로 흑제성 무사들의 찬사를 받고 있었다.
연호정이 없어도 흑백무제의 존재감은 성 전체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니, 그가 없다 해도 흑제성이 잘 굴러가지 않을 일은 없었다. 이미 자체적으로 성장 가도를 달리는 조직이 흑제성이었다.
게다가, 연호정에게는 흑제성을 관리할 또 다른 인재가 있었다.
묵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장이 자꾸 자리를 비우면 좋지 않아요.”
“별수 없지.”
“그래요. 별수 없긴 하네요.”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소정광이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묵 신장께서도 성주님과 함께 가시지요.”
묵비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예. 모두가 성주님과 함께하고 싶을 겁니다만, 툭 까놓고 말해서 성주님께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묵 신장과 사마 신장 정도입니다.”
강량과 진양의 무공은 대문파 장문인급을 넘보고 있었고, 소정광 역시 뛰어난 두뇌로 흑제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셋은 실제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전력 하나가 더 생기는 것뿐이었다. 대단한 실력들이지만, 무극수가 판치는 곳에서 전황을 바꿀 만한 기량은 보여 주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묵비와 사마현은 달랐다.
묵비의 궁술은 천하제일을 논한다. 궁술이라는 무공 자체가 어떤 무공보다도 위험한 것이다. 그 정도 궁술이라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황을 바꿀 수 있다.
사마현 역시 마찬가지. 그의 은신술은 무극수들조차 긴장해야 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당장 적의 움직임을 모르는 상황에서, 묵비와 사마현이야말로 전선에 투입되기 딱 좋은 인재들이다.
“와중에 사마 신장은 휘하 암살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중입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지요.”
사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거 보십시오. 묵 신장밖에 없습니다.”
묵비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할 일이 있는데.”
“그거야 나눠서 하면 되는 거고요. 아닌 말로 활줄 당겨 본 지도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반박하기 힘든 말이었다. 흑제성을 관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묵비는 이십 일이 넘도록 수련다운 수련도 못 하고 있었다.
“우리 오대신장 중에서 묵 신장의 무공이 제일입니다. 그 실력을 녹슬게 해서는 안 되지요. 이 기회에 성주님과 함께 세상에 나가셔서 더 성장해 돌아오십시오.”
묵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돌아올지 너희까지 부를지는 아무도 몰라.”
“아니, 당분간 우리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요, 성주님?”
소정광의 물음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과 충돌하게 된다면 일차 충돌은 무조건 북부에서 터진다. 아마도 첫 시작인 만큼 살벌한 격전이 벌어질 거야. 그 격전을 무림맹에서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들이 먼저 움직일 거다.”
“무림맹이 강한 전력을 투입한다면 흑제성은 뒤에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묵비가 헛기침을 하며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따라가도 돼요?”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니가 언제 오지 말라고 하면 안 따라왔냐? 그리고 정광 말이 옳아. 너의 궁술은 성천의 시선도 빼앗을 수 있다. 네가 함께 간다면야 우리야 한층 더 든든해지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도와드릴게요.”
“이 자식 이거 말하는 거 봐라. 야, 인마.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무슨 말이 그래? 이거 네 싸움이기도 해.”
고개를 슥 돌린 묵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투덜대듯 말하고 있지만, 소정광은 묵비의 얼굴에 드리워진 흥분을 볼 수 있었다.
‘역시 그런가.’
소정광은 묵비가 연호정에게 어느 정도 연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심보다도 더 큰 것은 바로 호승심이다.
소정광이 보기에 묵비의 호승심은 다른 오대신장을 압도했다. 그녀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연호정은 언제나 힘든 싸움을 벌였고, 당연히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도 힘들어진다.
묵비는 그런 과거를 항상 추억했다. 십 년, 이십 년 전은 아니었지만, 연호정과 함께 강호를 질타하며 적과 싸웠던 시절이 그녀에겐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세상을 모르던 때 격동 가득한 시간을 보냈으니 그 경험이 얼마나 강렬하겠는가. 인간적인 매력도 매력이지만, 험난한 시절을 같이 보냈기 때문에 묵비가 연호정을 뜻깊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연호정이 소정광에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다. 함께 비상(飛上)해야 하는데 자꾸만 밖으로 나돌게 되네.”
“시국이 이러한데 어쩔 수 없지요. 그리고 비상은 함께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서로에게 신뢰를 주는 이상, 각자가 맡은 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요.”
“묵비, 봤냐? 말은 이렇게 예쁘게 하는 거야.”
묵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도 말 예쁘게 안 하면서 바라는 건 엄청 많네요.”
“나는 성주잖아, 인마.”
“직책으로 찍어 누르는 사람 싫어했잖아요?”
“한 마디를 안 지네.”
“왜 져야 하나요.”
“너 진짜 뭐 잘못 먹었니?”
“전혀요.”
묵비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워낙 여러 방면에 재능이 특출나서 행정 업무도 잘 보고 있지만, 애초에 그녀는 산을 뛰어다니며 궁술을 수련했던 무사였다. 오랜만에 강호행을 한다니 흥분이 아니 될 수가 없으리라.
입맛을 쩍 다시던 연호정은 문득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은 말없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허벅지가 워낙 두꺼워 다리는 꼬지 못했지만, 한 다리를 무릎 위로 턱 하니 올려둔 모습에서 편치 않은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너는 또 왜 그러냐.”
진양은 누구와는 달리 솔직했다.
“나도 데려가쇼.”
“싫다.”
연호정도 솔직했다. 그래서 진양의 표정은 곧바로 일그러졌다.
“정광이 하는 말 못 들었냐? 넌 여기 있어.”
“대장이 맡을 급이 안 되는 놈들은 다 내 선에서 정리할 수 있잖소? 데려가면 편할 거요.”
“옆에서 정광 도와줘야지 가긴 어딜 가? 묵비도 가는 판에.”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누님도 데려가면서 왜 나는 안 데려가는 거요? 한 명 데려갈 수 있다는 건 두 명, 세 명도 데려갈 수 있다는 뜻 아니겠소?”
“한 명으로 족하니까 한 명 데려가는 거다. 근데 언제부터 누님이냐? 나이 비슷하지 않아?”
“수틀리면 백 장 밖에서 요격할 텐데 누님 소리가 안 나오게 생겼소. 여하간 나도 데려가쇼.”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이래? 알 만한 놈이.”
“대장이야말로 이러는 거 아니오.”
“뭘?”
“강량 저 녀석과 어울리며 좋은 공부가 되었지만, 우릴 내버려 두고 청해로 갔을 때도 솔직히 이게 뭔가 했소. 일 다 치르고 오기 전까지 무림맹에 틀어박혀서 무공만 수련했단 말이오.”
“……음.”
“그거야 뭐 좀 불만이어도 이해했소. 한데 여기까지 와서도 업무나 보란 말이오? 알고 있겠지만 나, 대가리보다 주먹질이 익숙한 놈이고 주먹질보다 칼질이 더 익숙한 놈이오.”
“네 대가리도 나쁘지 않던데…….”
“뭐가 됐든 나는 정광과 다르오. 저 녀석은 원체 똑똑하고 성격도 저래 먹어서 이것저것 다 괜찮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오. 함께 성장하자고 약속을 했으면 말 그대로 함께 성장할 기회를 줘야지. 대장이 뱉은 말을 어길 참이오?”
다소 억지스러운 말이긴 하다.
하지만 연호정도 이제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진양은 지금 진심을 얘기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떼를 쓰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진양의 재능은 묵비 못지않았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여러 방면에 특출난 재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 성격이 재능을 못 살리고 있었을 뿐이다. 진양의 성격이 조금만 유했다면, 지금 공부를 시작해도 오 년 안에 급제할 만큼의 지식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성격이고 성향이다.
진양의 성격을 생각하면 새삼 많이 참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과거 마도(魔刀)라 불렸던 시절에도 그는 선봉으로 나서 화려한 무공으로 적들을 불살라 버리는데 능했지, 뒤에서 작전을 짜거나 인내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능력과 자존을 죽이는 일이라면, 수장으로서 참으라는 소리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만히 진양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도 가자.”
큼직한 얼굴에 미소가 확 번졌지만, 괜스레 멋쩍은 듯 표정을 굳히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진작 그럴 것이지.”
“제대로 칼질 못 하면 다시 보내 버린다.”
“그건 걱정하지 마쇼. 칼질 하나는 내가 자신이 있다니깐.”
목소리가 높아졌다. 흥분했다는 뜻이었다.
피식 웃는 연호정을 보며, 소정광이 말했다.
“이렇게 된 거 강 신장도 데려가시지요.”
괜스레 입맛만 다시던 강량이 놀라서 소정광을 바라보았다.
“나도?”
“엉.”
“가, 갑자기 왜요?”
“싫어?”
“아니 뭐…… 싫은 건 아닌데.”
강량은 왜인지 모르게 소정광을 어려워했다.
소정광이 사마현을 보았다.
“사마 신장은 안 됩니다.”
사마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고 싶지도 않아. 우리 애들 이제 막 꽃피기 시작했는데 가긴 어딜 가. 제 몫 할 때까지는 지켜봐 줘야 해. 그리고 대장 양반이 시킨 일들이 생각보다 많더군.”
“봉급 많이 받잖습니까.”
“내가 가져다 바친 돈을 생각하면 할 말이 아닌데? 뭐, 쏠쏠하게 주긴 하더군.”
소정광이 웃으며 연호정에게 말했다.
“세 분 다 데려가시지요.”
“남은 일들은 어쩌라고?”
“제가 다 맡겠습니다.”
“힘들어. 아니, 불가능해. 네 수련 시간까지 감안하면 하루에 반 시진도 못 잘 거다.”
“그렇기 때문에 더 좋습니다. 슬슬 아랫사람들을 부려 볼 생각이거든요.”
“아랫사람?”
“지금 흑제성의 권력은 지나치게 상부에 몰려 있습니다. 신장원(神將院)과 장로원이 거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지요. 이 불균형을 제힘으로 해소해 볼 생각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겨 보겠다?”
“그렇습니다.”
“힘들지 않겠냐.”
“현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는 사람들이 저보다 더 힘들 겁니다.”
연호정이 묵비와 진양, 강량을 바라보았다.
묵비는 미소를 지었고, 진양은 헛기침을, 강량은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두 자루의 도검, 그리고 한 자루의 활.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사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사흘 뒤 출발할 테니 인수인계 똑바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