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77)
1077화. 미끼 (2)
“…….”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빠졌던 연위는, 문득 느껴지는 불길함에 눈을 떴다.
‘뭐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이라고 해 봤자 숲에 불과하지만, 그의 눈은 황궁 일대를 훑고 있었다.
‘별일 없는 것 같은데.’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고수가 될수록 오감이 좋아지고 나아가 기감 역시 극단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 자체는 옳다. 하지만 감각이 발달한다고 하여,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전부 인지하지는 못한다.
고수도 사람인바, 어느 한구석에서 특이한 기세가 일어나면 자연스레 집중이란 걸 하게 된다. 그 집중이 깊어질수록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간 감각은 둔해지기 마련이다.
실력 좋은 살수가 정면 대결로는 상대도 안 되는 고수를 암살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은 무극에 이르러도 마찬가지였다. 더 멀리 보고 더 세밀하게 볼 수 있을 뿐,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상시 알아챌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느 하나에 강하게 집중할수록 고수의 감각도 하수처럼 내려갈 수 있다.
연위는 조금 달랐다.
연호정처럼 연가의 오대신공을 전부 익혀 연가신단, 나아가 광명신단을 연성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검극사기라는 신공 하나만을 극한까지 연마한 무인이었다.
하나의 길을 뚫고 또 뚫어 심검이라는 위대한 경지까지 넘본 그의 상단전은 성천의 고수 중에서도 단연코 제일을 논할 만했다.
거기에, 황궁에 들어와 수련을 거듭하고 검선 탁무자와의 논검으로 깨달음을 정비한 지금의 그는 무극수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불가해한 능력을 손에 넣었다.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지금 이런 곳에 앉아서 수련 따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훅.
천종운행비로 숲에서 벗어난 연위는 순식간에 무허와 탁무자가 있는 곳으로 왔다.
“음? 연가주?”
탁무자가 연위를 반갑게 맞았다.
“한창 수련하고 있을 시간 아니었나? 이 곰팡내 나는 곳엔 어인 연유로 오셨는고?”
“아, 그것이…….”
연위는 탁무자와 무허대사의 얼굴을 살폈다.
두 사람 역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무허대사는 한창 탁무자의 상단전을 다스리는 중이었고, 탁무자 역시 본인의 상단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위가 입을 열었다.
“뭔가 불안합니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탁무자가 껄껄껄 웃었다.
“십 년만 더 연마하면 중원의 검신(劍神)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그 무슨 실없는 소리인고?”
“죄송합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지만…… 왠지 불안해졌습니다.”
웃음을 터트렸던 탁무자는, 연위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점점 표정을 굳혔다.
“불안하다고?”
“그렇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한창 명상 중이었는데, 문득 아들에게 생각이 미쳤습니다. 아들을 생각하다가 이 전쟁을 떠올렸고, 그 즉시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
단순히 이번 전쟁을 향한 걱정 때문에 불안해서 온 게 아닌 것 같았다.
연위는 위대한 검사다. 당장 탁무자 역시 상단전이 온전했다 한들, 실검(實劍)으로 이길 자신은 있어도 깨달음으로는 이길 자신이 없는 불세출의 검객이 연위였다.
탁무자가 무허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냥 넘기기 힘들 것 같은데?”
무허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불완전하나, 당대 중원에서 연가주만큼 심검지도(心劍之道)를 깊게 연마한 사람은 없을 걸세. 가주의 성품을 생각하면, 이는 절대 그냥 넘겨서는 안 될 일인 듯하군.”
그야말로 만인이 입을 떡 벌릴 만한 칭찬이었지만 연위는 부끄러워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그런 내색을 보이기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가는 이 불안감이 너무 신경 쓰였다.
무허대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불안감, 혹여 이 황궁을 향해 있는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가…….”
“전쟁을 떠올렸더니 불안감이 치솟았다고?”
“그렇습니다.”
무허대사의 눈이 번뜩였다.
가만히 연위의 말을 듣고 있던 탁무자가 입을 열었다.
“내, 도사면서도 점복(占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네. 도가신공이나 불가의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타고난 신기(神氣)로 앞날을 예견하거나 과거를 읽어 내는 점복술사들은 실제로 존재하네.”
“…….”
“연가주의 상단전은 감히 천하제일을 논해도 무방할 지경이라네. 잘 통제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불완전하다면, 본인도 모르는 무언가를 예견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저잣거리에 나도는 야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지만, 실제로 상단전이 거대해지고 신기(神氣)가 제멋대로 날뛰면 귀신을 보거나 과거, 혹은 미래를 저도 모르게 예지하는 경우가 있다.
다만 상단전이 거대하게 타고나면 성인이 되기 전에 미치거나 죽는 게 보통이다. 하여 탁무자가 언급한 점복사들은 고금을 통틀어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연위라면.
인간이 손에 넣을 수 없는 궁극의 무도를 손에 거머쥔 희대의 검사라면.
“……불가능하지 않겠지.”
무허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태상에게 가 보세.”
양천은 당금 황궁의 핵(核)이었다.
황제의 부마라서가 아니라 지닌바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모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무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세 사람이 양천의 거처로 향했다.
“음?”
잠시의 휴식 시간.
이제는 어색함이고 뭐고 다 사라진 내자, 청화공주와 후원을 거닐고 있던 양천이 고개를 들었다.
경공으로 날 듯이 뛰어온 연위가 재빨리 땅으로 내려서며 고개를 숙였다.
“태상을 뵙습니다.”
황궁에서 불리는 공식적인 호칭도 없다. 그런데도 양천은 당대 황궁의 핵심 인사가 되었다.
시작은 공주와의 혼인으로, 지금은 그 자신의 능력만으로.
다만 결국 이렇다 할 직책이 없어, 모두가 그를 태상이라고 불렀다. 당대 흑제성의 태상.
양천이 포권을 취했다.
“연가주.”
연위가 양천 옆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공주의 신분인데도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키가 거의 양천에 육박할 정도로 크며, 팔다리도 시원시원하게 뻗었다.
중년의 나이인데도 얼굴만 보면 삼십 대도 안 된 것처럼 보인다. 오랜 시간 무공으로 연마된 육체와 내공으로 세월을 뛰어넘는 미모를 발산하는 여인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바로 청화공주, 죽었다고 알려진 황제의 여섯 번째 딸이자 황제의 자식 중 제일 괴짜라 불리던 여인이었다.
청화공주가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연가주님 오셨군요.”
“급한 일이 있어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청화공주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림의 거물들이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연위의 양옆으로 어느새 무허대사와 탁무자가 내려섰다.
양천이 헛기침을 했다.
“일할 시간에 신혼을 즐긴다고 타박하러 오신 거라면 오해십니다.”
탁무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설령 그렇대도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만한 입장은 아닙니다. 한낱 도사에 승려일 뿐이지 않습니까.”
황제의 자식과 혼인을 치렀으니 자연스레 존대를 해야 한다. 그것은 백수를 코앞에 둔 무허와 탁무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문으로 다녀 주십시오. 저야 상관없지만 내자가 한번 화를 내면 소림과 무당이라도 싹 날아갈 수 있습니다.”
청화공주가 얼굴을 붉혔다.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궁합이 참으로 잘 맞는 모양이었다. 불처럼 화끈하고 괄괄한 성품으로 유명했지만, 삼생의 정인 앞에서는 그마저도 별수 없는 법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정말 보기가 좋았다. 심각한 일로 찾아왔음에도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래, 무슨 일로 세 분이서 이 사람을 찾으셨습니까?”
“그것이…….”
탁무자가 연위를 힐끔거렸다.
연위는 자신이 느꼈던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청화공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연위가 위대한 고수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한 고수가 그냥 불안하다고 이렇게 찾아오다니?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양천은 달랐다.
“그 불안감, 확실하오?”
“그렇습니다.”
양천이 무허대사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가주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무허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기별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황궁 일대에 관해서는 황궁의 정보력이 가장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하북 일대를 수색하라 명을 내려야겠습니다.”
청화공주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지아비가 된 양천의 능력과 안목이 누구보다도 출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능력 앞에, 나이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환갑이 넘었음에도 드높은 경지로 사십 대 중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수명조차 자신보다 길지 모른다. 그만큼 위대한 무인이라 할 수 있으니, 무(武)를 숭상하는 그녀에게 있어 이만한 배필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대도 불안감 하나 때문에 황궁의 정보부를 닦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청화공주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여보.”
양천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연가주는 내 제자의 부친이기 전에 나 못지않은 무공을 연마한 초인(超人)이오. 게다가 심검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불안감은 통상 우리가 느끼는 것과 질이 다를 것이오.”
“그, 그렇군요.”
“상황이 또 바쁘게 돌아갈 것 같구려. 간간이 들르겠소.”
놀라서 양천을 보던 청화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사내든 여인이든, 일이 바쁘다고 집에 들르지 않으면 그 가정의 끝은 좋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힘들어도 항상 집으로 돌아오세요.”
청화공주의 야무진 말에 양천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리 어여쁜 내자를 두고 일이나 제대로 될까 싶소. 일각의 여유만 생겨도 달려오리다.”
정략으로 맺어진 사이라지만 서로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배필이다. 양천 같은 성격을 감당할 만한 여인은 많지 않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탁무자가 장난스레 말했다.
“가정에 화목이 그득하니, 보는 수행자들도 부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무허대사가 핀잔을 주었다.
“태상과 공주님을 면전에 두고 그 어인 망발인가. 이 말코가 나이를 먹더니 아주 고약해졌도다.”
“이 늙은 말코의 주책맞은 말이 오히려 두 분께는 더 없는 칭찬이 될 것이네. 안 그렇습니까?”
양천과 청화공주는 부끄러워할 뿐, 기분은 좋아 보였다.
“자, 일단 움직이시지요.”
그때였다.
저 멀리 무공을 익힌 누군가가 이곳 양천의 거처로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원칙적으로 궁내에서는 신법은커녕 뛰어다니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나라에 난이 터지는 정도의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수위 무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양천이 말했다.
“들어오라.”
곧바로 문이 열리고, 황궁수비대 무사가 들어와 부복했다.
“태상과 공주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인가?”
“급보입니다! 현재 섬서 북단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만 기병이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답니다!”
모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시작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