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73)
1073화. 불과 얼음 (8)
이 시대 강호의 가장 어른이랄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예를 취했다.
연호정 역시 후배로서 예를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사신무의 이십육 대 계승자라는 무허대사의 말에 놀라 인사를 잊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제가 사신무의 계승자라는 것을 어찌 알고 계십니까?”
“허허.”
“혹시…… 사부님과?”
반장례를 푼 무허대사가 손으로 궁문 저편을 가리켰다.
“사람들 오가는 곳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구려. 잠시 걸으시겠소?”
* * *
황궁 안에도 숲은 조성되어 있었다. 황궁 자체가 어지간한 도시만큼 거대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중 세 사람이 향한 곳은 황궁 어전에서 제법 떨어진 곳으로,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울창한 대숲이었다.
“황룡을 발견했다고 하셨소.”
연호정이 무허대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과 다소 거리를 벌린 채 다가오던 탁무자 역시 귀를 열어 둘의 말을 들었다.
“지옥기(地獄氣)를 잡아 두고 있는 빈승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이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갑작스레 황룡의 기운을 느꼈다고 하셨지.”
“……!”
“그분께서는 인간의 탈을 반쯤 벗어 던진 분이셨소. 하지만 지나치게 세상 걱정을 하셨기에,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시고 속세를 전전하셨소.”
“…….”
“처음 뵈었던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소. 아, 천하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강호에는 모래알처럼 많은 기인이사가 숨어 있다더니, 그 말이 정녕 맞았구나.”
기인이사.
단순히 기인이사라는 표현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무극에 오른 천재는 천리(天理)를 읽고 전쟁을 막았으며, 너무나도 드높은 경지에 이르러 죽음마저 초월해 버렸다.
말하자면, 사신무의 이십오 대 계승자인 황룡제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그분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람처럼 세상을 보고 계셨지.”
“…….”
“그분이 이룩한 위대한 경지에 대한 놀라움이 잦아들자, 빈승은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소.”
“서글픔 말입니까.”
“그분은 미아가 되셨소.”
“…….”
“천리를 엿볼 수 있는 경지에 들었다면 응당 해탈하여 부처가 되어야 하오. 선도(仙道)식으로 말하자면 신선이 되어 이승을 떠야 했지. 한데도 그분은 속세에 발이 묶여 있었소. 천리를 알고도, 천리를 거부한 거요.”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연호정은 그런 상태의 스승을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스승은 언제나 완벽했다. 완벽한 사람이자 완벽한 무신(武神)이었다.
당대 천하제일에 가장 가깝다는 무허대사가 왜 스승을 보며 서글픔을 느꼈는지, 연호정은 그것이 궁금했다.
“무장 어른께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등선의 길을 거부하고 계셨소.”
“……!”
“이미 다 알고 계셨을 것이오. 삶이란 고통이라는 것을, 속세의 분란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좌절과 증오, 슬픔과 절망은 언제나 천하를 물들이고 있으리란 것을.”
“…….”
“빈승은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으나, 짐작할 수는 있소. 한 사람이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으로 그 영혼이 천도(天道)에 이르게 되면, 깨달음의 줄을 잡고 승천하는 것만 보이게 될 것이오.”
“…….”
“하지만 그분의 눈에는 이 세상이 보였던 것 같소. 절대적인 유혹 앞에서도 신음하는 만민을 보고 계셨소.”
무허대사가 눈을 감았다.
그는 신인(神人)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속세를 향한 걱정과 미련을 모두 버린 그는, 사람 형상을 한 귀신에서 진정 신이 되어 떠났다. 신의 얼굴은 본디 형태가 없는 법이었다.
“속세를 전전해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셨을 거요. 본인이 세상의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계셨소. 그런데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심과 애민(愛民)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 아니겠소.”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무허대사의 말만 들어 봐도 스승의 고뇌가 엿보이는 듯했다.
혈교의 후계자로 태어나 천리를 깨닫고 도리어 반기를 든 그는 만민의 고통을 제거하고자 전쟁에 참여했고, 이후 천하를 떠돌며 고통받는 이들을 구제하며 살았다.
하지만 신에 이른 무력으로도 혼자서는 분란을 없앨 수 없다. 슬픔과 증오, 절망과 회한을 없앨 수 없다.
그것을 다 아는데도 승천하지 못하고 삼백 년을 넘게 살았으니 이토록 가련한 짐승이 어디 있겠는가.
“빈승은 알고 있었소. 그분의 마음을 치료할 방법을. 사람에게서 받은 고뇌와 상처는 사람과의 인연으로 다독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
“하지만 당신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았소. 하여 지켜만 보고 있었소.”
연호정은 말없이 무허대사의 말을 경청했다.
무허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십여 년 전, 그분께서 다시 빈승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깨달았소. 저분이 짊어지고 있는 지옥의 기(氣)를 가져가자. 번듯한 제자도 키워 놨으니, 내가 할 일은 자아를 버리고 천하를 위해 살아온 무명의 협사를 위해 한 인생을 바치는 것뿐이다…….”
“…….”
“그리고 얼마 전, 그분은 또 다른 황룡을 만나러 가셨소. 수년 전, 신옥(神玉)이라는 신물이자 마물이 부서졌다는 말씀을 남겨 놓고.”
“……!”
“이후 빈승의 몸을 갉아먹고 있던 지옥기는 모조리 사라졌소. 그분께서 진정 세상과 하나가 되어 속세를 떠나셨다는 방증이지.”
무허대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연호정을 돌아보는 무허대사의 눈에, 놀랍게도 의혹이나 경계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빈승이 말하는 그분은 필경, 성주의 스승이 맞을 것이오.”
“……맞습니다.”
“그분은 평생 제자가 없었소. 그분은 거짓을 입에 담는 분이 아니오.”
“그런 분이시지요.”
“한데 떡하니 제자가 나타났소. 빈승은 성주의 기도에서 그분의 잔향을 느낄 수 있었소. 단순히 같은 무공을 익혀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만 전할 수 있는 깨달음의 실체가 그 안에 있었소.”
연호정은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혈옥이라는 마물의 도움을 받아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말하지 않아도 무허대사는 어떻게든 이해할 사람이라서 그렇다.
연호정의 생각은 정확했다.
“그분은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능력을 지니셨소. 아마 어떤 신묘한 방식으로 그대에게 사신무를 계승하셨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황룡을 보러 간다는 그 말씀은 곧, 성주를 보러 간다는 말이 분명하오.”
“오랜만에 뵈어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저 하늘 높이 올라가셨지요.”
무허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스승과의 재회는 어떠셨소?”
연호정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다시 뵐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분을 모두의 배려 덕에 만났습니다. 가시는 길 마지막까지 깨달음을 건네주고 떠나셨으니, 그 그림자는 죽을 때까지 저와 함께할 겁니다.”
“허허허.”
무허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장 어른께서 이토록 건실한 제자를 두셨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복을 내려 준 셈이오. 성주가 천하를 위해 불철주야 애썼다는 소문을 듣고 어디서 저런 걸물이 나왔을까 했더니만, 그분의 제자라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구려.”
그렇지 않다.
연호정이 지금처럼 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천인룡이라는 스승 하나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든든한 부친이 있었고 소중한 형제가 있었다.
세상에 나와 사귄 무수히 많은 전우가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었다.
그중 하나만 없었어도 연호정은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 무허대사조차도.
“감사합니다.”
“음?”
“대사님께서 스승님의 고통을 나눠 주셨기 때문에 다시 뵐 수 있었습니다. 저희 사제가 소중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는 대사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무허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무장 어른을 뵙지 않았다면 빈승 또한 소림의 학승(學僧)으로 남았을 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후대를 만나 가르침을 전했으니 새삼스레 고맙다 할 것도 없소이다.”
천인룡은 물론 탁무자나 황제와도 또 다른 깨달음을 보여 주는 무허대사.
비록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연호정은 무허대사에게서 스승의 그림자와 공공대사의 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구려. 면목이 없소이다.”
“아닙니다. 제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무허대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반 시진만 더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가능합니다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무허대사가 탁무자를 바라보았다.
탁무자가 피식 웃었다.
“가서 성주가 늦는다고 말해 놓도록 하지.”
“미안하네.”
“미안하긴 무슨.”
연호정이 탁무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회포를 풀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곡차나 한잔 드시지요.”
“진짜 회포는 이 사태가 마무리되면 그때 제대로 푸세나. 우리 같은 늙은이야 정해 주는 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지만, 젊은 자네는 무척 바쁠 걸세.”
“알겠습니다.”
“하면,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라네.”
무허대사와는 영혼의 단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탁무자다. 그는 무허대사가 연호정에게 시간을 내 달라고 한 이유를 아는 듯했다.
탁무자가 사라지고, 무허대사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연호정 역시 자연스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허대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빈승은 배운 적 없는 무공이지만, 무장 어른께서는 사신무에 대해 많은 걸 알려 주셨소. 하기야 그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만한 상대가 이 못난 땡중 하나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오.”
“…….”
“사신무의 구결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분의 깨달음 덕분에 크게 발전하여 이 경지에 오를 수 있었소.”
“그러셨군요.”
“그래서 알 수 있소. 그분을 뵙고, 보고, 느꼈기 때문에 지금의 성주가 황룡신왕공의 힘을 완전히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그게 보이십니까?”
하다못해 무공을 직접 보여 준 것도 아닌데 보인다고 한다. 연호정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바였다.
“황룡신왕공은 무공의 궁극으로, 그에 이르렀다면 무공으로 도(道)에 도달했다고 봐도 좋소. 하지만 성주 역시 그분처럼, 극에 이른 신기(神氣)를 무학의 파괴력으로만 끌어내고 계시는구려.”
“……!”
“듣기로 황룡기는 중단과 하단을 다스리고, 신왕기(神王氣)는 상단을 다스린다고 알고 있소. 상중하가 완벽하게 연마되어 온전한 빛으로 나아가니, 이것이 궁극의 무공이 아니면 무엇이겠소?”
우우우웅.
무허대사의 손에서 은은한 우윳빛 광채가 일었다.
깊고 성스러운 기운이었다. 어떠한 위세도 없이 그저 한없이 깊기만 했다. 보기만 해도 편안한 기운에, 연호정은 멍하니 그 손만 바라보았다.
“구결도, 깨달음도 모르지만 성주가 신왕기(神王氣)를 더 잘 다스리도록 유도하는 방법은 알고 있소이다. 빈승의 무공에도 그분의 깨달음이 녹아 있기 때문이오.”
“……대사님.”
“자, 이것이 바로 반야대능력이라오.”
무허대사의 손이 연호정의 이마에 닿았다.
번쩍!
새하얀 광채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