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96)
1096화. 폭우 아래 잔화(殘火) (5)
“무림맹 병력이 도착했습니다!”
관리의 말에 양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것참, 아슬아슬하게도 오는구먼.”
황궁 남문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려면 반 시진은 더 걸릴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안심이었다. 만약 그 전에 적이 기습을 해 오면 황궁 병력만으로 막아야 하는데, 쓸데없는 희생이 많아질 뻔했다.
연호정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미 준비가 되었다.”
아직 적이 오지도 않았지만, 무림맹 병력과 함께 싸울 수 있다 하니 연위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모일 사람은 다 모였군요. 이제 남은 것은 감숙과 섬서, 그리고 요녕의 전투 결과입니다.”
연호정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연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좀 쉬거라.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다.”
“충분히 잤습니다.”
“눈 밑이 시커멓다.”
“새삼 제갈 군사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같으면 이런 짓거리, 석 달도 못 버틸 것 같아요.”
머리를 굴리느라 힘든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전투를 맡기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이다.
물론 흑암제 시절, 혈육처럼 믿었던 오대신장들에게도 많은 전투를 맡겼지만, 지금은 그때와 차원이 달랐다.
신뢰로 엮인 이들을 부려 가며 전세를 뒤집는 것과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지역까지 주시하며 판세를 읽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어지간하면 네 부친 말 좀 들어라.”
양천이 연호정의 어깨를 토닥였다.
“무림맹 병력은 우리가 맡을 테니 들어가. 세상에 인재가 많다지만 너는 지금 황궁 군사부의 핵이다. 상황에 따라서 언제 다른 지역으로 투입될지 모른다.”
“쩝.”
“푹 쉬는 것도 일이다. 가서 씻고 쉬거라. 몸에서 쉰내 난다.”
“안 나는데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개코니까요.”
“그럼 곧 날 것 같으니까 얼른 가, 이놈아!”
연호정이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역정 내지 마십시오.”
어지간히 힘들긴 한 모양이었다. 툴툴대는 모습을 본 연위와 양천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럼 잠시 쉬었다 오겠습니다.”
“잠시가 아니라 푹 쉬어라.”
그렇게 연호정은 거처로 갔다.
씻으려고 했는데, 하루만 푹 잘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오만 게 다 귀찮았다. 결국 그대로 침상에 엎어졌다.
‘무극이고 나발이고.’
이런 피곤함은 경지의 고하를 타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워서 눈을 감자,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누울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연호정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요녕은 괜찮을 거야. 묵비와 강량이 워낙 눈이 좋으니까. 거기에 무극수 하나, 기습에 능한 화포병들…….’
자연스레 감숙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당가주님의 안목 역시 천하를 논할 만하다. 전술안은 묵비보다 뒤질 수 있겠지만, 전국(全局)을 보는 안목이 높아.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도 언제 치고 빠질지를 잘 구분하겠지.’
피곤한 와중에도 그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문제는 공동파인데…… 기질들이 워낙 강하고 거칠어서 통제가 잘되려나 싶군. 하긴, 당가주님 성격에 안 되면 죄다 중독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잘 이끌 테지만.’
그래도 중원 전체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다. 기질의 문제를 떠나, 하나가 되어 적을 상대할 것은 분명했다.
‘이겼을까? 적어도 지진 않을 것 같은데. 설령 피해가 크다고 해도 당가주님이 직접 개입했다면 어떻게든 막판에 판세를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감숙에 대한 생각은 또 자연스레 섬서로 이어졌다.
‘섬서라…… 솔직히 섬서가 제일 모호해. 검제 노선배와 형님이 이천 병력을 끌고 갔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기병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기병.
감숙의 마인 부대가 광혈이고, 요녕에서 치고 들어온 것이 신화라면, 섬서에서 내려온 기병은 분명 사음일 것이다.
연호정이 눈을 떴다.
빙글빙글 돌던 천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기병…… 분명 그때 기병은 없었는데.’
과거 흑암제 시절을 뜻함이었다.
‘아니, 기병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수가 수백에 불과했어. 치고 빠지는 데에 능하기는 했지만, 정예 부대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동전에 능하고 평야에서의 파괴력이 뛰어나 중급 이하의 부대들이 애를 먹었지만, 정예와 붙었을 때는 피하기만 급급했지.’
당연한 전략이었다. 어떤 부대라도 급이 안 맞는 상대와 싸우느니 후퇴하는 게 낫다.
‘은호마병(隱虎馬兵)이었지, 아마?’
실제로 부딪친 적이 없어서 기억이 흐릿했다. 하지만 이름만큼은 지금도 기억이 났다.
전쟁 초기에 활약했던 사음의 기병 부대. 오백 인원으로 화북 지대 이곳저곳을 휩쓸어 상당한 피해를 주다가 검신 모용군이 보낸 정예 검사들에게 모조리 썰려 나간 놈들이었다.
‘일만 기병이라?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지. 실제로 내가 역사를 바꾸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놈들이 왜 느닷없이 기병의 숫자를 늘렸을까?
‘사음교의 무공은 하나같이 음습한 파괴력을 지닌 것들이었다. 침투경만큼은 중원의 어떤 무공보다도 강하고, 특히 초절정고수의 오감도 속일 만큼의 기괴한 진기 운용이 압권이야. 그런 놈들이 기병을 일만이나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푹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질 않는다. 그의 머리는 오직 전쟁만을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연호정은 흑암제 시절에 붙었던 사음교의 고수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운용하던 부대도.
‘참 까다롭기도 했다. 특히 그놈들의 물량전이 엄청났어. 실질적으로 사음교 하나만으로 흑백 양도의 무림인들이 우수수 죽어 나갔으니까. 적어도 머릿수만큼은 삼교 최고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사음교, 사음교.
연호정의 눈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그 개새끼들은 꼭 내 손으로 조져 버려야 하는데 말이야. 광혈과 신화가 아무리 속이 검다 해도 그놈들만큼은 아닐 텐데…….’
확실히 피곤하긴 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정신이 선명해지는 듯싶더니 빠르게 눈이 감겨 왔다.
그렇게 연호정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사람이 잠에 빠지면 그 순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연호정은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바로 인지했다.
‘어라.’
사방이 어두웠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잘하는 짓이다. 푹 자자고 했더니만 잠들어서도 정신이 깨어 있냐.”
쓴웃음을 짓던 연호정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 도끼는 광룡부도 아니었고 흑백쌍룡부도 아니었다.
‘이건?’
연호정의 눈이 형형해졌다.
‘풍뢰부(風雷斧)?!’
흑암제 시절 사용했던 애병.
사음교주와의 마지막 격전으로 함께 생을 마감했던 흑도 제일의 병기였다. 광룡부처럼 천하에서 보기 드문 철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강철을 통짜로 만든 엄청난 중병(重兵)이었기 때문에 흑도 제일의 병기가 되었다.
물론 그 병기를 흑도제일인이 썼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꿈에서라도 다시 봐서 그런지 반가웠다. 풍뢰부를 가슴께까지 들어 올린 연호정은 웃으며 도끼날을 매만졌다.
“참 살벌하게도 다뤘지.”
광룡부와 같은 신병(神兵)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러 날을 뭉툭하게 만들었다. 괜히 휘두르다가 날이 상하거나 부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꿈은 참 진짜 같군. 촉감부터 온도까지, 진짜 풍뢰부랑 똑같잖아?”
그때였다.
“그래?”
연호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어디 실력도 그때 그대로인지 볼까?”
순간 그의 배후에서부터 폭풍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호정의 몸이 반사적으로 회전했다. 손에 쥔 풍뢰부가 우레와 같은 굉음을 토해 내며 횡으로 휘둘러졌다.
쩌어어어엉!
엄청난 공명음과 함께 연호정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잘도 막는군.”
“……너?”
“멋진 실력이다. 횡격 일참만으로 귀가 다 멍해질 정도야. 당금 천하에 이 정도로 혼(魂)이 담긴 일격을 구사하는 자는…….”
파아아아악!
질풍처럼 달려든 연호정의 풍뢰부가 무자비하게 휘둘러졌다.
쩌저저저정! 콰아앙!
본능적으로 구사하는 무공은 놀랍게도 공격 일변도의 무공, 호왕구벽세(虎王九霹勢)였다.
황룡공이 아니라 사신무(四神武)다.
사신무 중 백호공(白虎功)이 펼쳐진 것이다. 연호정은 그것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인지가 되는 순간, 황룡신왕공을 연성하며 잊었던 백호공의 투로가 머리에 떠올랐다.
“뭐 해?”
어느새 미지의 사신(邪神)이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연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개새끼가!!”
콰앙!
얇은 회초리처럼 휘어지며 고속으로 휘둘러지는 풍뢰부가 거대한 진기의 방패를 만들었다.
북천십이벽(北天十二壁)이었다. 극에 이른 방어 무공으로 화포의 포격까지 막아 낼 수 있다는 현무(玄武)의 기예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현무공의 투로와 진기 운용법이 순식간에 상단전에 각인되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사신이었다. 그때도 원수였고 지금도 없애 버려야 마땅할 사음의 수장이 눈앞에 있었다.
“죽어!”
훅!
최단 거리를 이동하는 혈익휘천(血翼揮天)에 이어 궁극의 살법인 홍염육살공(紅焰六殺功)까지 튀어나왔다.
불타오르는 도끼의 살법이다. 일격, 일격이 치명상을 유도하고 있었다.
도끼를 막아 내는 사신의 몸이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연호정의 얼굴에 하얀 미소가 어렸다.
그때, 사신의 손이 기기묘묘하게 움직이더니 연호정의 복부로 파고들었다.
팔에 뼈가 없는 것 같았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무공, 이름은 모르지만 분명 사음교주가 구사했던 살법이었다.
연호정의 두 발이 측방으로 움직이는 동시에 풍뢰부가 회전했다.
치리리링!
은밀한 살법을 받아 내며 더 강한 힘을 비축한다.
청룡공(靑龍功)의 청룡답운보(靑龍踏雲步), 그리고 용군삼형(龍群三形)이었다.
사음교주의 힘을 그대로 비축한 그가 풍뢰부를 찔러 넣듯 휘둘렀다. 용군삼형의 마지막 초식, 용왕회천포(龍王廻天砲)였다.
콰아아앙!
포격 같은 무공에 사신이 사라져 버렸다.
“…….”
무섭게 부릅뜬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연호정이 천천히 자세를 풀었다.
순식간에 사신무의 무공들을 전부 구사했지만, 그의 머리에는 오직 사신만이 있었다.
“……어디로 간 거지?”
꿈에서 봐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죽일 수 있다면 정말이지 수만 번도 더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승과의 만남으로 연호정은 이 감정이 사신무 특유의 격정적인 호승심의 일부라는 걸 알았다.
‘상관없어.’
학습된 감정인지 뭔지 알게 뭔가. 중요한 건 놈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고, 놈을 죽일 수 있다면 연호정은 무슨 수라도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호정은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에, 더 이상 사신은 없었다.
“진짜로 사라져 버렸나?”
정말로 없다. 기척도,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뭔…….’
쓴웃음을 짓던 그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세상이 달라졌다.
‘여긴?’
그때, 한줄기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군.”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가슴이 녹아 죽은 자신과 모용군, 그리고 당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