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70)
1070화. 불과 얼음 (5)
닷새 후.
“후우, 후우.”
진양의 호흡은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묵비는 궁수라서 신법 실력이 엄청났고, 강량의 귀검무(鬼劍武)도 유령 같은 경신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묵비 못지않았다.
진양은 달랐다. 그의 무공은 힘의 무공이고, 강력한 내공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때문에 대량의 진기 운용에 능했다.
이룬 경지가 경지인지라 섬세한 내공 운용도 곧잘 했지만, 묵비와 강량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당연히 두 사람보다 빨리 지칠 수밖에 없었다.
강량이 혀를 찼다.
“덩치는 산만 한 양반이 거참.”
“덩치가 산만 하니까 힘든 거야, 이 자식아.”
“신기하네. 접근전은 물론 중장거리전에서의 이동술은 벼락을 방불케 하더니만 왜 이러는 거요? 그 정도 내공 운용이면 벌써 지칠 리가 없는데.”
“시바, 너랑 수련하면서 도법 고치다가 내공 운용법도 손봤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쯧, 보완을 했어야지.”
“아오, 말 걸지 마! 힘들어!”
슬쩍 저 먼 곳을 바라보던 강량이 목소리를 죽였다.
“형님이야말로 목소리 낮추쇼. 능력 안 되는 거 보이면 진짜로 쫓아낼 텐데.”
“뭐?”
“연 형님 말씀 잊었소?”
진양이 합죽이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호정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이틀 만에 일행은 호북에 접어들었다. 호남 흑제성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연호정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물길이 복잡해서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군. 하남에 이르면 좀 더 빨라지겠지.’
그의 생각을 들었다면 진양은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푹 쉬다가 가는 건가.”
어느새 기천웅이 뒷짐을 진 채 연호정 옆으로 다가왔다.
연호정이 기천웅의 발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안 시렵소?”
“내 내공의 성질을 생각하면 그 말은 엄청난 실례라네.”
“다른 걸 떠나서 왜 그렇게 맨발을 고수하는지 모르겠네.”
“편해. 건강에도 좋고.”
“건강은 개뿔.”
“그나저나 자네들은 항상 이러나?”
“뭐가 말이오?”
“아무리 급하다지만 수행원 하나도 없이 달려오다니? 면면이 화려하니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너무 단출한 거 아닌가?”
“말 그대로 급하니까 이러는 거요.”
“안 급해도 수행원은 안 데리고 다닐 것 같은데?”
“누구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혼자 나다니는 게 속 편하지 않소?”
“안 해 봐서 모르겠군.”
기천웅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간만에 오랫동안 달리니 상쾌하긴 하네. 몸도 삭 풀렸으니 속도를 더 올려도 좋겠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소. 반 시진만 쉬다가 갑시다.”
그때, 기천웅의 반대편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한동안은 편히 쉴 수 있나 했더니만 벌써 몸을 굴리게 될 줄은 몰랐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잘하면 원수들과 싸울 수도 있소. 오히려 궁주께서 바라는 바가 아니오?”
“물론 그렇다.”
기천웅이나 모자선이나, 그렇게 험하게 달려왔는데도 옷에 흙먼지가 묻기는커녕 의관 하나 흐트러진 기색이 없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무슨 소문 말이오.”
“흑백무제는 언제나 적과 최일선에서 싸운다더군. 그 스스로는 물론 싸움도 항상 그를 쫓아다녀 언제나 피가 마르지 않는다고 들었다.”
연호정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저주도 그런 저주가 없군.”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나는 지금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기천웅이 코웃음을 쳤다.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소리를 할 생각인가.”
모자선이 차갑게 대답했다.
“운명인지 숙명인지는 몰라도 이 세상을 굽어보는 하늘의 존재는 있다.”
“그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미신을 믿나?”
“그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천리(天理)에 눈을 뜨지 못했군.”
“그런 골치 아픈 것에 신경을 쓰니까 아직도 그런 어설픈 영역에서 맴도는 것이다.”
“천지자연을 이해하지 못하니 상단전이 파탄 난 것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무공 수련만 한다고 전부가 아니야.”
“불만 있나? 있으면 그냥 덤비지 그랬나. 나야 언제든 끝장을 볼 수 있는데. 골방에 틀어박혀 수련한 무공으로 말이지.”
“마음 같아선 그대의 몸뚱이를 얼음덩이로 만들어 버리고 싶지만 그래서야 흑제성주에게 실례일 테지. 대륙의 예의는 몰라도 체면은 안다.”
“점입가경이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적어도 그대 걱정은 아니다.”
연호정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코밑에 수염도 안 난 어린애들도 아니고 참 잘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나이를 합치면 백삼사십 년은 너끈했다. 늙으면 애가 된다는 소리를 믿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 말이 진리를 관통하는 명언이 아니었나 하고 연호정은 생각했다.
‘기가 막히는군. 이런 게 상극이라는 건가.’
남과 여, 불과 얼음, 거기에 출신지까지 뭐 하나 겹치는 게 없다.
애초에 두 사람이 이렇게 싸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동병상련이라면 동병상련이다. 힘을 합쳐 삼교와 싸운다면, 상극이기 때문에 도리어 엄청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천적을 향한 본능적인 혐오가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있었다. 아마 중간에 연호정이 없었다면 정말로 사생결단을 냈을지도 모른다.
“나잇살 먹고 그러면 재미있소? 그만들 합시다. 애도 아니고.”
“성주도 봤잖아. 저 얼음과자가 먼저 시비 거는 거.”
“시비는 모닥불이 먼저 걸었지. 나는 애초에 저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끝이 없겠다.
“그만! 밥 먹고 쉬다가 얼른 떠납시다.”
자칫 전쟁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는 길을 가는데 이렇게까지 긴장감이 없어도 되나 싶다.
연호정은 강제로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기천웅은 코웃음을 치며 육포를 뜯었고, 모자선은 싸늘한 얼굴로 주먹밥을 베어 먹었다.
연호정은 한숨을 쉬었다.
육포와 주먹밥, 둘 다 맛있게 먹으면 될 걸 두 사람은 서로가 선호하는 음식조차 싫다며 편식을 하고 있었다.
상극이라는 게 사람을 이 정도로 유치하게 만드는지 연호정은 처음 알았다.
‘쌍으로 상극인 사신기(四神氣)도 상생으로 돌아섰는데 이 양반들은 대체.’
식사를 마친 일행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인간을 초월한 무력의 소유자라 누구 하나 지칠 줄을 몰랐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진양의 속도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호흡도 눈에 띄게 거칠어진 것이, 내공 운용 자체가 불안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휴식을 외치려는 순간.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군.”
놀랍게도 기천웅이 진양의 곁에서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성주의 사람이라 애써 관여하지 않았지만, 더는 못 참겠어. 대체 뭐냐, 그 어설픈 내공술은?”
“예, 예? 저요?”
진양은 저도 모르게 존대로 대꾸했다.
기천웅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불씨는 그럭저럭 뜨거운데 제대로 불사르지를 못하고 있잖느냐. 열양공은 그리 쓰는 게 아니야.”
“그러면……?”
“예로부터 불은 무게 없는 위험 그 자체라 하였다. 실제로 불에는 무게가 없어. 그저 그 뜨거움으로 온 천하를 태울 뿐이다. 네놈의 몸뚱이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그 화기(火氣)도 불이다. 거세고 흉포하지만 한없이 가벼워질 수 있는 기운으로 왜 이리 궁상을 떠는 건지 모르겠군.”
“무슨 말씀인지…….”
“그 머리로 어떻게 그만한 경지에 오른 건지도 모르겠다.”
기천웅의 손에서 푸른 화염이 일렁였다.
엄청난 밀도를 지닌 기운이었다. 그처럼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 저만한 기운을 가볍게 뽑아내는 기천웅의 무력은 역시나 엄청난 것이었다.
놀랍게도 화기(火氣)임은 분명한데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화기의 특성을 유지한 채 온도를 손안에 가둬 버린 것이다.
“봐라.”
기천웅이 손을 휘저었다.
아무렇게 휘두른 손에서 뽑혀 나온 푸른 화염이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마치 암기의 고수가 비수를 던진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더 빠르다. 한없이 자유롭게 허공을 날던 푸른 화염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훅! 하고 사라졌다.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저 불에는 무게가 없다. 하지만 적의 몸에 닿으면 폭발하며 일대를 지옥으로 만들겠지. 불이란 그런 것이다.”
“……!”
“네 화기는 지나치게 무거워. 힘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니까 몸이 둔해지는 거다. 화기의 경중은 시전자의 의념에 따라 달라진다. 불을 불로서 이해해. 그러면 네 커다란 몸뚱이로도 남들 못지않게 달릴 수 있을 거다.”
기천웅의 말이 끝나는 순간.
훅!
불안정하게 흘러나오던 진양의 기세가 일순간 내부로 고이기 시작했다.
불의 특성, 단순히 그 하나만을 설명했지만, 기천웅의 청화(靑火)를 보며 진양은 그 이상을 깨우칠 수 있었다.
‘수렴.’
화기를 수렴해야 한다.
하지만 수렴하기 위해선 가벼워져야 한다. 무거운 기운은 수렴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웅! 우웅!
진양의 단전에 도사리고 있던 화기가 확장과 수렴을 반복했다.
그 행위가 반복될수록 외부로 흘러나오던 진양의 기세는 점점 약해져만 갔다. 자신의 내공을 불이라 믿고 확장 수렴을 반복하며 내공의 폭발력까지 이끌어 내고 있었다.
기천웅의 얼굴에 놀란 빛이 어렸다.
“바본 줄 알았더니 제법 하는군. 하나를 가르쳤더니 두 개를 깨달았나?”
화아악!
흐트러졌던 자세가 바로잡히고, 거칠어진 호흡 역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외부로 나오는 기세는 점차 줄어들었다. 진양은 몸이 이 정도로 가벼운 감각을 처음 느꼈다.
진양은 놀라움과 감사를 담아 기천웅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흐음.”
진양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기천웅이 한마디를 남기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앞으로 지켜보도록 하지.”
도대체 뭘 하려고 지켜보겠다고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기천웅에게 연호정이 말했다.
“고맙소.”
“이 정도로 고맙긴. 자네도 저 녀석의 문제를 알지 않았나?”
“뭔가 아쉽긴 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몰랐소. 붙잡고 며칠을 고민해야 알았을 거요.”
“붙잡고 며칠을 고민하기엔 자네가 너무 바빴군.”
기천웅이 힐끔 모자선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열양공을 익힌 녀석이라 그런가 근골 하나는 기가 막히더군. 한두 개씩 건네줄 맛이 나는 인재야.”
모자선의 눈빛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연호정은 제발 싸우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모자선이 후방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이 묵비와 강량을 훑었다.
안타깝게도 묵비는 음한(陰寒)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강량 역시 한기와는 거리가 있는 무공을 익혔다.
그러나 와중에 음공(陰功)에 가까운 무공을 연성한 것은 강량이었다. 빠르고 패도적인 무공의 소유자지만 그것은 강량의 무공 구현 방식일 뿐, 귀왕진기는 양강한 무공보다 음한한 무공에 가까웠다.
모자선이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언제쯤 쉴 생각이지?”
“……반나절만 더 가서 쉽시다.”
“알겠다.”
연호정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잘하면 뿌리 깊은 상극의 혐오가 새 시대의 상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잘됐군. 이참에 크게 발전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