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99)
1099화. 폭우 아래 잔화(殘火) (8)
“무상을 뵙습니다.”
용선진인의 인사에 화산의 도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남궁승이 고개를 저었다.
“인사는 고맙네만, 나보다는 소맹주가 윗사람일세. 그 부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네.”
“아, 죄송합니다.”
모용우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말이 소맹주일 뿐입니다. 지금은 전시니만큼 강자야말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화산의 어른들께서는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소맹주. 전시이기 때문에 더더욱 위계가 중요한 법이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모용우가 용선진인에게 물었다.
“현재 적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용선진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찰병의 정보로는 오십 리 밖에서 주둔 중이라 합니다. 일정 이상 거리로 진입하면 들킬 수 있어, 최대한 먼 거리에서 보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모용우가 좌측으로 고개를 틀었다.
“종남은 좌측 길을 막았군요.”
“정확합니다.”
용선진인의 얼굴은 심각했다.
“놈들의 이동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그러면서도 들르는 마을을 모조리 파괴했습니다. 인근 문파들이 나서서 몇 차례나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적의 기병에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하고 전멸했답니다.”
모용우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 살기가 어찌나 예리한지 용선진인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같은 초절정고수인데도 모용우의 기세에 등골이 서늘했다.
‘엄청나군. 그사이에 더 강해졌다.’
소맹주라 하여 꼭 다음 대의 무림맹주가 되라는 법은 없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고, 소맹주가 아니라 무림맹주의 목숨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이다.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 자칫 무림맹이 와해되고 새로운 조직이 탄생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모용우의 재능이 누구보다 대단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저 흑백무제 연호정 같은, 초월적인 괴수를 제외하면 차세대 무림을 대표할 만한 고수가 바로 모용우였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화산 장문인을 능가하는 무력이라면, 적어도 무력과 재능만큼은 이 대(二代) 맹주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민간인이 죽었다는 사실에 잠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모용우는 짧은 심호흡으로 평정을 되찾았다.
“이쪽 병력이 많긴 합니다만, 만에 하나 적의 기병이 무림 병력을 피해 남하하면 큰일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용선진인이 뒤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화산의 일대제자 중 하나가 커다란 지도를 가져왔다.
섬서 지도였다. 거의 중원 전도에 가까운 크기로, 화산과 종남이 합작하여 만든 보물이었다.
“적이 대단해도 기병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샛길이 많다지만 말들이 주파할 수 없는 길 역시 적지 않지요. 그런 지역을 모두 배제하면, 결국 놈들은 중앙 돌파를 시도할 가능성이 큽니다.”
“음.”
“실제로 놈들은 일직선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단숨에 섬서의 성도를 쳐서 혼란을 유발할 생각일 겁니다.”
모용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용선진인의 말을 그대로 믿진 않았다.
용선진인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보기 위함이었다.
“실례되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진인께서는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떠한 오해도 없이 받아들일 터이니, 소맹주께서는 가감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혹, 화산의 검진은 산중이나 오지에서의 능력이 평지보다 떨어집니까?”
용선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압니다. 기병을 맞이하면서 굳이 평야를 앞에 두고 병력을 주둔시켰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화산은 물론 종남의 검진 역시 지형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번 싸움에서 적을 반드시 몰살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멸도, 괴멸도 아닌 몰살이다.
말 그대로 단 한 기의 기병도 남겨 두지 않고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섬서 북부에 비해 중부 이하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미리 대비하여 북부로 화산의 검사들을 파견하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적들은 빠르게 남하하고 있습니다.”
“즉, 적들이 샛길로 빠져 성도 인근에서 난장을 치면 안 된다는 뜻이로군요.”
“정확합니다. 현재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무림과 관계가 없으면서도 강호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보다 더 귀한 재산이 없다고 한들 싸움으로 집까지 잃는다면 얼마나 허망할 것입니까.”
용선진인의 눈이 번뜩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적을 맞아, 모두 몰살할 것입니다.”
전선 밖으로 적을 보내지 않겠다.
그 의지는 훌륭했지만, 모용우는 용선진인과 종남의 판단이 결코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화산과 종남, 섬서의 두 기둥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을 것이다. 적의 수가 일만이나 되었지만, 이쪽 역시 화산과 종남 그리고 무수히 많은 속가가 있다. 화산, 종남에게서 갈라져 나오지 않은 섬서의 문파들도 참전하였다.
그 숫자가 육천에 이르렀다. 거기에 무림맹 병력 이천까지 합세하였으니 병력만 도합 팔천이다.
나아가 익숙한 지형을 선점했으니 지리적인 이점도 안고 싸우는 것이다. 그들은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그러나.
“오해 없이 들으신다고 하니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화산과 종남의 의지는 대단하지만, 전술적인 판단은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화산의 장로들이 얼굴을 굳혔다.
용선진인이 침착하게 물었다.
“어찌 그렇습니까?”
“단 한 명의 기병도 통과시키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은 말 그대로 마음가짐에서 끝내야 합니다. 고래로 기병과의 싸움을 평야에서 맞겠다는 전술가는 없었습니다. 기병이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 바로 평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제대로 된 무공을 연마하지 않은 고대 국가에서의 전술입니다. 말에게 무공을 배우게 하지 않는 한, 무림인의 파상공세 앞에서 기병들은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모용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선진인은 물론 화산의 장로들과 각 문파의 수장들까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용우는 한숨을 쉬었다.
“하면 여쭙겠습니다. 이중 기병과의 실전을 겪어 본 분들은 얼마나 되십니까?”
손을 든 것은 몇몇 중소 문파의 수장들이었다.
북부 기마 민족 일부가 섬서까지 치고 들어온 일이 꽤 있었다. 그들과 싸운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기마 민족의 치고 빠지는 전술과 저들의 전술은 다릅니다. 수도 그렇고 개인의 무용 역시 천양지차입니다.”
“하지만 소맹주.”
“결정적으로 삼교는, 우리 중원 무림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술에 능합니다. 죽은 사람의 혼을 산 사람의 몸에 강제로 덧씌우거나 팔다리가 날아가도 금세 재생시키는 등의 기괴한 술수를 쓰지요.”
“……!”
“그런 그들이, 심지어 초전에 기병을 보냈습니다. 전략 전술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초전의 중요성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초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쟁 시작부터 최고 정예를 보내는 조직도 많았습니다.”
“…….”
“고래로 적을 맞이함에 있어 어떤 식으로든 얕보는 것은 금물입니다. 적의 입장에서 생각해 작전을 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전쟁인바, 이번만큼은 화산과 종남의 대응이 어설펐습니다.”
안 그래도 굳어 있던 화산 장로들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졌다.
물론 그들은 모용우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종남과 함께 섬서의 맹주 역할을 하는 그들의 자존심은 다른 구파보다도 강했다.
게다가 중소 문파의 수뇌들이 함께한 자리였다.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하니 기분이 좋을 순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용선진인은 끝까지 침착했다.
“하면, 소맹주께서는 우리 병력이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대로 있어야 합니다.”
“예?”
모두가 놀라서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모용우는 더 이상 한숨을 쉬지 않았다. 전투가 코앞이었다. 지휘관으로서, 무림맹의 소맹주로서 표정 관리를 해야만 했다.
“이곳에 주둔하며 지형에 맞춰 부대를 나누고 검진을 형성했을 겁니다. 이미 이곳을 전장으로 삼았는데, 급작스레 전술을 바꿔 치고 나가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화산의 검사들에게 그 정도 융통성은 있다고 말하려던 용선진인은 이내 얼굴을 붉혔다. 모용우 뒤에 서 있던 남궁승이 혀를 차는 걸 봤기 때문이다.
모용우가 힘 있게 말했다.
“화산의 힘이 대단하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압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최악을 상정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하면…….”
“저희가 움직이겠습니다.”
“예?”
“무림맹 이천 병력이 먼저 적들을 맞겠습니다. 이후 화산과 종남이 저희를 돌파하는 적들을 맞아 싸워 주십시오.”
용선진인은 깜짝 놀랐다.
“안 될 말입니다! 섬서는 섬서 무인들이 지켜야지요! 무림맹에서 지원군을 보내 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나, 첫 전투를 지원군에게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사기의 문제이기도 했다. 적과 싸우기 위해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섬서 병력의 사기는 상당했다. 무림맹이 먼저 적을 맞게 되면 크게 당황할 것이다.
“그 사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부대장들을 독촉해 주십시오. 화산이 이곳을 전장으로 삼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단순히 몰살을 위해서가 아닌, 검진과 부대 운용을 최대로 이끌기 위함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것은…….”
“전쟁에서의 전투는 공(功)이나 자존심을 배제한 채,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
“마침 저희와 함께 온 병력은 모두 야전 경험이 풍부한 이들입니다. 적의 수준을 알 길이 없지만, 군대의 반응이 빠르니 어떤 식으로든 기병들을 옭아맬 수 있을 겁니다.”
남궁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안 되면 적당히 싸우다가 후퇴하는 방법도 있겠지.”
“그렇습니다. 저희는 적을 섬멸하려는 게 아닌, 적들의 수준을 알아보고 최적의 상황으로 이끌기 위해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니 화산에서도 그에 맞는 준비를 해 주십시오.”
가만히 모용우를 보던 용선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맹주의 말씀, 알아들었습니다. 저희가 이번 전투를 지나치게 쉽게 보았군요.”
모용우의 얼굴에 안심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래도 용선진인이 제 말을 투명하게 알아들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정보를 받기 전까지 무림맹 병력 운용에 관해 짧게나마 작전을 짜겠습니다. 그때까지 섬서의 병력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지시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수뇌부들을 보낸 모용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남궁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가서 한 소리 할까 싶네만.”
“아닙니다. 장문인께서 알아들으셨으니 되었습니다.”
“답답한 사람들이로고. 민간인들을 휘말리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좋지만, 적이 바보가 아닌 바에야 그냥 당해 주겠나.”
“적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한 번도 그래 보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 호수를 퍼서 바다를 채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겁니다.”
“우리가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것은 직접 부딪쳐 보지 않는 이상 모를 일입니다.”
모용우의 눈이 서쪽으로 향했다.
“작전을 준비하며 종남 쪽으로 사람을 보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