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97)
1097화. 폭우 아래 잔화(殘火) (6)
“…….”
어느 정도 접근한 막원의 걸음이 멈추었다.
주르륵.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안색까지도 창백해졌다.
‘뭐지?’
적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곳에서 족히 오 리(五里)는 떨어져 있었다.
천무신병기를 철저하게 죽이고 이동 역시 고요하게 진행했다. 전문 암살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무극에 오른 무공에, 무종문에서 심심파적으로 익힌 보법까지 동원해서 이동 중이었다.
한데 왜일까?
보이지 않는 그물이 온몸을 옭아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발 하나 떼기는커녕 호흡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이게 뭐야?’
막원은 본능적으로 천무신병기를 운용할 뻔했다.
천무신병기는 금기(金氣)를 기반으로 한다. 무극에 이른 후 오행의 상생상극에서 많이 자유로워졌지만, 기운의 특성은 그대로인지라 뿜어져 나오는 순간 숲의 목기(木氣)를 제치고 팔방으로 뻗어 나갈 것이다.
즉, 이질적인 무극의 기를 적이 알아챌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그는 진기를 불사르지 못했다.
하지만 신공을 발산하지 않으면 이 알 수 없는 무형의 그물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막원은 초인적인 인내심과 노력으로 발을 뒤로 뺐다. 마치 가위에 눌린 사람이 어떻게든 사지를 움직이려 하는 것과 비슷했다.
스륵.
한 발을 뒤로 빼자 몸을 옭아매는 그물의 압력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막원은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물의 압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그렇게 무려 십여 장이나 뒤로 이동하고 나서야 그는 본래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설마 술법인가?’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술법이었다면 그가 몰라볼 리 없었다. 막원은 오직 무공만을 익혔으되, 무극에 이른 자이기 때문에 어떠한 현상을 두고 무공인지 술법인지 구분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즉, 이것은 술법이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술법일 수도 있지만…… 그 특유의 술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렇다면?
‘무공도 아니다.’
무공도 술법도 아니다.
이건 그냥 기(氣)였다. 압도적인 기력으로 자신의 몸을 묶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밖에 판단할 수가 없었다.
막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도대체 누가?!’
당연히 진법이나 기관진식 따위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성천삼군의 일인으로서 지닌바 무공이 이제는 왕급에 준하는 그를 누가 있어 이리 압박할 수 있단 말인가.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압력이었다. 만약 내 몸을 기력으로 묶은 자가 정말 사람이라면, 그의 무공은 정말이지…….’
천외천(天外天)일 것이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저마다 깨달음이 다르다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 무력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극에 이른 막원은 여느 범부는 상상도 못 할 이 세상의 일면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만이 아니라 무극에 오른 모두가 그러할 것이다.
다만 누군가는 그 일면이 궁금해 집착할 것이고, 누군가는 오직 강해지는 것만이 목표라 그런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막원은 명백히 후자였다. 아마 대다수의 성천이 그러할 것이다.
스으으.
그는 조용히 기감을 열었다.
순간 그의 눈이 흔들렸다.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들이 어느 방향에, 얼마나 멀리에 있는지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감각이 흐려진 게 아니라,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파아악!
막원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내달렸다.
이번에는 그 무형의 기력이 몸을 묶지 않았다. 막원은 놀랐지만, 또 한편으로는 왠지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없다!”
일만 기병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거라 예상되던 평야에는 뜯어먹힌 풀과 바람만이 가득했다.
‘도대체 어디에……?!’
그때였다.
“헉!”
하늘을 올려다본 막원은 기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것도 몰랐던 것이다.
‘이런 미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막원은 강호에 출도한 이후 이렇게까지 당황스러운 순간은 처음 맛보았다.
우우우웅!
천무신병기가 전신에 가득 찼다.
그제야 막원은 자신의 오감이 흐려졌다는 걸 깨달았다. 흐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은 오판이었다. 오감은 물론 기감까지도 충분히 흐려지고 둔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무려 반나절이 넘도록 숲에서 홀로 헤매고 있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 와중에 의문도 있었다.
정말 대단한 누군가가 기력만으로 자신을 옭아맸다면, 그 누군가는 필시 적대적인 의지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도 자신을 놔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던 막원은, 순간 눈을 빛냈다.
“돌아가야 한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정찰하러 왔는데 일만 기병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지금쯤 분명 남하하고 있을 것이다.
파아악!
백강비를 펼치는 막원의 발걸음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 * *
‘이럴 수가.’
연호정은 이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죽기 직전에 본 광경이었다. 무림맹주 검신 모용군과 만독제 당관, 그리고 흑암제인 자신 셋이서 사음교주를 토벌하러 왔던 곳이었다.
즉, 지금 그가 보는 광경은 자신이 죽은 뒤의 상황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꿈에서 스승과 나누었던 대화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당시 스승이 건넸던 말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이 그 자리에 존재했다. 나아가 스승의 사념이 이 몸 안에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분명히 자신이 죽은 뒤의 상황이었다. 육신은 이곳에 있을지라도 혼은 다 빠졌을 텐데, 어떻게 꿈에서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내 무의식인가? 말 그대로 꿈일 뿐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이 공기가 너무 익숙했다.
이 장소에 드리워진 공기가 아닌, 반투명한 자신을 에워싼 꿈속의 공기.
‘설마 진짜로?’
그때, 당관이 피를 토했다.
“우웨엑!”
쏟아 낸 핏물이 대지를 적셨다. 피로 물든 땅이 허연 연기를 피워 올리며 녹기 시작했다.
아무리 독인이라도 피까지 독은 아니다. 물론 내공의 힘으로 독혈(毒血)을 뿌리는 게 가능이야 할 테지만, 토해 낸 피에 독이 섞일 리는 없다.
즉, 정상이 아니란 말이었다. 독정이 깨져 온몸으로 퍼진 것이다. 당관의 생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긴, 심맥이 파열되었으니까.’
당관의 가슴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사음교주의 음황지에 뚫린 상처였다.
“괜찮은가?”
“퉤!”
피가 섞인 침을 뱉은 당관이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을 리가 있겠나.”
맹주와 부맹주 사이라지만, 사적으로는 나이 차이가 거의 없는 둘이었다. 당관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반말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모용군이 쓰게 웃었다.
“이렇게 다 죽게 생겼군.”
“……왜냐.”
“뭐가 말인가.”
당관이 연호정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흔들렸다. 꿈속의 연호정은 당관의 눈빛에서 깊은 죄책감과 좌절감을 엿볼 수 있었다.
“왜 저 녀석을 죽이라고 했느냐.”
“죽여야만 하니까.”
당관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모용군을 노려보았다.
“재수 없는 놈이기는 해도 저놈은 진짜였어. 진심으로 천하를 위해 나선 놈이었다. 말 한마디 섞기 싫은 흑도 놈이지만, 적어도 나나 너보다는 나았단 말이다.”
“그랬지.”
“심지어 우리는 동맹까지 맺었다.”
“…….”
“나와 네가 죽는다고 동맹 맺은 후배 놈을 죽이라고 해? 흑제성을 막을 사람이 없다고? 너 정말 무림맹주가 맞는 거냐?”
“그럼 거부하지 그랬나.”
“…….”
“거부했으면, 저 녀석은 죽지 않았을 터인데.”
당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모용군을 노려보는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흉신악살을 방불케 했다.
“무림맹주의 명령이었다. 나는 할 수밖에 없었어.”
꿈속의 연호정은 슬픈 눈으로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은 지쳐 있었다.
오랜 전쟁에 지친 사람은 민초만이 아니었다. 사음교와 맞서 싸우는 많은 무림인이 지쳤고, 또한 미쳤다.
당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선에서 싸웠고, 죽지 않은 무사들을 다독였다.
그런 세월이 반복되면서 당관의 정신도 많이 망가졌다.
그는 부맹주로서의 자신과 사천당가 출신으로서의 자신을 철저하게 분리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미친 전쟁을 멀쩡하게 진행할 수가 없었다.
실명해 버린 모용군의 탁한 눈에도 서글픈 빛이 어렸다.
“며칠 전, 첩보를 받았다네. 흑제성주에 관한.”
“…….”
“흑제성주가 신화교 측과 결탁하고 있었다더군.”
“……뭐라고?”
“믿을 만한 곳에서 얻은 정보였어. 사실일 확률이 아주 높았지.”
“빌어먹을! 그걸 말이라고 해?!”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그깟 정보보다 사람을 봐야지! 저놈 덕에 무림맹의 무사들도, 심지어 나조차도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몇 번이나 빠져나왔다! 그런 놈이 신화교와 붙어먹었다고? 그게 말이 되냔 말이다!”
“…….”
“이제 중원은 끝났어. 사음교 하나 박살 냈다고 끝인 줄 알아? 광혈은 아직 가진 병력의 반도 보여 주지 않았다. 신화교는 황궁을 점거해서 아예 나라까지 세울 기세야! 저놈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우리의 후예들은 재기의 발판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안하네.”
“지금 미안하다는 말이……!”
“나도 모르겠네.”
“뭐?”
모용군의 얼굴에서 생기가 빠져나왔다.
“나도, 나도 이젠 모르겠어. 나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네. 오해하지 않을 글도, 오해하지 않을 소문도 백번, 천 번을 더 생각하게 되었어.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게 사실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네.”
“…….”
“만에 하나, 천만 분의 하나라도 흑제성주가 신화교와 결탁하고 있다면…… 우리 후예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걸세.”
“……빌어먹을.”
“나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네.”
결국 모용군 역시 당관과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수많은 죽음 앞에서, 검신이라고까지 불리던 모용군의 정신도 망가져 버렸다. 그는 더 이상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했고,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했다.
치이이익.
당관의 다리가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한번 녹기 시작하니,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다리가 사라지자 곧장 복부까지 사라졌다.
당관이 눈을 감았다.
“미안하…….”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당관은 한 줌 핏물이 되었다.
꿈속의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전쟁은 궁극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무극수들조차도 미치게 만든다. 책임을 진 사람일수록,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시 시작했으니까.’
그때였다.
스륵.
뭔가 움직이는 소리에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목이 달아난 사음교주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처럼,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뭐야?!’
모용군도 이상함을 느낀 듯했다.
“거기 누군가? 무림맹의 무사인가?”
목 없는 사음교주가 한 발, 한 발 모용군에게 다가갔다.
모용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삶이 다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누구냐고 묻지 않는가!”
사음교주의 양손이 모용군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강제로 벌려지는 모용군의 입.
잘린 사음교주의 목에서 한 줄기 뿌연 연기가 흘러나와 모용군의 입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