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98)
1098화. 폭우 아래 잔화(殘火) (7)
“허억!”
잠에서 깬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허억, 허억.”
호흡이 격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 경지에 이른 후, 목숨 걸고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신체의 이상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식은땀으로 가득한 몸은 오한으로 떨렸다. 핏발 선 눈동자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뭐였지?’
이상한 꿈이었다.
꿈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연호정의 상단전은 자신이 꾼 꿈이 ‘현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꿈이지만, 연호정은 자신의 이성보다 직감을 더 믿었다.
‘그놈이 왜?!’
사음교주, 그 쳐 죽여 마땅할 놈의 목을 베어 버린 순간을 기억한다.
금이 간 풍뢰부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나아가 금강불괴(金剛不壞)에 가깝도록 만들어 주던 사음교주의 내공 역시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제때 후려치지 않으면 풍뢰부와 함께 자신의 팔까지 부서질 것이고, 제때 휘두르면 가증스러운 놈의 목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던 연호정은 사음교주의 빈틈을 정확하게 노렸다.
그 결과 사음교주의 목을 베었고, 그 ‘승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목이 잘린 시체가 저 혼자 일어나 걸었다.
육신이, 목이 잘린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뛰다가 쓰러지는 경우는 보았다. 소규모든 대규모든 집단끼리의 전투에서 적아를 구분하기란 힘든 일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을 움직이는 것 이외의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무림맹, 흑제성, 그리고 삼교의 병사 중에서도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 채 사망한 이들이 많았다. 아래턱이 사라진 것도 모른 채 함성을 지르려 하는 자들, 팔이 날아갔는데도 없는 팔을 휘두르려 하는 자들, 머리 한쪽이 뭉개졌는데도 깨닫지 못한 채 적을 죽이려 하는 자들 역시 있었다.
하지만 목이 날아가 ‘쓰러졌던’ 몸이 다시 일어난다?
그것은 무극수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무극수를 넘어 신선이라도 그런 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연호정은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도대체가…….’
그저 불길한 꿈이라고 생각하고 넘겨 버리면 그뿐이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신경 쓸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사음교주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연호정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게 되었다.
광혈교주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아무리 악마 같은 인간이라도 사음교주만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는 똑똑하고 파격적인 데다 누구보다 막강했으며, 인간의 두뇌를 가진 맹수처럼 중원을 공략했다.
‘설마 아니겠지?’
목이 잘리고도 움직인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진짜 이상한 것은 사음교주의 잘린 목에서 흘러나온 정체 모를 연기가 모용군의 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연기가 무엇일까? 연호정은 알 수 없었다.
머리로는 알 수 없었지만, 극에 이른 직감으로는 그 연기가 사음교주의 죽음을 반전시킬 수 있는 무언가라는 걸 깨달았다.
‘말도 안 돼. 죽음이란 결과를 되돌리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바에야…….’
그 순간, 연호정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결과에서 살아난 사람을 그는 본 적이 있었다.
‘나?!’
그렇다. 그 자신이 바로 그러했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에게 일어난 일은 사음교주의 그것과 다소 달랐다.
연호정은 본래 일어났어야 할 일, 분명하게 존재했던 과정을 역행했다. 그 혼자만 살아난 게 아니라 이 세계의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것이다.
말하자면 시간의 역행이다. 연호정이 살아난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하나의 ‘변화’일 뿐, 그 시대의 몸을 갖고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음교주는 달랐다. 그는 시간을 역행하지 않고서,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반전시키려는 것 같았다.
결과는 보지 못했지만, 시도되었다는 것 자체가 역천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식은땀이 멎었다.
오한은 여전했지만, 연호정의 표정은 본래의 냉정함을 되찾았다.
“……광혈의 사제장이란 놈들도 그러했지.”
사천, 그리고 청해.
그곳에서 그는 타인의 몸을 빌려 강림한 죽은 이의 혼을 보았다.
물론 타인의 육신을 빌려 살아난 그들의 무공은 반쪽짜리에 가까웠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진짜 고수란 정기신(精氣神)을 일통한 사람이다. 혼(魂)의 영역인 신(神)만을 끌어와 다른 사람의 몸에 덧씌워 봤자, 온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생전의 경지가 워낙 대단했기에 반쪽이 된 무공으로도 어지간한 고수들은 상대가 안 되는 무공을 구사했지만, 진짜 고수들과 마주하면 또 한 번 얻은 생이라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불사라.’
삼교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불사를 이루려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신화교는 화정으로 불사에 접근하려 했다. 기천웅을 봤을 때, 결국 신화교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화정은 육신의 재생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으나, 목이 잘리거나 오장육부가 심대한 타격을 받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광혈교는 이혼겁백의 술수로 불사에 접근하려 한 걸로 보인다. 혼이 타인의 몸에 빙의하여 온전한 통제권을 쥐었으니, 어떤 의미론 신화교보다 그럴듯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부작용은 화정보다도 훨씬 더 심할 것이다. 화정 역시 대자연의 섭리를 무시하는 술법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상식선은 지키는 술법이기도 했다.
반면 광혈교의 이혼겁백은 그야말로 전통적인 역천술법이다. 실제로 무수히 많은 사마외도 집단이 이혼겁백에 도전했고, 광혈교를 제외한 모두가 실패하였다.
그렇다면 사음교는?
‘놈들은 대체 어떤 식으로 불사를 이루려 하지?’
그때, 다시 한번 꿈의 광경이 떠올랐다.
목이 잘린 채로 움직여 모용군의 입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기를 쏟아 넣은 사음교주.
그것이 불사로의 길이라면, 사음교 역시 광혈교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길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죽은 몸뚱이가 스스로 움직였다는 부분에서 기괴함이 돋보이긴 하지만.
“빌어먹을.”
욕설을 뱉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 꿈은 대체 뭐지? 그게 사실이라고? 사실이라도 이상해. 나는 그 시간대의 일을 모른다. 내가 죽고 나서 벌어진 일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거냐.’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연호정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밖에 여길 수 없었다. 이성은 끊임없이 불가능을 외쳤지만, 직감은 시간이 더할수록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확신시켜 주었다.
“젠장, 귀신에게 홀린 것 같군. 느닷없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교주 놈과 싸우질 않나…….”
순간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연호정은 꿈속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몇 번을 떠올리고, 몇 번을 잊으려 했다. 그리고 다시 또 떠올려 보았다.
“……이럴 수가.”
멍하니 허공을 노려보던 연호정은 천천히 주먹을 뻗었다.
부웅. 부웅.
느리게 뻗는데도 방 안의 공기가 요동을 치는 것 같았다.
일정한 틀이 없지만 저돌적인 공격성을 보이는 동작이었다. 물러섬 없이 적을 파괴하는 극공(極攻)의 술수였다.
“백호공?!”
연호정은 발도 움직여 보았다.
제법 널찍한 방을 오가며 주먹을 휘두르는 그의 얼굴에 점점 놀라움이 어렸다.
“사신무가 돌아왔다?!”
현무, 백호, 주작, 청룡.
황룡을 깨우친 이후, 마치 누군가가 개입하여 기억 일부분을 잘라 낸 것처럼 사신무의 투로를 잃었다.
한데 지금 그 모든 것이 떠올랐다. 잃었던 것을 되찾은 생소함도 적었다. 너무도 익숙하여 알아서 손발이 나갔다.
몇 번이나 사신무를 펼쳐 본 연호정은 황룡신왕기를 끌어올렸다.
쿠구궁.
명치 부근, 거대한 호수 아래에서 살고 있던 금빛 용이 고개를 쳐들었다.
‘정상이다.’
황룡신왕공은 그대로다. 사신무를 제외하더라도 지금껏 자신이 배우고 익힌 모든 무공을 다 기억했다.
연호정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뭔가 이상하긴 했다.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황룡을 깨우치고 나서 사신무를 잊어버린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어.’
스승을 떠올렸다.
스승은 황룡을 이룬 고금 제일의 강자였으나 사신무장으로서의 정체성도 잃지 않았다.
어린 자신에게 섬세한 동작을 가르쳐 주는 스승의 몸놀림엔 익숙함만이 가득했다. 황룡을 깨우쳤다고 사신무를 잊진 않았단 말이다.
그러나 자신은 황룡을 깨우치며 사신무를 상실했다.
연호정은 그것이 ‘그릇’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스승의 그릇은 넓고 깊어, 이 세상의 모든 무(武)를 품에 안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반면 자신은 재능이 별로 없었다. 그 재능으로 황룡에 이른 것만도 기적이다. 하지만 황룡이라는 위대한 힘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버려야 하는 것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신무의 상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황룡신왕공 자체가 무(武)로써 도(道)에 이르는 길이었다. 황룡신왕공이 무의 궁극을 논하는 무공이라면, 그릇의 크기를 떠나 사신무를 잊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도대체가 모르겠네, 정말.’
절대 알 수 없을 시기의 꿈을 꾼 것도 모자라 그간 잊고 있던 사신무까지 돌아왔다.
연호정은 해석되지 않는 이 상황에서 혼란 이외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호정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한번 여쭤봐야겠군.”
사음교주에 관한 것은 잠시 접어 둔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신’이니까.
방을 나선 연호정은 아버지를 찾아갔다.
자신의 전생을 알고, 나아가 심검(心劍)이라는 위대한 경지를 개척한 아버지라면 정답까진 아니더라도 훌륭한 답변을 해 주실 수 있을 것이다.
* * *
안타깝게도 연호정은 아버지에게 곧바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호정아!”
“아버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연호정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황궁의 분위기가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엄청난 긴장감과 은은한 두려움, 나아가 폭발할 것 같은 전의(戰意)가 뒤섞여 있었다.
“설마 적이 온 겁니까?!”
“그렇다. 수상한 움직임은 오늘 아침에 포착되었다. 정찰병의 정보로 볼 때, 지금쯤 삼십 리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대기 중일 것으로 보인다.”
다급한 와중에도 연호정은 어리둥절했다.
“아침이라니요? 저는 그런 정보를 받은 바가 없습니다만.”
“네가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곧 깨우러 갈 생각이었지만.”
연위가 하늘을 가리켰다.
“네가 잠이 든 후 벌써 닷새가 지났다.”
“예?!”
“역시 몰랐구나. 네 경지가 대단하니 굳이 음식과 물이 필요치 않으리라 생각해 놔두었느니라.”
이런 빌어먹을!
연호정이 다급히 외쳤다.
“현재 병력 편성이 어떻게 됩니까? 아니, 제가 직접 황궁 북성으로 가 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편성은 미리 다 해 두었으니까. 일단 가자꾸나.”
두 부자가 단숨에 황궁 북성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