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76)
1076화. 미끼 (1)
화살처럼 나아가는 두 사람을 보며 기천웅이 자리에 앉았다.
“후우.”
화정에서 끊임없이 진기가 흘러나왔다.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며 달린 상황이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쪽잠 정도는 자 두었지만, 천화에 이르러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화정술이 극에 이르면 이 정도 피로는 금방 날려 버릴 수 있다.
과거의 그라면 그랬을 것이다.
‘너무 혹사시킨 것인가.’
무공에 끝은 없다.
사람인 이상 무한한 힘을 발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대자연의 기를 끌어와 지극히 높은 밀도로 내기를 형성하는 천화경은 분명 일인 군단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힘을 선물 받는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결국 나의 미래를 죽이며 현재를 사는 것인데.’
폐관 후 기천웅은 깨달았다. 화정술이 지닌 폐해를.
화정술은 인간을 불처럼 만든다.
불은 뚝 잘라 내도 순식간에 크기를 불린다. 그러한 불처럼, 화정술을 연마한 사람은 시간이 걸릴지언정 잘려 나간 신체도 재생시킬 수 있다.
당연히 목이 날아가거나 오장육부가 박살 나 버리면 화정으로도 복구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잘린 뼈까지 재생이 된다는 건 화정술이 이 세상의 섭리를 깨부수는 술법이란 소리다.
그것이 문제였다.
‘섭리를 건드려선 안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내공을 연마하여 초인의 영역에 올라 신과 같은 무력을 구사하는 무극수의 존재도 누군가의 눈에는 섭리를 벗어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氣)가 지닌 특성, 즉 이 세상을 구성하는 힘의 흐름에 반하지 않는 행위였다.
화정술은 힘의 흐름을 비튼다. 그리고 흐름을 비틀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연기가 아니라 내 몸의 일부를 깎아 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즉 등가 교환이다. 화정술은 시전자가 알지 못하게, 극히 미세하게 육신의 일부를 앗아 간다.
원정지기를 앗아 가는 게 아니다. 원정지기가 줄어들면 생명력 그 자체가 줄어든다. 그런 면에서 화정술은 역시나 놀라운 술법이었다.
대신 신체 곳곳에 구멍을 만든다.
기천웅이 욕심을 내다가 상단전이 회복 불가능한 지경까지 망가진 것처럼.
누군가는 사지 중 하나의 신경이 점점 죽어 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뼈가 괴사하여 화정의 회복력으로도 치료가 안 될 수가 있다.
지금껏 그 폐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노환이나 병으로 죽은 신화교도가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신화교도들은 나이가 찰 때까지 죽지 않으면 대부분 혈육이나 친분 있는 사람에게 화정을 건네고 소멸한다. 전투로 사망하는 이들은 애초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랍긴 하지만.’
나이가 들고 싸울 일도 없는데 몸이 하나씩 고장이 난다?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된다. 늙어서 몸이 고장 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혼(魂)이 부서진다면 어떨까?
‘모두가 나와 같을 것이다.’
몸이 고장 나는 걸 넘어 죽어도 혼백이 찢겨 날아간다.
진짜 문제가 그것이다.
신화교 역사상 기천웅 나이만큼 산 사람은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세 사람은 화정이 완성되기 전 세대의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둘은 화기가 역류하여 미쳐서 발광하다가 온몸이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기천웅은 그것이 무리한 연성으로 인한 주화입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폐관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화정술 자체가 지독한 마공에 가까운 술수라는 것이다.
혼(魂)은 실재하는 개념이다. 당장 광혈교는 이혼대법으로 불사를 손에 거머쥐려 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우리는 실패했다.’
화정술을 일정 이상의 경지까지 익힌 사람의 끝은 혼의 파멸로 이어진다.
기천웅 역시 폐관 중 무공의 발전과 함께 화기의 역류로 혼이 파열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막았다. 대신 상단전에 깊은 화상을 입었다.
그 이후 화정의 힘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이 다행이었다. 그의 화정은 조금씩 조금씩 그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본래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공을 익히기 전의 상태로.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잃는 속도가 빨라지겠지. 그 전에 끝장을 내야 해.’
화정이 곧 생명력인 그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 길어야 오 년, 아니 삼 년 정도일까.
그래도 기천웅은 웃을 수 있었다. 인생의 마지막, 선대부터 내려온 맹목적인 대륙 정벌의 의지를 버리고 나의 터전을 올바르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으니까.
그거면 된 것이다.
‘황제 녀석은 좋겠군.’
화정이 원정지기와 동화되는 구결을 제거하고 알려 주었다. 거기에 자신의 기까지 받았으니, 무공을 익혀 고수가 되긴 어렵겠지만 혼도 그대로일 것이요, 수명도 크게 늘 것이다.
‘하긴, 수십 년간 피눈물을 쏟으며 살았으니 이 정도 선물은 받을 자격이 있지.’
우우우웅.
화정을 진정시킨 기천웅이 산자락을 힐끔거렸다.
어느새 연호정과 모자선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빠르기도 하네. 역시 젊은것들은 달라.”
* * *
산 정상에 다다라 커다란 바위 위에 오른 연호정이 엎드려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모자선은 굳이 엎드려야 하냐는 듯 연호정을 보았지만, 결국 그녀도 옆에 엎드려야만 했다.
“많군.”
산 밑에 진을 치고 있는 적병이 보였다.
높은 산이 아니었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안력으로도 적 개개인의 기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다만 전체적인 숫자와 한데 모여 형성된 고요한 군기(軍氣)는 확인할 수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야.”
일천 이상이라는 추측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족히 오천 병력은 되어 보였다. 삼교 하나하나가 중원 무림과 거의 대등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극히 적은 숫자지만, 한 명 한 명이 무공을 익힌 자라고 생각하면 결코 적다고 보기 힘들었다.
‘상당해. 어우러진 군기가 칼 같다.’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군기, 그리고 화기.
최정예까지는 아니지만 어중이떠중이를 보낸 것도 아니었다. 초전에 어울리는 병력을 보낸 셈이었다.
‘아마 무극수 하나 정도는 있을 거다.’
저만한 병력을 이끌고 초전을 치르려 하는데 무극수를 넣지 않았을 리가 없다. 놈들도 초전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다.
“괜찮을 것 같군.”
“뭐가 말이오?”
“상당한 전력이지만 우리만으로도 어떻게든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실제로 성천의 일인은 대문파 하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전력을 지녔다. 연호정과 모자선, 거기에 기천웅까지 합세한다면 저 병력과 부딪쳐 보는 것도 아주 터무니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되오.”
“왜지?”
“놈들이 창칼만 들고 찾아왔을 리가 없소. 우리가 모르는 병기를 쥐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건 부딪쳐 보면 아는 것이야.”
“결정적으로, 스스로의 힘을 너무 과신하지 마시오. 이 경지에 오른 자들이 하나같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일격에 수십의 고수를 찢어발길 수 있는 힘을 지녀도 제대로 뭉친 적들과 붙으면 생각만큼 싸우기가 쉽지 않소.”
“과연 그럴까.”
“진법이나 기관진식을 포함, 대고수전(對高手戰)에 특화된 술수는 무수히 많소. 전략을 세워 돌격하는 적들과 정면 대결을 벌이다가 누구 하나라도 죽으면 우리는 커다란 패를 잃고 마는 거요.”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고, 사실이기도 했다.
과거 흑암제 시절, 연호정은 무섭게 발전하는 무공에 강한 자신을 갖고 홀로 사음교의 부대 하나와 싸운 적이 있었다.
숫자는 삼백에 정예였지만, 전투 경험도 많고 자신감이 가득한 연호정의 눈에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로 보였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연호정은 적을 오십 명밖에 죽이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무극수도 당할 독탄이나 화약 병기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기괴한 진법 하나와 커다란 방패만 들고 싸우는데, 이상하게 뚫리지가 않았다.
사음교가 그러했다면 신화교, 나아가 광혈교 역시 나름의 비기들을 보유했을 것이다. 전쟁이라고 무극수들만 우르르 몰려가 싸우는 게 전부가 아닌 이유였다.
“저놈들에게도 그만한 실력이 있을까?”
“그건 모르지. 하지만 삼교 놈들도 많은 무극수를 보유하고 있소. 당연히 무극수를 상대하는 방법도 발전했을 거요.”
사람은 죽지 않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든 대비책을 만든다. 그 치열한 고뇌와 광기 앞에서는 무극수라도 별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코웃음 치다가는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 나간다.
이래서 전쟁을 모르는 자들이 용감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건 전쟁이오. 마냥 여유를 가져선 안 되지만, 너무 급할 필요도 없소. 심지어 적은 신화교 하나가 아니외다. 전국(全局)을 관망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소.”
“그렇군.”
“내가 직접 온 이유이기도 하오.”
모자선은 자신과 놈들이 상극이니, 그래도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정도는 여기서 놈들의 동태를 살펴야겠군.”
바위에서 내려온 연호정이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모자선도 주섬주섬 일어나 그의 옆에 앉았다.
“그대는 이런 류의 경험이 많은 모양이다.”
“뭐 남들만큼은.”
“젊은 연배에 어디서 그런 경험을 쌓았지?”
“말해 줘도 못 믿을 거요.”
모자선의 눈이 깊어졌다.
“그대도 이 경지에 올랐으니 알고 있겠지. 우리는 자칫 잘못하다간 나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무극무한, 인간이 반선(半仙)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경지.
인간임에도 인간이 아니게 되어 버렸으니 당연히 보는 눈도, 듣는 귀도, 피부의 감각도, 나아가 생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 경지는 인간이 올라선 안 될 땅이야.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조막만 한 머리로는 혼돈의 힘을 이해할 수가 없지. 그래서 광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자주 일삼지.”
“알고 있소.”
“나는 끊임없이 그 폐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대도 그러한가?”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딱히 그랬던 적은 없지만, 일생의 목표가 하나뿐이라 예전과 달라진 게 없소.”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의 목적의식은 광기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것이로군.”
“미치긴 했지.”
모자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 또 한 번 스스로를 잃을 뻔했다. 그대가 막아 주지 않았다면, 정말 비탈길을 타고 내려가 저들과 붙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한 거야.”
“그대 말이 맞아. 이 경지에 진입한 이들은 머리를 잘 써야 한다.”
모자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한숨. 허연 연기가 뿜어졌다.
“천지를 뒤흔드는 힘을 지니고도 미치광이가 되어 버릴 운명이라니. 반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군.”
“우리는 반선 따위가 아니오.”
연호정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우리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힘이 센 무사일 뿐이오.”
“…….”
“그걸 망각하는 순간 미치는 거고, 전쟁에서 지는 거요.”
이틀 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적 병력을 보며 철수하려던 그때.
요녕성 남서부에 위치한 흑제성 정보부 소속 정보원이 다급히 뛰어왔다.
“성주님! 급보입니다! 서북쪽에서 마인 오천 병력이 남하하고 있답니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광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