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93)
1093화. 폭우 아래 잔화(殘火) (2)
“나쁘지 않아.”
모자선의 평가는 솔직했다.
“제대로 날이 서 있다. 흥분한 와중에도 감각은 흐트러지지 않았어. 어지간해서는 기습도 통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렇습니까.”
묵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싸워 이길 자신은 있으십니까?”
“있다.”
분명한 자신감이 엿보이는 대답이었다.
“훌륭하게 연마된 무인이지만, 이기지 못할 것 같진 않다.”
“싸움에는 변수가 많다는 거, 궁주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그것도 감안해서 하는 얘기다. 그쪽에서 나를 옭아맬 방법이 없는 한, 일대일 대결에서 패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극에 대한 혐오감에 기인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모자선의 눈은 냉정했다. 실제 승부야 붙어 봐야 아는 것이겠지만, 상극 관계에서 이 정도 차이라면 어떻게든 승리할 수 있다고 보는 듯했다.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실제로 그녀가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기천웅에게도 붙어 보자고 시비를 걸 만큼 자신감 넘치는 그녀였다. 기천웅에 비하면 분명 아래라 할 수 있지만, 제아무리 상극이라도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신이 없다면 함부로 뻗대지 못했을 것이다.
모자선과 함께 강량과 제영사들 앞까지 온 묵비가 말했다.
“적의 전력은 충분히 읽었습니다. 궁주님?”
모자선이 말했다.
“적의 수장은 내가 맡는다. 일대일 겨룸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다. 문제는 나머지 고수들이다.”
강량이 물었다.
“경계해야 할 고수들은 얼마나 있는지요?”
“총 여섯이다.”
“여섯이요?”
“그중 가장 강해 보이는 것은 붉은 머리의 여인으로, 여기 묵 신장에 비해 크게 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강량의 눈이 번뜩였다.
당금 오대신장 중 가장 강한 사람은 단연 묵비였다. 무공 특성도 그러했지만, 실질적인 경지 자체가 한 단계 높았다.
적의 부장 중에 묵비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면, 싸움의 변수를 배제하고 자신이 패배할 확률이 높았다.
“적의 병력은 오천. 전체적인 수준은 대륙으로 들어온 빙궁의 정예보다 떨어지나, 그 숫자가 너무 많다. 전력 자체만 놓고 보자면 저들이 우위에 있을 것이다.”
묵비가 말을 이었다.
“더하여, 저들은 태양군도라는 기괴한 진법 대형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동 중에는 모르겠으나, 만약 평야에서 격전을 치른다면 상식을 파괴하는 술수를 쓸 위험이 있습니다.”
제영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영사의 대표, 한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언덕에서 무조건 승부를 봐야겠군요.”
“반은 그렇습니다.”
묵비가 언덕 아래, 그들이 지나온 길을 가리켰다.
“제영사의 소형 화포와 열골주망(裂骨蛛網)은 대단한 병기입니다. 문제는 한번 발포하면 뒤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초전에 확실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발 빠르게 달려왔다. 다만 먼 길을 가는 중엔 화약과 포탄 관리가 어려워, 최대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한 발씩만 가져왔다.
한 발이라고는 해도 일천 병력 모두가 소지하고 있으니 천 발의 화포가 나간다. 실제 거대한 화포만큼의 파괴력은 없지만, 일발 포격이 제대로 들어가면 절정고수라도 목숨이 날아갈 만한 위력이었다. 초절정고수 역시 작정하고 방어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즉, 포격이 적중만 하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열병기였다. 거기에 열골주망이 쏘아지면 너비만 이 장에 달하는 투명한 철망이 펼쳐져 적을 옭아맬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철망에는 특수하게 제작된 사철이 섞여 있어, 격렬하게 움직일수록 살을 찢고 뼈까지 들어간다.
“문제는 발포 이후입니다.”
묵비가 한비를 바라보았다.
“대장께서는 발포 이후의 제영사 전술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십시오.”
한비가 웃으며 말했다.
“소형 화포를 들고 싸울 수는 없지요. 일천 병력 중 전원이 발포하면 삼백의 예비 인원이 아군의 화포를 넘겨받은 후 후속 부대로 빠질 겁니다. 남은 칠백의 제영사들이 적과 교전하게 되겠지요.”
“좋습니다.”
묵비가 검지를 세웠다.
“적은 내일 동이 트기 전 이동을 시작할 겁니다. 궁주님께서 도청한 결과, 빠른 진군으로 엿새 안에 북경으로 들어올 작정이니 적어도 이 언덕을 넘을 때까지는 정찰병을 운용하지 않을 겁니다.”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만약 운용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땐 정찰병을 모조리 암살한다. 당연히 문제가 생겼음을 알고 또 다른 정찰병들을 보낼 테지만, 그들까지 모두 제거한다.”
강한 자신이 엿보이는 말이었다.
강량은 귀왕무를 자신에게 맞는 패도적인 검법으로 재해석했지만, 귀왕진기 자체가 음한 계열이라 작정하면 암살자처럼 적을 죽일 수 있다.
게다가 묵비의 궁술은 엄청난 사거리와 관통력을 자랑한다. 누가 와도 기습을 당하면 목숨이 성치 못할 것이다.
“끝끝내 정찰병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마침내 대장들이 출격할 거다. 부장이 오면, 부장까지도 우리가 맡는다. 하지만 부장들이 직접 올 확률은 낮아.”
“대장이 오겠지요.”
“맞아. 그렇게 될 확률이 높겠지.”
묵비가 모자선을 보았다.
“그때가 되면, 바로 궁주님이 나서서 최단 시간 내로 적장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좋다.”
“만약 정찰병을 잡은 후, 적의 대장까지 궁주님께서 제거하신다면 그때부터는 싸움이 확실히 쉬워질 겁니다.”
가장 어려우면서도 이상적인 전개다.
하지만 묵비는 적이 정찰병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놈들의 위치는 연호정과 모자선, 기천웅이 정찰을 나갔을 때 주둔했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게다가 남은 시간은 엿새, 설령 기습 부대가 있다 한들 무극에 이른 고수가 선두에 나서서 돌진한다면 충분히 뚫고 갈 자신이 있을 것이다.
“정찰병이 오지 않을 거란 판단하에, 작전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묵비의 작전은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효율적이었다.
그녀의 전술이 간단한 것은 제영사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은폐와 기습에 능한 이들이었다. 더하여 지리적 이점을 차지한 것은 물론, 사람 키보다 작은 소형 화포까지 들고 온 판국이었다.
이 정도가 되면 복잡한 전술보다 간결하고 빠른 전술이 낫다.
“다만, 일차 발포 이후 적의 공세가 예상보다 드세면 우리는 곧장 언덕을 내려가 평야로 달려갑니다. 그때쯤이면 적의 병력 상당수가 사망했을 테니, 치고 빠지는 전략을 쓸 겁니다.”
묵비의 눈이 번뜩였다.
“아군 측에 사상자가 제법 날 수 있습니다. 그 점, 분명히 각오해 두셔야 합니다.”
한비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우리 모두 이곳에서 산화할 각오로 왔습니다. 신장께서는 제영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습니다.”
묵비가 홍련궁을 꺼내 들었다.
“묵행(黙行)으로 도열한 후 은폐, 엄폐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작전은 개시되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후욱.
도열한 신화교도들에게서 엄중한 기세가 일었다.
태양군도가 아닌 부대별로 도열했다. 이 또한 장관이었다.
극패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돌진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들어라, 화신의 자식들아.”
낭랑하게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높은 언덕 위까지 닿을 정도로 우렁찼다.
“저 남대륙의 무도한 불신자들은 우리의 신을 욕보인 것도 모자라, 우리의 형제들을 죽이고 승리의 쾌락 속에서 웃고 있다.”
오천 교도들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적들이 자신들의 신을 어떻게 욕보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교도들의 살의와 광기를 머리끝까지 치솟게 했다.
“놈들의 손에 죽은 우리 형제들의 숫자만 족히 기백을 헤아릴 것이다. 그들은 용맹하게 싸우다 죽었으니 능히 화신의 곁으로 갔을 터, 당당하게 이승을 떠난 그들을 위해 슬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 역시 먼저 간 그들처럼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저 무도한 불신자들을 짓밟고 개화하는 것이다! 그 첫 시작은 언제나 그랬듯, 정화(淨化)일 수밖에 없다!”
화르르륵!
극패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 불꽃이 솟구쳤다.
금제순화공(金帝純化功)이었다. 신화교에서 자랑하는 절정의 신공이 흥분된 마음을 따라 알아서 개방되고 있었다.
“더는 긴말하지 않겠다! 엿새 안에 남대륙의 황성으로 들어가 불신자들의 수뇌부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자!”
와아아아!!
오천 교도들의 뜨거운 함성이 천지를 달굴 듯 폭발했다.
요녕성의 차가운 바람도, 저 멀리 높이 솟은 언덕도 모두 불타오르는 듯했다. 그들의 사기는 정점에 이르렀으며, 두 눈은 하나같이 광기 가득한 목적의식으로 물들어 있었다.
극패가 씨익 웃었다.
“전 교도들은 진군한다!”
명령이 떨어진 순간 다섯 부장의 지휘 아래 도열한 교도들이 진군했다.
그들의 진군은 상당히 빨랐다.
일반 보병들의 진군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적당한 속도의 신법을 펼치는데, 제대로 훈련되었는지 한 걸음 한 걸음의 거리가 일정했다.
극패는 선두에서 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한껏 달아오른 교도들은 대장인 그가 직접 이끌어야 할 것이다.
“화왕님.”
공석인 만큼, 소하구의 어조와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말하라.”
“지금 와서 말하긴 그렇지만, 정찰병을 보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극패가 빙긋 웃었다.
“나의 감각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만에 하나를 대비하고자 함입니다.”
“다음 휴식 때는 그러도록 하지.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 앞에 아무도 없었다. 내 기감에도 걸리지 않았다면, 진정 우리 앞을 막을 자들이 없다는 뜻이다.”
소하구가 미소를 지었다.
“예!”
그렇게 신화교 적화령(積火令)의 오천 교도, 일 단부터 오 단까지의 모든 병력이 언덕의 중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
막강한 화기와 거대한 군기(軍氣)로 집약된 부대원들과 함께 움직이던 극패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뭐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불안감은 놀랍게도, 지난밤 잠시 신경이 거슬리게 했던 그 느낌과 비슷했다.
달리면 달릴수록 그 불안감은 점점 커져서, 이내 실체를 지닌 위압으로 다가왔다.
극패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서둘러 달려 나가 신법을 멈춘 극패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전군 대……!”
그때였다.
훅!
마치 보이지 않는 바람이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한 줄기 백선(白線)이 엄청난 속도로 언덕을 내려와 순식간에 극패의 코앞에 도달했다.
기겁한 극패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펑!
그의 주먹을 튕겨 낸 모자선이 소하구를 걷어찬 후 극패의 멱살을 잡았다.
콰앙!
땅을 박찬 모자선이 극패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그 순간,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묵비가 소하구를 향해 철전을 날렸다.
피유우웅!
소하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자선의 일격에 땅을 구른 그녀가 고개를 쳐든 순간, 이미 묵비의 화살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퍼어억!
소하구의 머리통이 그대로 날아갔다.
묵비가 외쳤다.
“제영사!”
“일선 전진! 이선 장전!”
넓게 펼쳐진 제영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언덕 위로 뛰어올라 자세를 잡았다. 그 숫자가 일백이었다.
한비가 소리쳤다.
“발포하라!”
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