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90)
1090화. 먹고 먹히다 (4)
제아무리 지마후라도 당관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최대한 싸움을 피해야만 했다. 이곳은 적지였고, 지마신령은 잘 쉬지도 못한 채 사선부터 이선까지 차례대로 깨부수며 달려왔다.
병력을 정비해야 했다. 여기서 끝까지 싸우다간 적도 적이지만 아군의 피해도 막심할 터였다.
‘지금도 충분히 막심하지.’
삼천의 지마신령이 천팔백으로 줄었다.
물론 적의 피해는 이쪽의 두 배가 넘었다. 특히 감숙 무림의 지주라는 공동파의 피해가 상당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싸움은 이긴 거나 다름이 없다. 다 이긴 싸움인데 끝을 보자고 밀어붙였다간 퇴각이 힘들어질 것이다.
지마후가 외쳤다.
“전원 후미로 빠져라! 퇴각 진형으로!”
지마신령은 잘 훈련된 부대였다.
적과 돌격하다가 일순간 뒤로 빠지는 것은 누구라도 힘들다. 설령 절정고수로 이뤄진 부대라도 한순간에 진형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힘든 일이다.
지마신령은 그게 가능한 부대였다. 지마후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그들은 미련 없이 후퇴하며 적을 떨쳐 내려 했다.
초검자가 외쳤다.
“놈들이 퇴각하려 한다! 무조건 돌격……!”
쩌저저저저정!
퇴각하는 부대와 일선 병력 사이에 지마후와 다섯 부대장들이 나타났다.
부대장들의 무공도 대단했지만, 당연히 지마후를 막을 만한 무사들이 없었다. 오히려 싸움터에 공백이 생기자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일직선으로 이동하며 일선 병력을 공격하는데, 순식간에 칠팔십 명이 죽어 나갔다.
내공 소모가 심했지만, 역시나 삼사제장다운 무위였다. 선두에서 적을 쫓던 일선 무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초검자가 외쳤다.
“전군 정지! 뒤로 물러나라!”
파아악!
어떻게든 지마후를 막아야만 했다. 초검자는 거침없이 돌진했다.
“장로님! 안 됩니다!”
“초검자!”
검사들과 문주들이 마구 외쳤지만, 초검자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적장이 코앞에 있다. 어떻게든 신중해지려 했지만, 그 신중함이 구할 수 있었던 이선 병력까지도 녹이고 말았다.
‘죽인다!’
이성을 잃은 초검자, 그의 무시무시한 살기는 지마후의 피부에도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지마후가 씨익 웃었다.
“좋구나!”
성마에 이른 고수조차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살기.
이런 것은 전쟁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전쟁을 사랑했다. 죽고 죽이는 난전 속에서야말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참마도를 고쳐 쥔 그녀가 단숨에 초검자를 토막 내려 하는 순간.
퍼어엉!
어디선가 날아온 부드러운 장력이 초검자의 몸을 측후방으로 날려 버렸다.
번쩍!
허공을 가른 지마후의 일도가 초검자를 스쳤다. 측후방으로 날아가지 않았다면 두 다리가 날아갔을 테지만, 지마후의 도격은 초검자의 옆구리만 조금 베고 지나갔다.
지마후가 고개를 틀었다.
어느새 당관이 십여 장 안쪽까지 파고든 것이다.
‘빠르다!’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움직임이었다.
내공이나 경지의 차이가 아니라 신법 자체의 수준이 다르다. 이만큼 빠른 신법은 광혈교 내에서도 몇 개 되지 않는다.
지마후는 적의 등 뒤에서 번쩍거리는 수많은 별을 바라보았다.
제각기 형태가 다른 암기들이었다. 저 많은 암기를 어디에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암기를 보면 허공섭물을 극한까지 연마한 고수가 분명했다.
당관의 검지와 중지가 지마후를 가리켰다.
“만천일포(滿天一砲).”
치리리리리링!
허공을 유영하던 암기들이 한순간 하나로 묶여 지마후를 향해 쏘아졌다.
팔방으로 빛을 뿜는 암기의 공격이었다. 풍성한 두께를 자랑하는 포탄과도 같은 일격이었다.
지마후의 참마도에 불그스름한 마기가 어렸다.
‘참룡(斬龍).’
번쩍!
사선으로 내리치는 일도가 거대한 도기를 불러일으켰다.
콰아아앙!
암기의 포탄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강맹한 도격, 과히 무극수다운 무공이었다.
하지만 당관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으며, 지마후 역시 자신이 첫 합에 우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촤르르르르륵!
산산조각이 난 암기들이 더 작은 포탄이 되어 지마후의 몸 곳곳을 노리고 쏘아졌다.
신들린 상단전 운용이다. 정말로 암기들을 뭉쳐 혼이 없는 생물을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지마후가 연신 칼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정! 퍼퍼펑! 퍼엉!
묵직한 참마도로 그 많은 암기를 쳐 내는 지마후나, 튕겨 나간 암기들이 땅을 폭발시킬 만큼 엄청난 내공을 쏟아붓는 당관이나 가히 무신(武神)들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법했다.
훅!
마치 젓가락처럼 손가락으로 참마도의 도병을 가지고 놀던 지마후가 당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신법의 속도는 당관이 더 빠르지만, 짧은 거리를 좁히는 순간적인 이동 속도는 지마후가 더 빨랐다.
당관의 주먹이 빠르게 움직였다.
퍼퍼퍼펑! 퍼억! 퍼억!
벼락처럼 주고받는 백타.
참마도의 손잡이가 당관의 옆구리를 후려치고, 당관의 주먹이 지마후의 턱을 올려 쳤다.
훅!
재차 공격을 감행하려던 지마후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치이이익!
그 빠른 판단이 그녀를 살렸다. 당관의 몸 주변으로 흐르는 독기가 순식간에 땅 일부를 태워 버린 것이다.
스르륵.
뿜어져 나온 독기는 거짓말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그의 뒤에는 아군 병력이 있었다. 이 독기가 그들에게도 전해지면 몰살을 면치 못한다. 적장이 코앞까지 다가와 근접전을 벌였기 때문에 결정적인 한 수로 썼던 것뿐이었다.
파아아악!
물러난 지마후가 참마도를 휘둘렀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시뻘건 도기. 그 불타오르는 도격은 지마신령의 후미를 노리려던 녹풍과 녹수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당관이 외쳤다.
“피해라!”
콰아앙!
도격이 땅을 후려치며 자욱한 연기를 일으켰다.
애초에 녹풍과 녹수를 죽이려던 일격은 아니었다. 그들을 물러나게 할 요량으로 내친 일도였다. 물론 당관의 외침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그 일격으로 대원 중 네다섯 명은 죽어 나갔을 것이다.
화아아아악!
당관과 지마후가 서로를 노려보며 살기를 일으켰다.
전투가 잠시 중단되었다. 신에 이른 무력을 겨루던 두 초고수로 인해 전투 자체가 소강상태로 진입한 것이다.
지마후가 피식 웃으며 어깨에 참마도를 걸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닥쳐라.”
“계속한다면 우리도 환영이지만, 그래 봤자 너희한테도 좋을 일이 없을 텐데?”
당관이 차갑게 웃었다.
“겁이 나나?”
“그런 되지도 않는 도발은 안 먹혀. 솔직히 너희도 힘들잖아? 더 싸워 봤자 서로의 살만 깎아 먹는 행위가 될 거다. 알지?”
물론 당관도 알고 있었다.
작정하고 싸운다면야 승리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녹풍과 녹수는 암습, 기습에 특화된 부대인지라 이처럼 대규모 전면전에선 제 능력을 활용하기가 힘들었다.
쓴다면 쓸 수 있지만, 독과 암기에 휘말려 아군도 많이 다칠 수 있다는 것이다.
녹색이대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최정예인 일선 병력 역시 이백이 죽어 팔백밖에 남지 않았다. 사기를 잃고도 항전하는 이선의 병력도 삼백은 되었지만,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서 뭔가를 기대할 순 없었다.
반면 적은?
천오백 이상, 거의 천칠백에 가까운 병력이 남았다.
그 정도면 해볼 만한 싸움이긴 하다. 결국 지마후는 당관이 맡게 될 것이고, 두 병력은 혼신의 힘을 다해 서로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리되면 어떤 식의 결과가 나든 양측 모두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이다. 후일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끝내는 것도 나쁘진 않다.
“닥치지 못할까!”
피를 흘리며 나타난 초검자가 살기를 드리우며 외쳤다.
“네놈들에게 당한 감숙 무림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느니라! 구천을 배회하는 그들의 낯을 봐서라도 절대 멈출 수 없도다!”
지마후가 차갑게 웃었다.
“저 늙은이, 다음에도 꼭 적장으로 세워 줘라. 상대하기가 엄청 쉽겠어.”
매서운 조롱이었다. 초검자는 물론 공동파 검사들의 얼굴도 분노로 달아올랐다.
그때, 당관이 손을 들었다.
“잠시 기다려라.”
“얼마든지.”
당관이 초검자에게 다가갔다.
“여기까지 합시다.”
“당가주!”
“전쟁은 최소의 피해로 적을 섬멸하는 것이지, 같이 죽자고 싸우는 게 아니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번에는 우리가 당한 거요. 놈들의 기습 작전을 우리가 놓쳤소. 그 시점에서 이미 승패를 논할 수 없게 되었단 말이오.”
초검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닌 말로, 당관의 전언을 듣고 곧장 남하했다면 이선과 함께 적들을 밀어 낼 수도 있었다. 당관까지 제때 도착했으니, 그땐 정말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으리라.
결국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이길 수 있었던 전투를 패배로 돌려놓았다. 초검자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이만합시다. 훗날을 대비하시오.”
빠득빠득 이를 갉던 초검자가 한 걸음 나서서 지마후를 노려보았다.
“다음번에 만날 땐 너희를 모조리 북망산으로 보내 주마.”
“북망산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뭐 열심히 해 봐.”
지마후가 지마신령을 이끌고 좌측으로 물러났다. 청해로 빠져서 북상하려는 것이다.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군.’
지마신령의 이동 방향을 보던 당관이 초검자에게 말했다.
“감숙 병력을 수습하시오. 죽은 사람이 많소.”
“당가주, 미안하오.”
초검자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내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소. 가주의 전언을 듣고 곧장 남하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오.”
“지금은 후회가 아닌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오. 다행히 적의 오천 병력 중 삼천이 넘는 이들을 죽였으니, 나름의 성과도 있었소.”
“가주께서 오지 않았다면 이번 공격으로 감숙이 결딴날 뻔했소이다.”
초검자가 고개를 숙였다.
“당가의 참전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당관이 손을 저었다.
“일단 병력을 수습합시다.”
“그럽시다.”
“하지만 그 전에.”
당관이 멀어지는 지마신령을 바라보았다.
“청해 동북부 쪽까지 감숙 무림의 정보원들이 깔려 있소?”
“물론 그렇소만.”
“다행이구려. 죽은 무사들의 위령제(慰靈祭) 정도는 지내 줄 수 있을 것 같소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악하고 살기 넘치고 무시무시한.
그리고 믿음직한 미소였다.
“깨끗한 전쟁은 없소. 세상에 어떤 바보가 얌전히 물러나는 적을 그냥 놔둔단 말이오?”
“……?!”
“괴롭힐 수 있을 때까지는 어떻게든 괴롭혀야지.”
* * *
화산으로 가던 길.
막원은 문득 저 멀리 떨어진 어느 산맥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저건?”
천효락과 화향 역시 고개를 돌렸다.
기쁨의 함성이었다. 너무 멀어서 그 내용은 모르겠지만, 거기 실린 기쁨의 감정을 막원은 느낄 수 있었다.
“선배님?”
“아무래도 저쪽으로 가 봐야겠구먼.”
막원이 턱을 쓰다듬었다.
“적이 온다는 걸 화산과 종남도 알고 있겠지. 당연히 우리보다 빨리 알았을 테니, 전선부터 깔고 봤을 거야.”
“섬서에 관해서는 잘 몰라서…… 저 위치가 적을 막기 용이한 곳입니까?”
“막는다기보다는 전장으로 삼기에 나쁘지는 않을 거다.”
“다시 저기로 갈까요?”
“그래야겠다.”
그렇게 일행이 이동 방향을 바꾸려던 때였다.
“…….”
이번만큼은 천효락도 막원이 느낀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배님?”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막원은 천효락에게 백뢰창까지 건넸다.
“정찰 좀 하고 와야겠다. 땅이 살짝 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