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83)
1083화. 격전의 서막 (3)
“후우! 후우!”
천효락의 호흡은 다소 거칠어져 있었다.
화향 역시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천효락보다는 훨씬 나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순식간에 호흡을 다잡을 수 있었다.
경험의 차이였다. 천효락을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헤아릴 수 없는 생사결을 치른 그녀의 전투 능력은, 이런 난전에서도 빛이 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가?”
막원의 질문에 천효락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멀었군요.”
실제로 천효락의 몸 이곳저곳에는 적의 도검에 긁힌 상처가 많았다.
아무리 천재라도 실전에서 곧장 제 역량을 보여 줄 순 없다. 설령 상대의 수준이 한참 낮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치명적인 상처는 없어서 다행이었다.
“공자님. 일단 몸조리를…….”
“아니야. 이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 정도쯤이야.”
아군이 아니라 적이다. 적인데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효락 역시 살인의 경험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모두가 힘이 빠져 죽음을 앞에 둔 적의 심장에 칼을 박아 준 경우뿐이었다.
이처럼 넘치는 힘으로 적을 몰살한 경험은 없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강한 자신과 더불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지금껏 사선을 걸어 다니며 생존한 사람이었다. 호흡 몇 번으로 받은 충격을 애써 무시했다.
“내공으로 지혈하고 상처를 봉합해라. 내공 가진 이들의 싸움은 하나같이 이런 식이다. 상처를 입으면 곧장 내기를 운용해 출혈을 막고 내부부터 상처를 봉합하는 게 상식이야.”
“……!”
“작은 상처라고 무시하면 충격이 누적될 수밖에 없어. 그리되면 결정적인 순간에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우우웅.
천효락의 몸에서 은은한 마기가 일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돌보는 동안, 화향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다 죽은 건가요?”
“다 죽었지.”
화향이 고개를 저었다.
“섬멸할 각오로 싸우긴 했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일인 군단이라 칭해지는 무극수와 초절정고수 두 명의 합공이다. 생각 없이 부딪친다면 어지간한 전투 부대 하나도 섬멸할 수 있는 전력이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다소 특이하다고 볼 수 있었다. 신법에 특화된 이들의 경우 공방 능력이 거의 없었으나, 끝까지 도주했다면 그들로서도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공포다.”
“공포요?”
막원이 좌우 절벽을 둘러보았다.
피범벅이 된 절벽의 모습은 보기에도 끔찍했다.
“시기가 좋았어.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면 거기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지. 그때, 후미에서 둘이 몰아쳤다.”
“그랬지요.”
“강한 압박감을 받은 이들은 절벽을 타고 도망치려 했어.”
“그리고 선배님의 창술이 그들 하나하나를 전부 요격했죠.”
“그게 중요한 거다. 절벽을 타고 올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 그 현실을 맛본 이들의 머리에 도주는 곧 죽음이라는 사실이 각인된 거다.”
막원이 웃으며 천효락을 바라보았다.
천효락은 눈을 감은 채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천 공자는 감이 정말 좋아. 곧장 나와 손발을 맞춰 절벽을 사수했지. 그런 감각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보통 그런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도주하려 하지 않나요? 말 그대로 공황 상태에 빠질 텐데.”
“둘 중 하나지. 공황에 빠져 이성을 잃고 도주하거나 맞서 싸우거나. 이놈들은 싸우려 했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이득이 되었다. 그저 그뿐이야.”
화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투 능력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무공을 익힌 이들이라 도검을 뽑아 들고 싸우려 했다.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이런 상황이 되자, 화향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랐다.
“이놈들, 정말 삼교 소속이 맞겠지요? 의복에 무공까지 하나같이 사이하긴 했지만…….”
“맞다.”
“확신하시는 이유라도……?”
막원이 죽은 적병 하나의 가슴을 뒤졌다. 그러자 작은 목상(木像) 같은 것이 나왔다.
목상은 특이한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불교의 명왕상처럼 사나운 얼굴에, 놀랍게도 여인의 가슴이 달렸다. 배꼽 아래 남근이 있어야 할 곳에선 두 마리 뱀이 옆구리로 타고 올라 어깨 어림에 멈추었다.
화향의 눈이 번뜩였다.
막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정신 나간 목상을 들고 다니는 놈들이 삼교 아니면 누구겠나.”
첫 기습 때 피를 뿜으며 죽어 나가는 적병의 가슴에서 이런 목상 몇 개가 튀어나온 걸 본 막원은 확신을 갖고 몰아쳤다.
막원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이로써 상황이 다급해졌다.”
“네?”
“천 공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섬서 곳곳에 이런 보급병들이 나뉘어 남하하고 있을 거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건 알겠어.”
“……!”
“어서 중원 측에 알려야 한다.”
그때였다.
“맞습니다. 어서 움직여야 해요.”
천효락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안정되었다.
“끝났나?”
“예. 그리고 그 목상은 사음교의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사음교?”
“사음교는 신의 씨앗을 세상에 퍼트리는 걸 의무로 둡니다. 신의 핏줄에 한정해 다산(多産)을 종용하지요. 지금은 변질되어 버렸지만, 남녀의 성적(性的) 부위를 부각한 목상이라면 사음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막원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초검자의 말을 떠올렸다. 섬서 북부에서 밀고 내려오는 일만 기병은 하나같이 단순하면서도 벼락처럼 빠른 창술을 쓴다고 하였다.
이 보급병들이 사음교 출신이라면 기병들도 사음교 출신일 것이다.
만약 그 기병들을 소현립이 가르쳤다면, 소현립은 사음교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네놈, 분명 삼교와 손을 잡지 않았다고 했거늘 그게 거짓말은 아니겠지.’
막원이 목상을 품 안에 챙겼다.
“일단 남하하도록 하자. 중원 병력과 접선해야 할 것 같다.”
“그러시지요.”
일행은 시체를 최대한 한곳으로 모아 불을 질렀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만에 하나 후속 부대가 있어 건초를 가져가면 그 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적의 보급병 오백을 섬멸한 세 사람이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목적지는 화산파였다.
* * *
“…….”
사암으로 이뤄진 칠채산을 둘러보는 당관의 눈은 지극히 예리했다.
‘싸우기 힘든 지형이라…… 맞는 말이야.’
적아 모두에게 힘든 지형이었다. 미리 진을 치고 함정을 파 놓는다면 몰라도, 느닷없이 부딪쳐 싸운다면 양 진영 모두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녹풍대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군요.”
“그렇군.”
당가의 용독술이 경지에 오르면 풍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선 정말 오랜 연마가 필요하다. 최소한 절정고수 수준은 되어야 뜻하는 대로 하독할 수 있다.
대주급에게는 별문제가 아니지만, 대다수의 대원들은 그러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그나마 녹수대의 독술이 빼어나긴 하나, 이런 지형에서 난전이 펼쳐지면 독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환경에서도 독과 암기의 위력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당가의 신법이 발달한 것이다.
문제는 적의 수준이었다.
당관은 눈을 감고 신공을 운용했다.
휘이이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어느새 당관의 어깨 어림에서 흘러나온 반투명한 기운이 견폐(肩蔽)처럼 펼쳐져 일렁였다.
녹풍대와 녹수대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무극에 오른 이후, 당관의 기세는 녹색삼대의 일반 대원들보다도 못해 보였다.
물론 어중간한 이들의 눈에나 그렇게 보일 것이다. 특유의 사나운 기세가 죽었어도 당관 자체의 존재감은 여전히 빼어나니까.
하지만 당관이 예전보다 부드러운 인상이 되었음은 확실했다.
그러나 신공을 제대로 개방하는 순간,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위엄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공의 기세와는 다른 것이었다. 가까이서 보는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위엄, 당관의 상단전이 열리며 인간을 넘어선 반선의 존재가 뿜는 신비로움이 묻어 나왔다.
‘두 시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다…… 당했대도 떠나자마자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사기(死氣)는 남았을 확률이 높아.’
물론 사기 이전에 적의 마기를 포착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를 것이다.
당관의 상단전이 빠르게 확장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슉!
당관의 귀로 한 줄기 기괴한 파공성이 들렸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당관은 그 소리에 집중했다.
‘어디지? 어디냐?’
멀리 떨어져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멀리.
적어도 무극을 뚫지 못한 자의 기감으로는, 아니 무극을 뚫어도 상단전을 잘 운용하지 못하는 자의 감각으로는 알기 힘든 거리다.
‘서쪽? 서북……?’
위치가 애매하다. 하지만 분명 뭔가가 있다.
신공을 다시 닫은 당관이 손을 들었다.
“서북으로 향한다.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달린다.”
파아악!
당관과 녹색이대가 빠르게 사암 지대를 돌파했다.
오르내리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이쪽에 당관이라는 희대의 전력이 있지만, 그래도 적에게 걸리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
당관의 오감이 칼날처럼 곤두섰다.
‘피 냄새!’
피 냄새, 그리고 아직 스러지지 않은 미약한 사기(死氣).
조금 더 조심스레 이동한 일행은 순간 깜짝 놀랐다.
사암으로 이뤄진 언덕과 언덕 사이.
아직 갈변되지 않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핏자국 주위로 보이는 몇 개의 머리였다.
뜯긴 의복 사이, 몇 개의 머리가 굴러다녔다. 한데 그 머리들이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볼이나 목 일부분이 뜯겨 뼈가 그대로 드러났다. 마치 짐승에게 뜯어먹힌 것만 같은 흔적이었다.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어 본 녹수이대의 대원들조차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 이곳저곳에 뼈가 드러난 사람 머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빠르게 다가가 머리와 뜯긴 의복 등을 살핀 당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찰조다.’
빛을 먹는 어두운 의복에, 굴러다니는 검 한 자루가 공동파의 검과 똑같았다.
머리통 일곱 개가 나뒹굴고 있다면, 최소 일곱 명 이상이 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검자는 정찰조로 이십 명을 보냈다고 했다.
‘이십 명이든, 이백 명이든 의미가 없어.’
여기까지 오면서 정찰조원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서 조원들이 죽었다면, 다른 정찰병들은 무조건 퇴각해서 보고 들은 바를 전해야 했다. 한데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 죽었다. 그렇게 보는 게 맞아.’
그렇다면 다른 정찰병들은 어디서 죽었는가?
적은 어디에 있는가?
당관이 수신호를 보냈다.
은신을 풀고 최대한 달리라는 뜻이었다. 당관을 위시로 녹색이대가 엄청난 속도로 언덕들을 돌파했다.
그리고 잠시 후.
크르르.
당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녹색이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사암 지대 너머, 끝없이 펼쳐진 평지를 달리는 이천의 병력이 보였다.
하나같이 시커먼 의복을 걸쳤는데, 드러난 피부도 검은색이었다. 제각기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꼴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닌데 용케 도열을 맞춰 이동하고 있다.
그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이천? 분명 오천 병력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면 나머지 삼천은?’
당관의 눈이 번쩍였다.
“녹풍과 녹수 전원, 이 거리를 유지한 채 적과 함께 이동해라”
“예?!”
“확인할 것이 있다. 이각 내로 돌아오겠다.”
훅!
당관이 북쪽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