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79)
1079화. 미끼 (4)
“뭐지?”
감숙에서 사천으로 넘어가려 했던 막원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도인 난주를 막 지나려는 무렵, 동쪽에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충천하는 검기, 흉흉한 기세였다.
하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이 발산하는 기파는 정대하기 그지없었다.
화향의 얼굴에 긴장이 기색이 떠올랐다.
“또 뭘까요? 적일까요?”
“아니, 적이 아니다.”
천효락의 눈이 번뜩였다.
“무림맹에 있을 때 접했던 어떤 기운과 비슷해. 그 기운은 아마도…….”
“공동파다.”
막원이 백뢰창을 어깨에 걸친 채 그들 앞으로 나섰다.
“공동파의 도사들이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다들 정예 같은데…… 무슨 일이지?”
이쪽을 만나러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기세가 제법 다급했다.
강호에 우연은 없다는 말이 나돌지만, 이건 정말로 우연일 것이다. 막원의 생각은 그러했다.
우우웅.
막원이 천무신병기를 운용했다.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기파. 소현립과의 전투로 아직 불안정했지만, 그 기파에 숨은 강력한 힘은 그대로였다.
선두에 선 도사가 달리는 방향을 조정했다. 막원 일행을 향해서였다.
잠시 후.
히히히힝!
앞발을 들어 올리며 투레질을 하는 말들.
그 숫자가 족히 오백을 헤아렸다. 하나같이 명정한 검기를 뿜었다. 일대제자 대부분을 끌고 온 모양이었다.
“그대는?”
그들의 선두에는 거친 수염의 초로 사내가 있었다.
막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 막원이오.”
“설마 백병신군?!”
“그렇소.”
단숨에 말에서 내린 초로 사내가 포권을 취했다.
“공동의 초검자가 신군을 뵙습니다.”
공동파의 초검자라면 장로 서열 두 번째로, 지닌 검기(劍技)만큼은 장문인 대(代)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일대 검호였다.
막원이 짧게 예를 취하곤 물었다.
“무슨 일이오?”
“급보입니다. 감숙 북쪽에서부터 오천에 달하는 마인이 남하하고 있다 합니다.”
막원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마인?!”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삼교 중 하나인…….”
그때였다.
초검자의 눈이 막원의 뒤에 시립한 천효락과 화향의 기세를 읽었다.
“……마인?”
치리리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발검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초검자 역시 제자들의 발검에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막원이 손을 들었다.
“이들은 아군이오. 무림맹에 들어왔던 신마림의 후예로, 마선 혁련휘의 아들과 그의 호위외다.”
초검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증명할 수 있습니까?”
굉장히 날 선 반응이었다.
막원은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증명할 만한 방법은 없소이다. 다만, 흑제성주의 의형인 나의 보증으로는 부족하겠소?”
사실 백병신군의 별호만으로도 증명은 충분하다. 하지만 막원은 굳이 흑제성주를 끌어들였다. 당금 무림에서 연호정이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아아악!
검사들이 뿜는 군기가 조금 흐트러졌다.
안 그래도 자존심 강하고 성정이 불같기로 유명한 공동파다. 게다가 과거, 등천교 장문인이 세작에게 희생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무림맹 일에 깊게 관여하지 않았던 게 그들이었다.
하지만 흑백무제 연호정이 얼마나 애를 쓰며 천하를 떠돌아다녔는지는 감숙 땅에도 충분히 알려져 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연호정은 은인이었다. 등천교가 세작이 아니라 세작에게 이용당했다고 증언한 사람이 그였으니까.
물론 당시에 그 정보를 주도한 것은 제갈문호였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일을 제대로 파고든 것이 연호정이었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다 알았다.
다만 등천교의 제자를 시비 좀 걸었다고 박살을 내 버린 사건이 있었으나, 그거야 세작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동파도 그 정도 융통성은 있었다.
결과적으로, 공동파 역시 흑제성주 흑백무제 연호정이라는 이름 앞에선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다는 것.
가만히 천효락과 화향을 번갈아 노려보던 초검자가 한숨을 쉬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도사들이 일제히 납검했다. 그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제대로 훈련된 검사들인지 알 수 있었다.
막원은 나직이 감탄했다.
“발검과 납검만 봐도 검사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지. 험한 공동산의 기세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하더니, 저토록 섬세한 검기(劍技)를 지녔을 줄은 정말 몰랐소.”
상황이 다급했지만 성천의 신군이 진심으로 감탄해 주는데 기분이 나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검자가 애써 무뚝뚝하게 말했다.
“흑제성주의 의형분이자 성천의 일인이시니, 결코 거짓이 아니라 믿겠습니다.”
“절대 거짓이 아니오. 그리고 우리는 그대들을 이해하오. 중원 무림이 세작으로 몇 차례 몸살을 앓은 데다 상황도 좋지 않으니 당연한 반응이라고 보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막원은 생각보다 훨씬 풍부한 언어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말 몇 마디로 초검자와 도사들의 기세가 한층 잠잠해졌다.
“이것 하나만 확실히 합시다. 이들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현재 마선 휘하의 마인 중 아군이라 할 만한 이들은 이 둘뿐이오. 나아가, 여기 천효락 공자의 누이 되는 사람이 광혈에 납치된 상황이라오. 만에 하나 다른 마인 무리가 아군이라 외친다면, 우리보다 깐깐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오.”
초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군의 걱정 어린 말씀,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그나저나 오천의 병력이라면 손이 부족할 듯싶은데, 우리라도 도와야 하지 않겠소?”
“신군께서 도와주신다면야 천군만마와도 같은 힘이 될 겁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못한 쪽은 또 있습니다.”
“음?”
“섬서에서도 적의 병력으로 예상되는 기병들이 남하하고 있습니다.”
“기병?!”
“그렇습니다.”
공동과 화산, 종남은 그들의 앞마당이기에 보다 세밀한 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
“섬서에서 남하하는 기병들의 숫자만 일만입니다. 하나같이 마갑을 두르고 흑색창을 든 채 진군하는 이들인데, 지닌 창술이 단순하나 벼락처럼 빠르다고 합니다.”
순간 막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흑색창에 단순하고도 빠른 창술이라 하였소?”
“그렇습니다.”
그가 떠올린 것은 바로 소현립이었다. 흑색 장창이야 아무나 들 수 있다지만, 거기에 단순하고도 빠른 창술이라는 게 걸렸다.
게다가 하필 소현립과 겨룬 것이 얼마 전이었다.
이 사건이 단순히 우연일까?
막원은 침착하게 물었다.
“공동만으로 괜찮겠소?”
“감숙에는 공동만 있는 게 아닙니다. 중원 중부보다 수는 적지만, 척박한 감숙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전한 문파들의 무공은 중부 이상입니다.”
자부심이 넘치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직 연락이 오진 않았지만 사천 무림에서도 이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것입니다. 청성과 아미, 당가가 있으니 병력을 차출해 보낼 겁니다. 실제로 사람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막원이 천효락과 화향을 돌아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천효락이 담담하게 말했다.
“무인을 강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실전이라 하였습니다.”
중왕마공의 십단공을 뚫고 강력한 무공을 손에 쥔 그였다. 실전으로 이 무공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화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주인이 가는 곳이라면 지옥 끝이라도 쫓아갈 사람이었다.
막원이 초검자에게 포권했다.
“우린 섬서의 기병들을 막으러 가 보겠소. 무운을 비오.”
초검자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신군의 앞날에 무운을 빕니다.”
오백 검사들이 마상에서 포권을 취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 기백만으로도 충분한 인사가 되었다.
그렇게 공동파는 난주를 넘어 북부로, 막원 일행은 섬서로 방향을 틀었다.
중원에 이는 바람이 점점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 * *
“사백조님!”
“걱정하지 말아라.”
의복을 갖추고 수염까지 말끔하게 잘라 낸 화검자는 백 세를 넘은 나이임에도 어떤 젊은이 못지않았다.
“죽지도 않고 백 년을 산 몸뚱이다. 천존께서 이 늙은이가 지은 죄가 커 데려가지 않는가 싶었거늘, 이런 순간을 위해 남겨 두었는가 싶다.”
“죄, 죄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화산의 중진들은 화검자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 한들, 전전대 대장로이자 무림의 가장 큰 어른의 참전을 막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화산파의 장로, 용건진인이 말했다.
“사백조님의 무공은 당대 화산 제일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일선에서 물러나셨으니, 이번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실제 화검자의 무공은 대장로직을 맡았던 당시에도 장문인보다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록 무극에 이르지 못했고 나이도 많이 먹어 체력적인 문제는 있을지 모르나, 지닌바 깨달음과 내공력만큼은 여전히 화산 제일이다. 아니, 내공량 하나만 따지고 보면 성천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을 터이니.”
“예?!”
“이 대(二代)가 차이 나는 연배다. 내 무공이 어떻든, 함께 참전한다면 너희가 나 때문에 제 일을 못 하지 않겠느냐. 나 신경 쓰느라 잘 벼려진 매화검을 엉뚱한 곳으로 겨누지 말고, 아무 걱정 없이 외세를 막도록 하거라.”
“사, 사백조님!”
그때, 한 명의 노도인이 나타났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너희는 너희 할 일을 하거라.”
용자 배 도사들이 노도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태사백님을 뵙습니다.”
“이놈들, 인사할 정신도 있고 아주 여유롭구나. 자칫 섬서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할 수도 있다. 우리 신경 쓰지 말고 당장 움직이도록 하거라!”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용자 배들을 쫓아낸 노도인, 목양진인(木陽眞人)이 화검자를 향해 툴툴거렸다.
“사부님께서는 꼭 가셔야겠습니까?”
목양진인은 화검자의 제자로, 전대 대장로직을 맡았던 화산의 또 다른 어른이었다. 사제가 똑같이 대장로직을 지낸 셈이었다.
화검자가 피식 웃었다.
“이놈아, 그럼 다 늙어서 죽을 날 받아 놓은 늙은이가 이럴 때 움직여야지, 뒷방에 틀어박혀 죽이나 퍼먹어서야 쓰겠느냐.”
“아, 진짜 난감하네. 나이를 그렇게 잡수셨는데도 어째 이리 제자를 피곤하게 하시는지요.”
“너는 대체, 이제 팔순을 코앞에 둔 녀석의 말투가 아직도 그렇게 경박한 게야?”
“사부님 앞에서나 이럽니다. 저도 사문의 큰 어른이라 배 내밀고 다녀야 해요. 그게 얼마나 불편한지 아십니까? 요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알고말고. 나도 그렇거든.”
두 사제가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목영아.”
“예, 사부님.”
“너와 사형제들은 화산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켜야 하는 것은 정신이지, 건물이나 무공 비급 따위가 아니라고.”
스르륵.
저 멀리,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노도인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목자 배로, 화산의 전대 인물들이자 화검자의 사질들이었다.
“젊은이들이 저리 열성적으로 날뛰는데 늙은이들도 힘을 보태야지요.”
“사부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이놈아.”
“대신, 저놈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우리끼리 갑시다. 노환으로 뒈진 놈, 칼 맞아 죽은 놈, 수행하다가 잠적한 놈 제외하고 다 찾아보니 저까지 여섯입니다.”
“오냐, 너희 마음이 그렇다면 어디 늘그막에 마지막 칼춤 한번 춰 보자.”
“거봐요. 제가 누굴 닮았겠습니까? 백 살 넘도록 사시는 분이 말투가 대체.”
“시끄럽다, 이놈아.”
그렇게 화산의 일곱 노검사가 하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