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82)
1082화. 격전의 서막 (2)
“여기만 지나면 괜찮아진다.”
모자선의 말에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창에 가까운 땅이라지만 고수의 신법이라면 무리 없이 건널 수 있다.
하지만 함께 온 병력이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서두를 수는 없었다. 병력 모두가 무공을 익혔지만, 강호 명문의 후예들만큼은 아니기에 다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끌고 온 일천의 병력은 특수하게 제작된 황궁제 경갑을 입고 있었다. 가볍고 질이 좋은 경갑은 무림의 제철 기술로도 비비기 힘든 수준이었다.
묵비는 뒤를 돌아보았다.
호흡이 거칠어진 병사들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도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대단했다.
‘확실히 뛰어나.’
무림맹 정예에 비하면 실력이 처질 수밖에 없지만, 황궁의 제영사(帝影士)는 기습과 특작에 능한 부대였다.
특히 황궁에서 발명한 소형 화포와 각종 병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이들로, 수준 높은 은신술도 배웠기 때문에 제대로 된 환경에서 싸운다면 뛰어난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틀. 주둔한 적병이 서서히 치고 들어왔다면 하루 한나절까지 거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곳 요녕성에도 흑제성의 정보원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적에게 뒤통수를 맞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방심해선 안 돼.’
연호정과 함께 멸사군을 이끌고 온갖 전투를 치러 본 그녀였다. 특히 초반, 흑도 문파들을 깨부수러 다닐 때의 경험이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전술적으로 봤을 때, 흑도 문파는 백도 문파보다 싸우기 힘든 면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자존심이라는 게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저질렀으며, 덕분에 정찰과 정보를 운용하는 데에 있어선 누구보다 뛰어났다.
적에게 걸려 멸사군 특유의 기동 전술을 써먹지 못했던 적이 열 번도 넘었다. 그 뛰어난 연호정이 사령관으로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이후, 경험이 누적되며 실패 횟수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때 묵비는 정찰과 정보 그리고 첩보가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다.
‘아마 일부러 모른 척 실패했던 걸지도 몰라.’
묵비는 연호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연호정이 전생의 무수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역전의 용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고 온 고수가 흑도 문파의 정찰, 정보력에 관해 몰랐을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멸사군은 사상자가 거의 없이 적을 섬멸했으니, 연호정이 일부러 적에게 당해 줬다는 것은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그 경험 이후, 멸사군은 무림맹에서 가장 실전적인 부대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그런 부대에서 묵비는, 무공의 강함이 아닌 전술과 부대 운용 능력만으로 부장급에 올랐다.
이후 탕마군과 합쳐져 의정군으로 재탄생한 오백의 유군 부대에서 모용우와 쌍벽을 이룰 정도의 전술안을 지니게 된 그녀는 연호정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과연 빙궁주는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여 줄까.’
모자선의 뒷모습을 보며, 묵비는 황궁을 떠나기 전 연호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오면서 봤겠지만, 상극에 대한 혐오가 보통이 아니야. 특히 빙궁주는 무극에 이른 사람이다. 그 자신감과 별개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함을 가지고 있어. 그걸 잘 주시해야 해.’
‘그래도 광혈과 사음의 공격에 휘하 병력을 중원까지 데리고 올 만한 판단력을 지녔어요. 무모하게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돌발 행동의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 너와 량이가 잘 제어해 줘야 한다.’
‘알겠어요.’
‘이번 침공의 첫 전투가 어디서 벌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하지만 적어도 너희 쪽은 아닐 거다. 놈들도 철저히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밀고 들어올 테니까.’
‘인내심 싸움이라는 것이로군요.’
‘정확해. 빙궁주에게 부족한 것은 그 인내심이다. 내가 잘 다독여 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이 근질거리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게 낫지 않나요? 그렇게나 불안한 사람을 책임자로 보내는 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기 교주를 보낼 수는 없잖아. 그리고 빙궁주 역시 정도를 아는 사람이야. 나는 만에 하나를 얘기하고 있는 거다. 빙궁주는 잘해 줄 거야.’
‘그럼 다행이지만…….’
‘황궁으로 오는 길에 많이 친해졌지? 잘 다독여 봐. 빙궁주에게도 너희 두 사람에 관한 얘기를 잘해 놨으니, 어지간해선 갈등이 생길 일은 없을 거다.’
묵비는 연호정의 심각한 얼굴을 떠올렸다.
삼교와 관련된 일이라면 연호정은 언제나 심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방향이 달랐다.
몰아내야 할 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이겨야 할 적으로 본다. 전투가 아니라 전쟁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중원을 종횡하며 적을 몰아내고 아군의 유대를 끈끈하게 만든 연호정.
비로소 그 결실을 보게 될 순간이 왔다.
‘걱정 말아요. 반드시 적을 섬멸할 테니까.’
한참 생각을 거듭하던 때였다.
“묵 신장 얘기를 많이 하더군.”
모자선의 말에 묵비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예?”
“연 성주가 자네 얘기를 많이 했어.”
“아, 그렇습니까.”
“본인이 아는 사람 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사람이라 하더군. 전략 전술에 능하고 적아의 병력 수준을 계산하는 데에 도가 텄기 때문에, 반드시 자네 얘기에 귀를 기울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묵비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오래 만난 사이는 아니지만, 연 성주는 결코 없는 얘기를 지어낼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가 자네와 강 신장을 나에게 딸려 보내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모자선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내 돌발 행동으로 이 싸움을 흐트러트릴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
“나는 이 싸움의 결전 병기로 온 것뿐, 머리를 쓰러 온 것이 아니다. 적과 싸우지 않고 퇴각해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뜻을 펼치도록 해라.”
묵비와 강량의 눈이 반짝였다.
알아듣게 잘 말했다는 연호정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처럼 그들의 주군은 어떤 순간에도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모자선은 다시 말없이 달려 나갔다.
강량이 웃으며 묵비를 바라보았다.
“힘이 나는데요?”
“그러게 말이다.”
묵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싸움, 느낌이 괜찮아.”
* * *
단숨에 협곡 끝까지 달려 나간 막원이 절벽 위에서 자세를 잡았다.
목표는 절벽 끝에 놓인 몇 개의 바위와 지반이었다.
당연하게도 적의 보급병보다 막원의 신법이 훨씬 빨랐다. 그는 기척을 죽이고 오백 보급병의 기세를 읽었다.
‘칠십 장.’
백뢰창의 창대를 부드럽게 잡은 손에 고요한 진기가 담겼다.
‘오십 장.’
확실히 빠른 속도였다.
속도만 놓고 보면 거의 무종을 코앞에 둔 절정고수 수준이라 할 만했다. 그만한 이들이 무려 오백이다.
막원은 새삼 삼교의 전력에 감탄했다.
‘하나하나가 중원과 정면 승부가 가능할 정도라더니.’
솔직히 그 말을, 막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지금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실제로 정면 대결을 벌이면 어느 정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는 있겠으나, 어떻게 해도 중원의 병력이 질 리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처럼 위협적인 조직이 세 곳이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산발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동맹을 맺고 치고 들어오고 있다. 중원이 유례없는 위기를 맞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놈들의 저력은 무시무시하다. 찢어 놓은 보급 부대들이 모두 저만한 신법을 지니고 있다면, 아주 오래전부터 전문적인 훈련을 시켰다는 뜻이니까.’
과연 삼교 놈들 하나하나의 병력은 얼마나 될까?
오만? 십만?
‘……!’
순간 막원의 눈이 반짝였다. 보급병으로 예측되는 놈들이 이십여 장 안쪽까지 들어왔음을 깨달은 것이다.
“흡.”
짧고 강한 호흡.
그리고.
콰아아앙!
소용돌이치며 쏘아진 백뢰창 일격에 툭 튀어나온 지반이 부서지며 그 위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바위 대여섯 개가 떨어져 내렸다.
“멈춰라!”
“정지!”
다급한 외침과 함께 적들이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막원이 백강비를 펼쳤다.
훅!
날아올라 내리꽂히는 게 아니다.
마치 두 발이 대지에 딱 붙어 있는 듯, 부서진 지반을 수직으로 타고 내려온 막원이 선두에서 당황하는 적들을 향해 백뢰창을 뻗어 냈다.
퍼어어엉!
새하얀 벼락이 쏘아지자 대여섯 명의 적병이 비명도 없이 피를 뿜으며 죽어 나갔다.
“적이다!”
“이, 이게 뭐야!”
당황하는 적병들 앞으로.
천무신병기의 모든 힘을 개방한 막원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퍼어엉! 퍼버버벅! 퍼엉!
막원의 창술 반경은 대단했다.
협곡이 좁다 해도 좌우로 삼 장이 넘는다.
그곳을 홀로 지키며 전진하는데, 누구 하나 막원의 뒤로 넘어가는 자가 없었다. 손에서 하얀 섬광이 폭발하면 기본으로 서너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데, 창술 속도가 벼락처럼 빨랐다.
순식간에 보급병 오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역시 별것 아니었군.’
신법은 빨랐지만, 무인 특유의 예기나 사술 등을 익힌 기척은 없었다. 즉, 보급이나 정찰 혹은 첩보에 능한 이들이란 것이다.
거기에 협곡의 한쪽 절벽 끝을 무너트리며 적의 신경을 분산했고, 결정적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성천의 일인 백병신군 막원이었다.
거미줄처럼 적의 전진을 막아 가며 창술을 쏟아 내는 막원.
홀로 전진하는데도 일만 병력이 압박하는 듯했다. 실제로 당황한 보급병들은 막원의 압도적인 기세와 무공에 우왕좌왕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괴물이다!”
“후퇴! 후퇴해라!”
“협곡을 벗어나!”
당연한 판단이었다. 막원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보급병들이 서둘러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퍼어어어엉!!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후미의 보급병 서너 명이 하늘 위로 날아갔다.
사위를 휩쓰는 마기. 아직 힘 조절이 되지 않는지, 포탄과도 같은 장력을 쏟아부으며 보급병을 압박하는 마인이 있었다.
막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놈아, 힘 좀 아껴라. 섬멸 전에 지치겠다.’
다행히도 천효락의 곁에는 우수한 전사인 화향이 있었다.
화기 그득한 칼질로 적들을 베어 넘기는 그녀의 도법엔 조금의 낭비도 없었다.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화향의 도법은 주종지간이라도 배워 둬야 할 전투술이었다.
곧장 중왕마기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보급병들은 여전히 후미를 뚫지 못했다. 장법의 위력은 약해졌지만, 그만큼 속도가 빨라져 무차별로 몸이 박살 났기 때문이었다.
결국 보급병들은 좌우 절벽을 타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앞과 뒤, 어딜 향해도 목숨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절벽이 제법 높았지만, 뛰어난 신법은 어떻게든 격전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의 몸을 피신시켜 주었다.
당연히 세 사람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막원의 백뢰창이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천효락의 장력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절벽을 갈라 놓는 두 고수의 무공, 거기에 중앙을 돌파하며 혼란을 유도하는 화향 덕분에 보급병의 수는 순식간에 이백 이하로 줄어들었다.
고작 세 명.
아무리 전투 능력이 떨어진다 해도 빼어난 신법을 지닌 보급병들이, 협곡에 갇혀 어디로도 도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들 역시 도검을 뽑아 들며 항전했지만, 그건 오히려 세 사람에게 반가운 일이었다. 끝까지 도주하려 했다면 수십 명 정도는 놓치고 말았겠지만, 맞서 싸운다면 놓칠 리가 없다.
이각 후.
협곡 안은 피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