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91)
1091화. 먹고 먹히다 (5)
“…….”
모자선이 걸음을 멈추었다.
묵비가 자연스레 손을 들었다. 그러자 제영사들 역시 걸음을 멈춘 후 자세를 낮추었다.
강량이 모자선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궁주님?”
“뭔가…….”
모자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데.”
뭐가 다르다는 말일까?
묵비와 강량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룬 경지도 다르지만, 특히 상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녀였다. 적이 있다고 예상되는 곳까지는 거의 한나절을 더 가야 했지만, 모자선이 뭔가를 느꼈다면 적이 점차 거리를 줄이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잠시 후.
“일단 가 보도록 한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으십니까?”
“공기가 탁해. 심상치 않은 뭔가가 있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다.”
묵비와 강량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무극수의 감지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녀가 심상치 않은 뭔가를 느꼈다면, 아군 측에게 좋은 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의 위험은 없을 거다. 가도록 하지.”
“그러시지요.”
그렇게 일행은 반나절을 더 이동했다.
이후 속도를 줄였다. 제영사들의 체력 문제도 있었지만, 괜스레 빨리 다가가다가 적이 이쪽의 이동을 눈치채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다시 반 시진.
작은 언덕 밑에 도달한 일행을 향해 모자선이 말했다.
“이 너머에서 심상치 않은 화기(火氣)가 느껴진다. 병력은 이곳에서 쉬면서 혹시 모를 전투를 준비하는 게 좋을 듯하다.”
“정찰이 필요합니까?”
“물론 그래야겠지.”
묵비가 강량에게 말했다.
“제영사들을 통제해라. 내가 궁주님과 함께 정찰을 다녀오겠다.”
“걱정 마십시오.”
“그럼.”
파아악!
모자선과 묵비가 언덕을 달렸다.
그 먼 거리를 이동했는데도 체력적인 문제가 전혀 없는 듯했다. 언덕 중앙부까지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두 여인의 신법 속도는 보는 이의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제영사의 수장, 한비가 혀를 내둘렀다.
“정말 엄청나구려. 듣기는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강량이 피식 웃었다.
“무극수들은 인간이 아니오. 하긴, 사람의 몸으로 그 경지까지 도달했으니, 하나같이 다루기가 쉽지 않지만.”
“빙궁주 말고 묵 신장 말이오.”
“엥?”
한비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빙궁주야 상식이 안 통하는 괴수라고 쳐도, 묵 신장의 신법 또한 궁주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군.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했는데도 전혀 힘든 것 같지 않소.”
“그럴 수밖에.”
강량 역시 묵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까마득하게 멀어진 그녀의 등 뒤에는 믿음직한 붉은 활이 매여 있었다.
“누님은 연 형님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니까. 인간적으로도, 실력적으로도.”
순식간에 언덕 정상에 오른 두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게 뭐지?”
모자선은 저도 모르게 그리 중얼거렸다.
묵비가 눈을 부릅떴다.
‘저건?!’
적의 오천 병력이 기괴한 대형으로 도열해 있었다.
도열한 채로 앉아서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얼핏 들으면 노래 같기도 했고 경전을 읊는 것 같기도 했다.
화아아악!
차가운 동북의 삭풍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열기가 펄펄 끓어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오천 병력의 대형은 마치 거대한 도형을 보는 듯했다. 외각은 사각의 형태로 펼쳐졌고, 그 안에 원형의 도형과 그림인지 고대 문자인지 알 수 없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저거…… 익숙한데?’
순간 묵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그림.
나아가 연호정과 기천웅의 대화도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우연이었소. 제갈아연이라고, 무림맹 쪽에 머리 좋은 친구가 하나 있거든. 지도상에 신화교도들의 움직임을 표시해 봤는데, 이게 철저하게 하나의 진법 도형을 그리고 있더이다. 뭐, 그게 정말 진법인지는 모르겠지만.’
‘태양군도(太陽群圖)라고 하네.’
‘그게 정확히 뭐요?’
‘태양군도는 화신지(火神池)에 이르지 못한 이들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어.’
‘화신지?’
‘화신지란 신화교의 무공 경지 중 하나를 뜻하네. 당연히 신화무(神火武)를 익혀야만 의미가 있는데, 자네들 말로는 초절정고수가 되어도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절정고수 수준으로도 화신지에 이른 놈들이 존재하지.’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뭔데 그러시오?’
‘신화무의 궁극, 화정(火精)이 상단신기까지 이르렀음을 뜻하는 걸로 화신지에 이른 자들은 남들보다 열양공의 성취가 훨씬 빨라지지.’
‘그런 게 있소?’
‘그런 게 있다네. 화신지는 무재(武才)와는 상관없는 영역이야. 사실상 거의 운에 가깝지. 운이 좋으면 금방 진입하고, 운이 나쁘면 무슨 수를 써도 이르지 못해. 내가 보기에 타고난 상단 재능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네. 당연하게도 화신지에 이르지 못하면 천화경에 오르기도 어렵지.’
‘들어도 알 수가 없구만. 여하간, 그 화신지에 오르지 못한 놈들은 태양군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양군도는 간단히 말해 본교의 술식(術式) 중 일부라고 볼 수 있네. 전설의 화신(火神)을 강림시키는 데에 필요한 의식으로, 그 도형을 성심을 다해 그려 놓으면 화신이 그것을 인지한다고 하지.’
‘그런 데에까진 흥미가 없지만, 나와 붙었던 놈들은 이상할 정도로 그 도형의 형식을 따랐소. 무공부터 위치, 부대의 움직임까지.’
‘화신지에 들면 태양군도의 형식을 취한 무공의 투로에서도 벗어나게 되지. 자네들 식으로 말하자면 초식의 틀을 깨부수는 경지라고도 할 수 있다네.’
‘거 신기하구만. 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전략 전술에까지 대입하는 거요?’
‘신앙과 욕망이지.’
‘……?’
‘태양군도는 화신을 끌어당긴다네. 그 신앙이, 우리의 전술에도 고스란히 묻어 있어. 나아가 태양군도와 함께 강신주법(降神呪法)을 외우면 평소보다 더 원활한 축기가 가능하다네.’
‘빌어먹을, 별의별 게 다 있구만.’
‘하지만 그 주법은 금지되었네. 지나치게 집착하여 무공 성취에 방해가 될 정도였기 때문이지. 태양군도 역시 마찬가지라네.’
‘그런데 지금은 왜……?’
‘신앙의 힘은 엄청난 거야. 내가 교주가 되어 태양군도에 관한 쓸데없는 형식을 다 무너트렸는데, 이놈이 그걸 부활시킨 모양이로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묵비는, 그 태양군도라는 게 단순히 진법이나 무공에 영향을 주는 것 이상의 위력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치 관일무가(貫日舞歌) 같다.’
그녀가 관일곡에 있었을 적, 그곳에는 관일무가라는 것이 존재했다.
신을 향한 사랑을 뜻하는 노래와 춤으로, 축제가 있을 때나 중요한 일을 벌이기 전에 그러한 가무로 나름의 의식을 치렀었다.
심지어 전투를 벌이거나 사냥을 할 때도 관일무가에 집착하는 궁사들이 있었다. 춤까지야 출 순 없었지만, 노래를 중얼거리며 활을 쏴 대는데 그때마다 궁술 실력이 높아지곤 했다.
실제로 그러한 행위가 무공 실력에 영향을 줄 리는 없었다. 말하자면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은 곧 안정을 부르고 광신(狂信)까지 일으킬 수 있다.
묵비는 저들의 태양군도에도 그만한 힘이 있으리라고 보았다. 술법이니 주술이니 하는 것 이전에, 태양군도라는 도형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광신에 가까운 정신 상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모자선이 입을 열었다.
“심상치 않은 술법 같다. 예전 연 성주와 함께 정찰을 나갔을 때, 우리는 저들의 무력 수준을 헤아리기 힘들었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지금은 알겠어. 그때 못지않은 거리인데도 이만큼 화기가 치솟는다면, 지금의 병력으로는 이기기가 쉽지 않아.”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음?”
묵비는 연호정과 기천웅이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모자선의 눈이 깊어졌다.
“광신도다운 도형이군. 한데 왜 연 성주는 그걸 내게 말해 주지 않았지?”
“제가 들었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궁주님께서는 마음을 다스리시고, 결정적인 순간 결전 병기로 나서 주시면 됩니다.”
모자선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묵비의 눈동자는 참으로 맑고 깊었다. 천하의 북해빙궁주가 쳐다보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모자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가 있었지.”
“하지만 두 분 역시 이런 전쟁에서까지 태양군도에 따라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국지전이나 작전 정도라면 모를까, 전면전에서 그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적에게 아군의 약점을 고스란히 알려 주는 행태나 다름없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저들은 저러고 있군.”
“태양군도의 도형과 주법으로 인해 축기의 성능이 올라가고, 덕분에 일대의 화기가 모이고 있는 겁니다. 저것이 끝나면 이 넘치는 화기도 사라질 겁니다.”
“어디 지켜보도록 하지.”
두 사람이 은신한 채 오천 병력을 내려다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노래처럼 웅얼대던 그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
모자선의 기감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네 말이 맞았어. 화기의 밀도가 무서운 속도로 옅어지고 있다.”
“예.”
“어떻게 할까? 전보다 놈들이 더 가까이 왔네. 조금씩 이동하려는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적측에 무극수가 얼마나 있는가입니다.”
묵비가 모자선을 바라보았다.
“궁주님께서 더 진입해도, 상대측의 무극수가 알아채지 못할까요?”
“그가 나보다 강하다면.”
말에 강한 자신이 묻어 나온다. 절대 자신보다 강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이다.
묵비가 다시 한번 적들을 내려다보았다.
기도 같은 운공을 끝낸 그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무척 먼 거리지만, 왠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저물고 있다.’
야간 이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반대쪽에 적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이상.
‘그렇다고 정찰병도 보내지 않을 만큼 바보들은 아니겠지.’
묵비는 빠르게 정리를 마쳤다.
“제영사들에게도 식사를 시키겠습니다. 이후 이 언덕 밑으로 집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은?”
“전투가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모자선의 눈이 반짝였다.
“작전을 말해 봐.”
“제영사부터 이곳으로 오게 한 후, 만반의 준비가 끝나면 그때 궁주님께서 움직이실 겁니다. 만약 적측에 궁주님보다 강한 자가 있다면 곧장 공격하거나 신중하게 준비를 하겠지요.”
“뭐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더 쉬는 게 낫지 않을까?”
“더 쉬다가 놈들이 이동하려 하면, 우리는 언덕 아래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물러나야 하는데, 이 병력으로 물러나면 언제 기습을 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음.”
모자선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만약 놈들이 나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때는 계속 이곳에서 대기하는 것인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궁주님과 제가 날뛰어 봐야겠지요.”
모자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이 궁수가 마음에 들었다.
“준비시켜라. 나도 준비하겠다.”
“예.”
묵비가 빠르게 제영사들에게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