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84)
1084화. 격전의 서막 (4)
한참을 달렸지만, 또 다른 적의 기척은 느낄 수가 없었다.
당관은 다시 만류귀원신공을 개방했다.
눈을 감아도 세상을 볼 수 있었다. 높고 낮은 사암의 언덕들, 그 너머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이 자연의 광활함과 흉포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다.
‘없다.’
아무리 봐도 없다.
녹색이대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달리며 상단전을 극단적으로 개방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관은 적의 어떤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우측 방향으로도 달려 봤지만, 적의 기척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병력을 떼어서 운용한다 해도 이 정도로 거리를 벌릴 수는 없다.
이건 상식을 논할 것도 아니었다. 놈들은 몇 개의 현을 박살 내며 엄청난 속도로 남하해 왔다.
그렇다면 이천 병력만 뚝 떼고 나머지는 다시 북상했다는 뜻인가? 그 또한 말도 안 된다다.
‘이놈들이 설마.’
떨어졌던 속도만큼 빠르게 돌아온 당관이 녹수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녹수대 전원, 제 일선으로 가서 적의 삼천 병력이 남하했다고 전해라! 정찰조는 전멸, 나뉜 삼천 병력은 청해 인근까지 우회하여 기동했을 확률이 높다!”
“……!”
“이동은 종형진(從形陣), 일인 간격은 오십 장이다. 정보를 알린 후 곧장 이쪽과 접선한다. 천리추종향을 따라와라!”
“존명!”
녹수대가 빠르게 줄을 지어 이동했다.
녹풍대주가 물었다.
“그럼 후방의 병력은……?!”
“어딜 뒤져도 없었다. 다시 북상했을 리는 없어. 저놈들, 이천 병력을 이곳에 두고 삼천만 떼어서 감숙을 통과할 생각이다.”
녹풍대주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그, 그럼 저놈들을 미끼로……?”
정찰조를 죽이고 이천 병력을 느릿하게 진군시켰다.
만약 또 다른 정찰조를 보낸다 해도 당가만큼 빠를 순 없을 것이다. 당연히 북부까지 올라갔다가 이천 병력의 뒤를 쫓아서 내려올 것이며, 그때가 되면 이미 저 이천 병력은 감숙의 중부에 다다를 것이다.
그때부터 유인책이 시작된다.
저 이천 병력을 죽이기 위해 감숙의 아군이 뛰어들면, 그 즉시 감숙 전력에 공백이 생긴다.
앞서 진군한 삼천 병력의 뒤를 쫓을 병력이 확 줄어드는 셈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서슴없이 섬서로 치고 들어갈 것이다.
만약 섬서에서도 싸우지 않고 지나치게 되면 그때부터는 하남 혹은 호북이다. 말 그대로 중원의 중부까지 들어와 활개를 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막기야 막겠지만, 적의 수준을 모르는 이상 어떤 병력을 투입해야 할지도 막막할 것이다. 어찌저찌 맞는 병력을 보내 싸운다 한들 중심부까지 치고 들어온 놈들이 단순히 옥쇄할 리가 없다.
게다가 그 삼천 병력에 무극수가 하나라도 있다면?
‘중원 한복판에서 엄청난 난전이 터진다. 그렇다면 초전부터 무림맹, 나아가 중원의 사기가…….’
당관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저 이천 병력은 우리가 막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삼천 병력 쪽에 무극수가 있다면 당관이 가는 게 맞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쪽으로 향한다 한들 이천 병력을 누가 막겠는가.
‘빌어먹을, 선택을 강요당했군.’
이천 병력부터 없애 버린 후, 곧장 삼천 병력을 쫓아가야만 했다. 단순히 병력 싸움만 논한다면 이미 삼천 쪽으로 달렸겠지만, 저놈들을 놔두면 민간인들의 피해가 커진다.
그것만큼은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녹풍대는 저곳, 사색으로 물든 사암 언덕 뒤로 이동해 포진해라.”
“가주님께선?!”
“놈들을 유인한다. 수준도 봐야 해. 저것들, 단순한 마물이 아니야.”
파아악!
당관이 움직임과 동시에 녹풍대 역시 우회하여 이동했다.
거리가 한참 떨어졌지만, 당관의 추뢰신법은 언제나처럼 빨랐다.
탁 트인 지형이라 앞만 보고 진군하는 이천 병력이라도 당관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캬아아악!”
줄을 지어 진군하던 이천의 마인들이 괴성을 질러 댔다.
당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한데 그게 그냥 소리가 아니었다.
‘음공!’
말도 못 하는 듯 그저 울부짖기만 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상당한 마기가 실려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오금이 저려 힘이 빠질 것이다. 오랫동안 내공을 연마한 일류 수준이 아니라면 공포에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진짜 마기다.’
사천에서, 그리고 청해에서 마주했던 마인들.
그들보다 마기의 수준은 낮지만, 드러난 흉포함은 더했다. 이지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해 주는 마성(魔聲)이었다.
파바바바바박!
당관이 속도를 높였다.
그의 경신술은 정말 대단했다. 안 그래도 빠른 속도인데, 점점 더 빨라지더니 이내 땅을 밟기도 전에 발을 떼어 나아갔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아니지만, 능히 허공답보라 할 만했다. 공기층을 밀어 내 그 풍성한 탄력으로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를 구현하는 것, 극에 이른 상단신기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술수였다.
예상보다 더 빨리 다가오는 당관을 보며 마인들이 악다구니를 질렀다.
대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전원 당관 쪽을 노려보며 몸을 트는데, 그 모습이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시커먼 손톱은 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웠고, 충혈된 눈은 동공까지 시뻘겠다. 피부는 검었고 드러난 치열은 유독 들쭉날쭉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인간의 외형을 대충 따라 한 악귀들을 보는 듯했다. 천하의 당관조차도 자세히 드러난 그들의 외양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수조(五獸組)는 가서 죽여라.”
그 이천 병력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상인이 있다. 당관 역시 알고 있었다. 난폭하기 그지없는 야수들 사이, 잘 다듬어진 마기를 간직한 자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겠지.’
딱 봐도 이성이 없는 저 짐승들을 통솔하려면 당연히 정상인이 있어야만 했다.
‘그대로 부숴 주마.’
오수대라고 불린 마귀들이 당관을 향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굽은 등, 어깨에 근육이 대단했다. 두 발로 달리는데도 네발 달린 짐승처럼 달린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기괴한 움직임을 보여 준다.
그 수가 무려 사백이다.
일수대부터 오수대까지, 총 이천의 병력.
달려 나가는 당관의 손에서 은은한 적색 기류가 일기 시작했다.
‘삼양신조(三陽神爪).’
제왕독경의 독정은 있지만, 그 독정의 순수한 진기(眞氣)만을 제외한 모든 독기를 날려 버렸다.
원할 때마다 독공을 구사할 수 있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만류귀원신공은 당가의 모든 무공을 구현해 낼 수 있다. 적절한 순간, 그에 맞는 무공을 풀어 내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인 법이다.
당관의 두 손이 허공을 할퀴었다.
푸화아악!
거리가 일 장이 넘게 떨어졌는데도 최전방에서 달려오던 마귀 다섯의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당관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이것들 봐라?’
혼신의 힘을 다한 건 아니지만, 첫 부딪침인 만큼 거침없이 살수를 휘둘렀다.
거대한 상단전의 용량을 보면 능히 십여 마리는 골로 보냈어야 정상이었다. 한데 그 절반만 죽어 나갔다.
나머지 조법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놈들은 팔이나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을 뿐 죽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봐서 그런지 더더욱 흥분한 기색이었다.
‘몸뚱이가 단단하다.’
훅!
오수대 안쪽으로 파고든 당관의 몸이 팽이처럼 돌았다.
퍼버버벅! 푸화악!
마귀들의 피는 그 피부만큼이나 어둡기 짝이 없었다.
검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당관에게는 한 방울의 피도 튀지 않았다.
삼양신조, 삼양신장(三陽神掌)으로 순식간에 이십여 마리의 마귀를 죽인 당관이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캬아아악!”
“크아아아!”
당관을 올려다보며 괴성을 지르는 마귀들의 얼굴에 끔찍한 살기가 어렸다.
이지가 없다는 것은 곧 본능만 남았다는 뜻이다. 본능이 있다면 맞상대하기 어려운 존재 앞에서 공포를 느껴야 정상이었다.
한데도 놈들에게는 두려움이란 게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공포심이라는 감정만 거세당한 것 같았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나라도 안 되겠군.’
어떤 무공을 익힌 건지, 이 마귀들의 몸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당관에게 그 정도 강도는 별것도 아니었지만, 그 수가 이천이나 된다면 퍼붓는 내공의 손실이 엄청날 것이다.
설령 그만한 강도가 아니라도 저 정도 반응 속도라면 이천은 힘들다. 당관은 자신의 능력을 절대 과신하지 않았다.
파아아아앙!
허공에 떠 있던 당관의 신형이 직각으로 이동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궁극의 신법이었다. 그런데도 마귀들은 당관을 올려다보며 괴성만 지를 뿐이었다.
당관의 눈이 마귀 부대 중앙을 향했다.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중앙부,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귀찮은 표정으로 당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관의 손이 청년에게로 향했다.
그 즉시 마귀 십여 마리가 허공으로 뛰어올라 청년의 앞을 막았다.
퍼버버버벅!
섬뜩한 파열음과 동시에 마귀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중 다섯 마리가 피를 뿜으며 고통스러워했다. 당가의 절기, 전궁지(電穹指)였다.
파아악!
또 한 번 허공을 밟으며 이동한 당관은,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캬아아아아악!”
상처 입은 마귀들을 향해, 청년 주변의 마귀들이 뛰어들었다.
그것만큼은 통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청년이 버럭 소리쳤다.
“이놈들아! 적당히 하고 물러나!”
그래도 수장의 말이라고 듣기는 듣는다.
아쉬움에 느릿느릿 물러나는 마귀들 사이로, 전궁지에 맞아 피를 뿜던 마귀들의 목과 팔다리가 뼈만 남은 것이 보였다. 그 사이에 살점이 뜯긴 것이다.
이빨로 바위처럼 단단한 피부를 뜯어먹는 것도 기가 막혔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동료 의식 따위 없는 저 짐승들의 흉포함이었다.
‘완전히 맛이 갔군.’
천하의 당관도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멀찍이 물러나 땅으로 내려선 당관과 마귀 부대의 거리는 어느새 이십여 장 이상 떨어져 있었다.
오수대에 속한 마귀들이 또 한 번 당관에게 달려들었다.
가만히 그들을 보던 당관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어째 이런 놈들만 상대하는 건지.”
그가 오른손을 들었다.
부르르 떨리는 오른손에 시뻘건 광채가 일렁이더니, 이내 그 색이 점점 연해지다가 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무엇을 느꼈음인가?
중앙에 있던 청년이 다급하게 외쳤다.
“물러나라!”
“늦었다.”
담긴 진기의 위력은 줄어도, 생물이라면 더더욱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무공이 날아간다.
당관이 대충 오른손을 휘저었다.
퍼퍼퍼펑!
달려들던 마귀들이 망치에 맞은 것처럼 뒤로 튕겨 나가 대열을 무너트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악!”
마귀들의 피부가 끔찍하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불에 댄 것이 아닌데도 피부, 근육, 뼈 순으로 탔다.
“하기야, 언제 어디로 투입될지 모르는데 너희 같은 잡것들에게 진심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지.”
화독(火毒)으로 마귀들을 중독시킨 당관이 다시 왼손을 휘둘렀다.
당가천독수(唐家千毒手)였다. 당연히 천독수 안에 숨은 독의 배합은 당관 마음대로였다.
화아아악!
육체적 타격 없이 칠보단혼산(七步斷魂散)의 독풍을 뿌리니, 악다구니를 지르던 마귀들 오십여 마리가 그 자리에 쓰러져 버둥거렸다.
붉은 머리의 청년이 입을 쩍 벌렸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만큼은 안 되나, 역시.”
청년이 버럭 외쳤다.
“다 덤벼서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