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85)
1085화. 격전의 서막 (5)
“뭣이?!”
녹수대주의 말을 들은 초검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안 와서 불안하긴 했지만, 설마 정찰조가 다 죽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녹수대주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현재 가주님과 녹풍대는 적의 이천 병력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감숙 병력은 서둘러 후미로 빠져 우회 기동하는 삼천 병력을 쫓아야만 합니다!”
“이런!”
분노로 눈이 뒤집혔던 초검자는, 이내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정찰조로 보낸 인원 중엔 그의 막내 제자도 섞여 있었다.
정말이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전시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였고, 초검자는 제일선은 물론 공동파의 병력을 다스리는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확실하오?”
“가주님께서 직접 북부 너머까지 다녀오셨습니다! 그분의 능력이라면 설령 적이 은신했더라도 못 알아챌 리가 없습니다!”
초검자는 이를 악물었다.
당관이 무극을 돌파했다는 사실은 안다. 무극을 돌파한 자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고수인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전쟁이었다. 한 번의 전술적 오판이 아군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당관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믿는다. 하지만 만약 적이 당관이 보지 못할 만큼 뒤로 빠졌다면?
“장로님!”
녹풍대주의 초조한 외침에 초검자가 뒤를 돌아 외쳤다.
“이선과 삼선에 연락을 취해라! 적이 서쪽 청해 인근으로 우회 기동 후 감숙을 빠져나갈 수 있다! 서둘러 움직여 사선과 합류, 적들의 진격을 막으라고 전달해라!”
명을 전달받은 검사들이 말을 몰아 남쪽으로 달렸다.
녹수대주의 눈이 흔들렸다.
“제일선은 그럼……?”
“가주 쪽은 어떻소?”
“아직 예측 불가입니다. 적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가주님과 녹풍대가 교전 중일 겁니다.”
“아무리 가주라도 이천 병력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겠소?”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저희는 독과 암기를 다루며, 가주님께선 사천 제일의 강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맞는 말이다.
초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가주를 도우시오. 우리도 빠지겠소.”
“무운을 빕니다! 그럼.”
녹수대가 왔던 길로 황급히 돌아갔다.
멀어지는 녹수대의 뒷모습을 보며, 초검자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휘하 검사 하나가 물었다.
“저희도 서둘러 빠질까요?”
“…….”
“장로님.”
“기다려 보거라.”
초검자는 신중해지려 했다.
그는 당관의 능력을 믿었다. 하지만 적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감숙 북부에도 공동의 눈은 있다. 그들의 정보를 받고 가도 늦지 않아.’
이선과 삼선에 속한 전력만으로도 수천 병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선의 예비 병력까지 더하면, 삼천 병력이 우회 기동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에게 또 다른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길함이다.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해도, 단 한 명의 말을 듣고 병력 전체가 움직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북부의 정보원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움직여 주고 있으니, 그들의 정보까지 받아야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괜찮아. 괜찮을 것이다.’
초검자는 전략 전술을 잘 배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전은 다르다.
병력 배치까지는 배운 대로 써먹을 수 있어도, 실제 전쟁에서 적병과 머리싸움을 시작하면 그만한 경험이 있어야 빠른 대처가 가능하다. 혹은 무림인으로서의 직감이 뛰어나거나.
실제로 초검자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의 첩보로 병력 전체가 움직이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막내 제자를 잃었기 때문에 더더욱 흥분하지 않으려 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려 했다.
그 강박에 가까운 심정이, 감숙 전투의 판도를 뒤엎었다.
* * *
당관의 독술은 무지막지했다.
그는 아낌없이 내공을 퍼부었다. 무극에 오르기 위해 한 방울의 독기까지 싹 증발시켰지만, 수천 종류의 독기를 머금었던 그릇, 즉 독정은 아직도 그의 단전에 잠자고 있었다.
다만 내공으로 구현할 수 있는 독의 가짓수가 대폭 줄어들었고, 내공으로 독기를 만들기 위해 따로 상당량의 진기가 소모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무극에 오르며 광활한 상단신기를 얻은 당관의 독술은 그전에 구사했던 독공과 차이가 없었다.
칠보단혼산을 흩뿌리며 적을 유린하는 당관의 몸놀림은 여유 그 자체였다. 여전히 빠르게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으나, 마귀들의 공격권 밖이기 때문에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다.
“캬아아아악!”
마귀들의 괴성에, 제거당한 게 아닌가 싶었던 두려움이란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몸이 찢겨 나가도 공포 따위 몰랐던 그들이지만 독은 달랐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귀신이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십 단위의 동료들이 우수수 쓰러져 나간다. 쓰러진 동료들의 몸은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끔찍하게 변형되었다.
이건 싸움 자체가 되지 않았다. 잡으려 해도 너무 빨라서 잡을 수 없었고, 심지어 잡으러 나간 마귀들은 죄 바닥에 쓰러져 목을 움켜쥔 채 부르르 떨었다.
마귀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당관을 따라 사암 언덕 앞, 백 장 거리까지 따라붙었지만 그 이상 쫓아갈 수가 없었다.
언덕 위에 녹풍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 그들은 몰랐다. 그저 차오르는 공포를 더는 억누를 수 없었기에 이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르륵.
당관이 마귀 부대에게서 십 장 떨어진 거리에 내려섰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단 한 명이서 강철처럼 단단한 피부의 마귀들을 수백이나 쓰러트리고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뒷짐을 진 채 마주 서 있다.
천하의 누구도 이런 광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중원의 무극수, 그중에서도 오직 당관만이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독과 암기의 조종.
그중에서도 최강자의 반열에 올라선 당관의 위엄이었다.
‘삼분지 일 정도 되나?’
당관을 쫓아오다 줄줄이 쓰러진 마귀들의 시체는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피부가 썩거나 노래지는 등, 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역시 좀 힘들군.’
보이는 것과 달리 당관은 단전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만류귀원신공은 당가의 독공까지도 구현할 수 있는 무적의 신공이었다. 하지만 독에 한정하면, 오직 독술만을 위해 만들어진 제왕독공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특히 내공 소모가 극심해서, 상단신기조차 어지럽게 날뛰고 있었다.
‘더는 위험해.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해야만 한다.’
물론 싸울 수는 있다. 다만 이 상태로는 독공을 구사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도열해라!”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곧장 마귀들이 줄을 지어 섰다.
다시 봐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성이 없는 마귀들이 청년의 목소리에 반응해 군인처럼 줄을 선다. 가히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너!”
마귀들의 어깨 위에 올라선 청년이 이를 갈며 외쳤다.
“넌 뭐야! 설마 당가냐?!”
당관이 피식 웃었다.
“하면? 이만한 독술을 구사할 수 있는 자가 중원 천지에 당가인 말고 또 있다더냐?”
“이런 시발! 네 이름이 뭔데?!”
“당관. 당대 사천당문의 주인이 나다.”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그였다.
꿀릴 것도 없고 적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서 나쁠 것도 없다.
“……!!”
청년의 눈빛이 돌변했다.
상대가 당가인이라는 것까지는 예측했지만, 설마 당가의 가주가 직접 왔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네놈이…… 당가의 가주 놈이라고?”
“어린놈의 자식이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너에 비하면 싸가지도 양반이다.”
“너, 이 개새끼!!”
상대하는 적이 단순히 당가 소속이라는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관은 청년의 눈빛과 살기에서 지독한 원한을 읽었다.
“너, 나를 아느냐?”
“개 같은 놈! 내 아버지를 잊었느냐!”
“네 아버지가 누군데?”
“야혁! 야혁이 내 아버지다! 이사제장이었던 내 아버지를 네놈이 죽였다!”
순간 당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무극의 깨달음을 얻기 직전, 제왕독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상대했던 한 사내였다.
곰처럼 거대한 체격. 야수와도 같은 무공을 구사하던 한 마인은 막원과의 전투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음에도 맞상대하기가 힘들 만큼 강했다.
‘그럼 저놈이?’
그렇다. 저 붉은 머리의 청년은 광혈교의 이사제장 야혁의 아들인 것이다.
청년, 야백도가 악을 질러 댔다.
“이놈! 안 그래도 네놈을 만나고 싶었다! 네놈만큼은 어떻게든 내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었지!”
당관은 강호의 은원을 떠올렸다.
강호에 흐르는 은혜는 바람과 같고, 원한은 강물과 같다고 하였다.
은혜는 바람만 불어도 사라지지만, 원한은 강물처럼 흐르다가 거대한 호수에 고인다. 가끔 비가 많이 와 홍수가 나면, 넘치는 원한은 죄가 없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앗아 가기 마련이었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인은 은원을 피하지 않는다. 너만큼은 내 직접 상대해 주마.”
“은원?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
“……응?”
“내 아버지는 내 손으로 죽였어야 했어! 한데 네놈이 나의 먹잇감을 빼앗았다! 그 죄, 살아서는 갚지 못할 거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는가.
당관은 저도 모르게 그리 말할 뻔했다. 마인이라고 하더니만, 역시 하나같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야수들아!”
분노 가득한 야백도의 목소리에 마귀들이 안광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이 마귀 놈들이 어디서 봤다 싶었더니만 이사제장인 야혁과 비슷했다.
다만 야혁은 짐승처럼 보이되 마땅히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이놈들은 누가 봐도 사람보다는 짐승이나 마물에 가깝다는 게 달랐다.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 개 같은 놈을 사로잡아라! 목숨을 아끼는 놈이 있으면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야백도의 몸에서 강렬한 마기가 번져 나왔다.
그 마기의 밀도가 굉장했다. 얼핏 봐도 갓 약관에 이른 듯한데, 기질이 거의 무종을 코앞에 둔 절정고수에 육박했다.
“크아아아악!”
흘러나오는 마기가 짐승들의 두려움을 깨끗하게 제거했다.
“죽여!!”
쿠르르릉.
오직 당관을 향해 일제히 달려드는 천사백 마리의 마귀들.
당관 역시 그대로 물러나며 쌍장을 휘둘렀다.
펑! 퍼퍼펑!
그는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장력이라고는 하지만, 한 방에 하나의 목숨만 노렸다.
선두에서 달리던 마귀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하나같이 머리통이 날아가거나 가슴이 움푹 파였다.
그래도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한참이나 물러나던 당관은 문득, 녹풍대주의 전음을 들었다.
[폭우와 이화, 준비되었습니다.]당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백 장에서 오십 장, 오십 장에서 삼십 장.
삼십 장에서 언덕 바로 밑까지 적들을 유인한 당관이 이내 언덕을 타고 올랐다.
광기로 가득한 마귀들이 악다구니를 지르며 당관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오를 때,
“폭우 준비.”
한 줄기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녹풍대원들이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관이 엄지를 들어 뒤를 가리켰다.
녹풍대주가 외쳤다.
“발포!!”
퍼퍼퍼퍼퍼펑!!
팔뚝 길이의 작은 화포에서 쏘아진 쇠구슬들이 마귀 부대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