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74)
1074화. 불과 얼음 (9)
“별이 곱구나.”
차가운 공기가 연위의 목소리를 타고 비명을 질렀다.
허연 김이 흩어지며 부산을 떨어 댔다. 구름 뒤에 슬그머니 숨은 달빛이 보이지 않는 공기를 향해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서늘한 푸른빛. 연위의 검안(劍眼)이 달빛을 꾸짖자, 하늘이 조금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부끄러워하는군요.”
“음?”
“달 말입니다. 아버지가 노려보니까 이불 뒤로 숨는데요?”
연위가 피식 웃었다.
“어디서 괴상한 농담이나 배워 왔구나.”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회의 중일 때는 바빠서 회포도 풀지 못했던 부자였다.
연위가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건강해 보인다.”
“실제로 건강합니다.”
연위의 눈이 따스해졌다.
검은 무복에 질 좋은 전포를 입었다. 흑색 일색의 차림이지만 연위의 눈에는 아들이 태양보다도 빛나 보였다.
“속은 괜찮으냐?”
“예?”
“무림맹에 그 난리를 쳐 놓고 흑도 연맹의 수장이 되어 버렸는데, 막상 일을 치고 보니 애비 눈치 볼 일이 걱정되어서 속이 말이 아니었을 터인데.”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부자.
하지만 그들이 만나지 못한 사이에 엄청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의 주역은 바로 연호정이었다.
“상황이 그러한데 무슨 연락이냐. 솔직히, 이미 지난 일을 서신으로 접했는데도 내가 다 화가 나더구나.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일이 더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빈말이 아니었다. 연위는 공과 사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리고 세작이 있음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아마 연위는 가문 자체를 무림맹에서 이탈시켰을지도 몰랐다. 아들을 위해서이기도 했겠지만.
“무림맹에서도 공식적으로 사과문을 발송했더구나. 너와 상의를 할까 싶긴 했다만, 맹주님과 군사를 생각해 보니 어지간히 마음고생을 하셨을까 싶었다.”
“두 분이서 정말 고생이 많으시지요.”
“너는 괜찮은 것이냐?”
“아시잖습니까? 워낙 성질머리가 고약한 놈이라 마음에 남았으면 그 자리에서 난리를 쳤을 겁니다.”
아무 뒤끝이 없다는 말이다.
성질머리 운운했지만, 애초에 그 일은 세작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었다. 물론 그에 동조한 이들에게도 큰 문제가 있었으나, 일이 잘 해결되고 나니 되레 전화위복이 되어 무림맹 운용에 도움이 되었다.
그와는 별개로 연위는 연호정이 예전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흑도 연맹의 수장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차분함의 정도가 달랐다.
“그간 좋은 수행을 쌓은 모양이구나.”
“누구 아들인데요.”
연위가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젠 정말 이 애비는 상대도 안 되겠다.”
“엄살이 지나치십니다. 도끼 뽑는 순간 심검부터 날아올 텐데 무슨 수로 이깁니까, 제가.”
“아들에게 심검까지 써 가면서 이기려고 드는 애비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느냐. 그리고 말했지만, 이거 심검 아니다.”
“심검 맞습니다. 그리고 말이 아버지고 아들이지, 무사들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일단 이겨 놓고 봐야지.”
연위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아들의 말이 옳다. 아버지로서 아들이 자신을 넘어선다는 건 크나큰 기쁨이지만, 같은 무사로서 아들의 벽이 되어 막아 주는 것 또한 아버지의 숙명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서 하늘을 올려보았다.
오랜만에 봤지만 대화는 크게 필요치 않았다. 연위와 연호정 모두 일대 종사의 경지에 오른 절대자들이었다. 피를 나눈 혈육이기도 하니 말이 없어도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거기서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이리 오시구려.”
연위의 말에 궁문 앞 그림자에 숨어 있던 팽무강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분위기가 좋아서 말이오. 아, 나도 아들내미들 보고 싶다.”
“그렇게 욕을 하시더니.”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시오. 벽창호 같은 놈들이라도 내 자식인데 안 보고 싶겠소?”
“허허허.”
연호정이 팽무강에게 고개를 숙였다.
팽무강이 손을 저었다.
“아까 인사 다 했잖은가. 게다가 흑도 연맹의 수장이 일개 가문의 주인장에게 예가 과하면 그것도 문제야.”
“아닙니다.”
뜻밖에도 연위가 팽무강의 말에 동조했다.
“팽가주 말씀이 옳다. 네 어깨에는 수만의 흑도인들이 목숨줄을 올려 두고 있다. 오만해서도 안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예의를 차려 조직의 격을 떨어트려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팽무강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흑제성의 주인에게 인사를 받으니 기분이 제법 삼삼하구만. 사람들 없을 때는 한 번씩 고개 숙여 주게.”
“그간 워낙 불효를 많이 저질러서 이럴 때라도 아버지 말씀을 잘 들어야지요. 다시는 고개 숙이지 않을 겁니다.”
“애비랑 똑같다, 똑같아.”
그렇게 세 사람이 담벼락 밑에 모였다.
“회의는 끝났소?”
“그거야 아까 끝났지. 관리라는 것도 참 힘든 일이야. 회의 중에 졸도한 사람도 있더군. 잠도 못 자고 주변 정세를 파악했다나, 어쨌다나.”
“결과는 어떻게 나왔소?”
“결과라고 할 것 있겠소. 성주가 말한 대로 일단은 병력을 집결시킨 후 적을 정찰하는 게 우선이지. 경우의 수를 최대한 따져 대응하는 것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오.”
“그건 그렇소이다.”
“북부 무림의 문파들도 전쟁 준비에 들어갔고 무림맹에서도 수천의 병력을 차출하여 보냈다고 하니, 이제 정말 전쟁이 코앞이구려.”
“부디 너무 많은 피가 흐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그때였다.
“피가 많이 흐르진 않겠지. 싹 다 증발시켜 버릴 테니까.”
언제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새 담벼락 위에 기천웅이 나타났다.
달빛을 보며 걸터앉은 모양새가 참으로 운치가 있다. 흩날리는 금발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연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 추우시오?”
“추우면 이렇게 안 있지. 선선하니 좋구먼.”
가슴팍이 다 드러나는 헐렁한 옷에 맨발을 고수하는 그였다. 보는 사람이 더 추울 지경이었다.
기천웅이 연호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찰부터 하러 간다고?”
“그렇소.”
“혼자서?”
“그게 제일 낫지 싶소만.”
“신화일 확률이 높다 하지 않았나.”
“그렇소.”
“그렇다면 응당 나를 데리고 가야 하지 않나?”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흥분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어떻게 흥분하지 않겠나.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가겠지.”
“그럼 당연히 데려갈 수 없소.”
“중요한 것은 나를 잘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아니던가.”
“그건 그렇소만.”
“걱정하지 말게. 아들이 눈앞에 있어도 화가 날지언정 흔들릴 일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녀석들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야.”
맞는 말이었다. 정말 그가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정찰조에 기천웅을 데리고 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정말 자신이 있으시다면, 데리고 가겠소. 다만 이거 하나는 알아 두시오. 자칫 흔들려서 적들이 우리를 알아채는 순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질 거요.”
“내 목적은 분노가 아니야. 신화를 본래대로 되돌리는 것이지.”
담담한 목소리 안에 강인한 정신력이 돋보였다. 상단전에 문제가 있어도 특유의 정신력만큼은 누구 못지않다.
고개를 끄덕이는 연호정의 귀로,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퇴로를 끊고 적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고수의 존재가 절실해지기 마련이지.”
사람들이 기천웅의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같은 담벼락 위에 있지만, 기천웅은 걸터앉았고 모자선은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겨울의 여신(女神)을 방불케 했다.
“나도 간다.”
“안 돼.”
대답은 기천웅에게서 나왔다.
모자선은 기천웅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래도 되겠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두 분이서 계속 티격태격하지 않았소? 정찰조는 은밀해야 하오. 다투다가 적에게 발각되면 우리만 골치 아프오.”
기천웅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성주 말이 맞지. 다른 건 다 참아도 얼음과자가 옆에 있는 걸 참긴 힘들어.”
뜻밖에도 모자선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는 참을 수 있다.”
“……!”
“삼교는 우리가 싸워 없애야 할 적이야. 비록 본궁을 공격한 것이 광혈과 사음이라고는 하나, 때가 되면 신화의 병력도 우리 궁도들에게 큰 피해를 줄 것이다.”
“…….”
“성주의 명령대로 움직이겠다. 그러니 나도 데려가라.”
기천웅이 놀란 눈으로 모자선을 바라보았다.
모자선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한밤중에도 두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가운 분노. 고향을 버리고 도주한 수장의 증오심은 상극의 혐오마저 지워 낼 만큼 깊은 것이었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데리고 가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갈 기세군.”
“물론이다.”
“어쩔 수 없지. 같이 갑시다.”
연위가 연호정에게 말했다.
“정찰조의 조장을 맡을 생각이냐?”
“아무래도 제가 제일 낫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호정은 누구 못지않은 무력을 쌓았으나 그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실수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습과 은신의 경험도 많고 상황 판단력 역시 좋으니,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게 좋을 것이다.
“비아와 진양, 량이도 데리고 갈 참이냐?”
“이번 정찰만큼은 인원을 최소화하여 갈 생각입니다.”
“그래, 그게 맞겠지.”
“하면 언제 출발할 생각이냐?”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보아하니 오늘 밤에 출발하려고 나를 찾아왔구나.”
“떠나면 떠난다고 인사는 해야지요.”
“하여간, 그 무시무시한 추진력은 여전하구나.”
스르륵.
기천웅과 모자선이 연호정의 곁으로 내려왔다.
한 명은 흑도 연맹의 수장이고, 한 명은 떨어져 나왔다고는 하나 신화교의 주인이었던 사람이다. 남은 한 명 역시 신비 문파 북해빙궁의 궁주였다.
각 조직의 우두머리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정찰의 임무를 맡기로 했다. 어디에서도 이런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이번 전쟁이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신장들에게 말은 했느냐?”
“예. 했습니다.”
“태공께는?”
“낮에 끝냈습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빨리 나서겠다고.”
“그래, 잘했다.”
연호정이 저 멀리 궁벽 너머 서쪽을 바라보았다.
“이왕이면 사모(師母)의 존안이라도 뵙고 가고 싶은데, 한창 깨가 쏟아질 시기인 것 같아서 도저히 인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잘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다.”
양천과도 회포는 풀었지만, 회의장에서 짧게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다.
그는 죽은 황제의 부마로서 백관들의 회의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오랜 시간 강호를 떠돌며 배운 정치적 감각은 황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게다가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최초로 흑도 연맹을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무력만이 아니라 자금의 흐름에 대해 누구보다 빠삭하다. 자연스레 회의의 구심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길림에는 개방의 분타도 거의 없다. 무림맹 정보단 역시 그쪽 사정에 어두울 것이다.”
“괜찮습니다. 흑제성의 정보단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으니까요. 출발하겠다고 먼저 서신을 보내 놨으니 나름대로 준비가 끝났을 겁니다.”
“철두철미하구나.”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잖습니까.”
연위가 웃으며 연호정의 등을 두들겼다.
그는 더 이상 위험천만한 임무를 향해 떠나는 아들에게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잘 다녀와라.”
웃음으로 대답을 마친 연호정이 땅을 박찼다.
훅!
불과 얼음, 두 개의 날개를 단 호랑이가 서쪽으로 날아올랐다.
연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잘 숨겨 주기를.”
경고를 받은 달빛이 구름 속으로 완전히 숨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