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72)
1072화. 불과 얼음 (7)
함 태공이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궁에 난이 터졌을 때도 황제의 명에 따라 입궁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의 사태에 황궁을 수습할 사람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루하루 살아온 그는, 황궁이 진정된 연후에 입궁하여 문무백관을 장악했다. 이후 황궁을 안정시키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청년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마치 선비 같구나.’
큰 키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덩치가 크거나 눈매가 부리부리하지는 않았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호랑이도 한입에 삼켜 버릴 것처럼 거친 외양의 소유자일 것 같은데, 이렇게 보니 거칠다기보다는 순한 인상에 가까웠다.
그러나 함 태공은 외모로 상대를 가벼이 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제국의 부활을 위해 황제와 함께 살아온 그는 강호 무림의 소식에도 제법 정통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젊은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행보를 보여 주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약관이 되기 전에 출도하여 무림맹을 뒤흔든 기린아.
이후 천하를 주유하며 삼교의 세력을 몰아내고, 흑과 백을 오가며 강호를 안정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풍운아.
나아가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 누구보다 빨리 강해져, 지금은 강호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로 성장한 일대 거인이 앞에 있었다.
백도 정파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중원을 위해 흑도로 넘어가 기어이 흑도 연맹의 주인이 된 자.
사십 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함부로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함정오라 하오. 이 나이에 죽지도 않고 지겹도록 관리질을 해 먹는 늙은이가 강호의 영웅을 뵙소.”
함 태공은 깍듯했다.
태공의 직위를 생각하면 흑도 연맹의 주인이라 한들 하대를 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한다.
함 태공은 연배와 직위를 내려놓고 상대를 존경하고 있었다. 태공의 직위가 아니었다면 황궁을 수호해 준 은혜에 고개를 숙였을지도 모른다.
“연호정입니다.”
연호정도 깍듯하게 포권했다.
“부족하나마 흑도 연맹 흑제성의 주인을 맡고 있습니다.”
함 태공이 미소를 지었다.
듣기로 흑백무제는 강골에 예의를 모르며, 특히 적에게 가차가 없는 인물로 유명했다.
하지만 저 깍듯한 자세와 절도 있는 목소리를 보니, 세간의 소문이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과격하기만 한 사람이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겠지.’
더불어 명문가 출신이었다. 아무리 막 나간다 한들, 천라제국검의 검주(劍主)가 된 연위의 자식이라면 품격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강호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성주께서 부족할 리가 있겠소. 되레 우리 백관들이 했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셨으니, 성주는 나라의 은인이자 우리 관리들의 은인이기도 하오.”
“누구에게 은인이라 불릴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성질머리가 고약해서 망나니들의 치졸한 짓거리를 참지 못했을 뿐입니다.”
“과례는 비례라 하였소. 성주가 아니었다면 제국의 뿌리까지 잃었을 것이오. 성주는 스스로의 공을 폄하하지 마시오.”
“황궁이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수히 많은 사람의 노력과 충정 덕입니다. 마지막에 와서 한 손 거든 걸로 뿌듯해하기엔 너무도 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연배에 흑도 연맹의 주인이 된 것은 단순히 무력 때문만은 아니었구려. 흑제성주의 겸손함을 백관들이 배워야 할 것 같소.”
말마다 관리나 백관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연호정은 한눈에 함 태공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강호인들에게 부채감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보자마자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또 이런 면모를 보니 참 인간적이기도 했다. 연호정은 제국의 늙은 신하가 마음에 들었다.
“시국이 이러지 않았다면 차를 마시며 대담이라도 나눴을 텐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이었다.
“수천 리 길을 오셨는데 더 쉬지 않아도 되겠소?”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회의에 들어갑시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회의에 앞서 그간의 진행 상황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강호를 양분하는 세력의 수장이 하는 말이다. 그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요구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함 태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선 회의에서 나온 내용을 서기가 작성해 두었으니 그것부터 보시오.”
함 태공이 가져다준 문서는 수십 장에 달했다.
연호정은 차분히 앉아서 문서를 읽어 나갔다. 한 장, 한 장 읽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그렇게 일각의 시간이 흐르고.
“초원으로 길을 잡을 줄 알았더니 길림성으로 방향을 틀었군요.”
“그 짧은 시간에 다 읽은 것이오?”
“예? 아, 예.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전쟁이 코앞인데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때는 아니었다.
함 태공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빠르시구려. 문서에 적힌 내용, 전부 기억하시오?”
“중요한 것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행이오.”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황궁의 재정을 이 정도로 써 버리면 유지 자체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함 태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하다뿐이겠소. 하지만 초전의 중요성은 강호인인 성주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거요.”
“물론 그렇습니다.”
초전은 곧 그 전쟁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싸움이다.
기세도 기세거니와 뒤이어 적을 몰아칠지, 방어 태세를 갖출지, 총공세에 나설지, 시간을 끌지가 초전 한 번으로 결정되는바.
그 한 번의 싸움에 황궁은 명운을 걸었다.
“폐하께서는 적을 황궁으로 유인해도 괜찮다는 말씀까지 하셨소.”
“정말입니까?”
“이 늙은이도 그것만큼은 재고해 주십사 말했소만, 나라가 날아갈 판국에 궁궐 따위가 문제냐며 되레 된통 꾸지람을 들었소이다.”
천하의 연호정도 황제가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대단하신 양반이야.’
황제 정도가 아니면 그만한 배포를 보일 사람이 어디 있겠나.
새삼스레 황제의 결단력에 감탄하며, 연호정이 말했다.
“그것이 적에게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 일단 적의 칼맛부터 보는 게 순서겠지요.”
칼맛이란다. 함 태공은 강호의 무사들이 쓰는 용어가 참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어쩔 생각이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보완하여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는 회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회의만 하다가 적의 동태를 놓칠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적 병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별동대를 차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 말은 성주의 부친과 흑제성의 태상(太上)께서도 하셨지.”
“결과는 어떻게 났습니까?”
함 태공이 미소를 지었다.
“성주가 오면 확정을 짓자고 하였소. 이런 부분에 있어서 특히 능력이 좋으시다고?”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그럼 빠르게 정리 후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 * *
“…….”
조용히 눈을 뜬 무허대사의 몸에서 가벼운 기파가 일렁였다.
“왜 그러나?”
상단전을 관리받던 탁무자의 물음에도 무허대사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뿐.
평소에 잘 보여 주지 않던 진지함이 있었다. 탁무자는 말없이 무허대사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네.”
“어딜?”
“명부인지 이승인지 모를 곳.”
“그건 또 웬 헛소리인가?”
“자네도 같이 갈 텐가?”
“아직 우리가 명부에 갈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을 하면서도 이미 탁무자는 일어나고 있었다. 무허대사의 언행이 워낙 심상치가 않았다.
무허대사는 말없이 거처를 나섰다. 탁무자 역시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음?!’
탁무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 기운은……?”
상단전 치료를 받고 있던 도중이라 기감이 엄청나게 둔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니 그 역시 또 다른 무극수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나구나.’
상서로운 금빛 기운의 집합체였다. 이 거대한 황궁에 한 마리 용이 들어와 있는 듯, 그야말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리우는 한 명의 고수가 있었다.
존재감만으로도 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힘을 지닌 자.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자.
“설마?”
“이제 느껴지는가.”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말을 듣기야 했지만, 이렇게까지 대단해졌을 줄은 몰랐네.”
탁무자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비슷하지만 전혀 달라. 단순히 무극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품고 있는 힘의 성질 자체가 달라졌네. 하지만 또 묘하게, 이전의 힘과 분명한 연관이 있는…….”
“사신기(四神氣)가 황룡기(黃龍氣)로 발전한 것이겠지.”
“뭐?”
“황룡신왕공. 사신무의 계승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전설상의 경지라네. 황룡은 곧 무(武)의 해탈이자 신선지도(神仙之道)에 가까운지라, 그에 이른다면 이미 인간의 탈을 벗었다고 해도 좋네.”
“황룡신왕공이라니? 그렇다면?”
두 사람이 몇 개의 궁문을 지나 어전 인근에 도달했다.
잠시 후.
쿵!
저 멀리 어전으로 이어지는 궁문이 열리며, 한 명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열띤 회의를 하던 도중이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어떠한 기세도 발하지 않았지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일대에 자신의 기운을 퍼트렸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기운이 자연스레 공간을 장악한다. 엄청난 경지였다.
무허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저벅저벅.
빠르지만 여유롭게 걸어오는 청년의 몸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을 느끼는 그였다.
척.
이 장 거리 앞에서 걸음을 멈춘 연호정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흑제성의 성주 연호정이 소림의 권신을 뵙습니다.”
대화 한번 나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존재. 권신이라 불리는 무허대사의 존재감은 연호정으로서도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무허대사.
연호정이 웃으며 탁무자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눈인사로도 충분했다.
연호정을 보는 탁무자의 묘한 시선 아래.
마침내 무허대사가 입을 열었다.
“전쟁 때문에 한창 바쁜 사람을 불러내서 참으로 면목이 없소.”
“말씀 낮추시지요.”
“일파의 장문에게도 예를 취해야 함이 당연하거늘, 귀하는 흑도 연맹의 수장이오. 나이 하나 보고 하대할 만큼 녹록한 위치가 아니외다.”
“하면 편하신 대로…….”
“나아가.”
무허대사의 두 눈에 신광(神光)이 떠올랐다.
순간 연호정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위압감도 없고 위화감도 없다. 그저 한없이 깊고 깊어서, 스스로 기파를 발하기 전에는 존재감마저 느끼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두 눈에 신광이 번뜩이니, 천하의 연호정조차 온몸이 긴장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이것이 바로 권신(拳神)이다.
소림의 전대 방장이자 천년소림 역사상 손에 꼽힌다는 최고수.
당대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무인이며 주먹질 한 방으로 수십 장 밖의 악인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궁극의 권법가.
“삼백 년 전, 혈교지란을 종식시킨 중원의 영웅이자 위대한 고금제일인의 후예라면 배분만 따져도 우리가 고개를 조아려야 할 판이오.”
“……?!”
“다만, 주변의 눈이 있으니 이 정도 언행으로 관계를 정리하면 될 듯하오.”
“노선배님 말씀은…….”
“다시 인사드리겠소.”
무허대사가 고개를 숙이며 반장례를 취했다.
“소림의 무허가 사신무의 이십육 대 계승자를 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