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08)
1108화. 호아마병(虎牙馬兵) (8)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도다.’
콰릉!
휘두르는 일검에 기마병 하나가 통째로 절단이 되었다.
사람의 몸은 물론 기마까지도 두 동강 내 버리는 엄청난 검력(劍力)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른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무서운 마병이 말과 함께 죽어 나간 것이다.
‘사음의 첩자가 되어 화산에 들어온 지 팔십 년이 넘었구나.’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화검자는 문득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새외 무림의 첩자임을 알고도 자신을 거두어 준 스승.
세뇌가 될 대로 되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인형은, 어느새 스승의 가없는 사랑과 은혜로 차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첩자로서의 생을 끝내고 화산의 검이 되어 오랜 시간 연마하니, 어느새 화산제일검(華山第一劍)이라 불리며 만인의 존경을 받았더랬다.
파바바박!
흩어지는 수십 개의 꽃잎은 하나하나가 응축된 검기라, 그 꽃잎에 휩쓸린 기병 다섯이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팔방으로 휘날리는 꽃잎.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자욱한 핏물.
‘화산제일이란 말은 허명일 뿐이야. 그런데도 나는 그 말에 집착했지.’
그의 재능은 발군이었다.
정확히는 재능만 따지자면 그보다 더 대단한 인재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검에 미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수련은 마치 하루하루 경전을 외는 광신도의 그것과 비슷했다. 화검자는 화산에서 새사람이 되었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준 화산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자신을 떠받드는 화산 검사들의 말에 취해 도인으로서, 그리고 검사로서의 본분을 잊었다.
나태했고 오만했다. 그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검 끝에서 피어오르는 매화는 색이 바랬고, 팔방으로 치닫던 해사한 검기는 빗물에 젖은 먹처럼 흐려졌다.
그와 같은 오만함을 품에 안고, 그간 반복했던 수련만 되짚고 있으니 당연히 무극에 이를 수가 없었다.
그 오만을 벗어던지는 데에 무려 이십 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천재도 많고 천의(天意)를 깨우친 자도 많다. 내가 아니어도 이 세상에 맑은 빛을 뿌리는 자들이 한가득한데,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아등바등 집착하고 살았나.
그렇게 그는 집착을 버렸다.
놀랍게도 집착을 버리니 새로운 검로(劍路)가 보였으며, 새로운 검로는 곧 또 다른 경지를 향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화검자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무인으로서 무극에 이르는 것보다, 도인으로서 도(道)에 젖는 것이 무엇보다 올바르고 행복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길을 걷는다고 무극에 이를 거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 길을 걷게 되면 좋든 싫든 도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하여 화검자는 그 검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저 화산의 품에 다시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다만, 새로운 깨달음을 거부한 것과 별개로 그의 내공과 신기(神氣)는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어느 정도로 깊어졌느냐 하면, 내공량과 깨달음의 깊이만큼은 능히 무극수에 비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의 화검자는 그 힘을, 도인으로서 얻은 힘을 화산의 적을 상대로 쓰고 있었다.
퍼퍼퍽!
화검자의 검로는 우아했다.
아름답고 현기가 넘쳤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다들 본인의 무공조차 잊은 채 병장기를 마구 휘둘러 대는 것과 사뭇 대조적인 광경이었다.
하늘하늘한 움직임에는 어떠한 박력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검을 휘두르면 적이 죽어 나갔다. 적게는 하나, 많게는 서너 기의 기마병이 피떡이 되어 산화했다.
그렇게 화검자의 검 아래 죽은 마병의 숫자만 벌써 팔십 기가 넘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 백수를 넘긴 노도사 혼자 작은 부대 하나를 궤멸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놀랍지 않습니까, 사형.”
목강의 말에 목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놀랍고도 대단하다. 사부님의 저 호리호리한 몸 어디서 저처럼 놀라운 힘이 샘솟고 있는 건지.”
쩌저저정! 퍼어엉!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목자 배 여섯 진인의 검공(劍功)도 대단했다. 화검자만큼 수월하진 않았지만, 절정의 암향표를 구사하며 이십사수(二十四手)의 매화검을 펼치니 기마병들은 반격조차 못 하고 마구 죽어 나갔다.
그렇게 화검자를 필두로 한 여섯 진인이 죽인 적의 기병만 무려 백오십이었다.
노익장이라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전과였다. 비록 돌격을 위해 후미의 공격 절반 이상을 무시했다고는 하나, 기병들의 갑옷과 기마의 피부 강도를 생각하면 절대 폄하할 만한 전과가 아니었다.
푸화악!
또 한 번 기마 두 기를 통째로 베어 넘기는 스승의 뒷모습을 보며, 목양은 서글픔을 느꼈다.
‘사부님.’
집착에서 벗어난 도인에게 남은 것은 등선뿐이다.
목양이 볼 때, 자신의 스승은 충분히 깨달음을 얻고 등선할 만한 분이었다. 그런 사람이 화산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고 나와 적을 죽이고 있다.
그 오랜 세월 쌓아 온 도인으로서의 적공을 모조리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목양은 스승을 막으려 했다.
당연하게도, 스승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목양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제들과 함께 스승을 보필하는 것이었다. 물론 화산을 위한다는 명목도 있었지만.
‘저희 못난 제자들은 도(道)와 거리가 멉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스승님과 함께 검사로서 말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겠지요.’
그렇게 얼마나 적을 몰아쳤을까.
훅!
순간적으로 공기가 변하는 기분이 들었다.
목양의 눈이 흔들렸다.
“스승님!”
화검자의 검이 처음으로 벼락이 되어 움직였다.
쩌어어어엉!
한 자루 묵직한 장창을 쳐 낸 화검자의 검이 미친 듯한 울음을 토해 냈다.
화검자의 팔뚝에 기다란 상처가 났다. 공격을 흘려 냈음에도 뿜어져 나온 창격의 예기가 상처를 입힌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격이었다. 적어도 화산의 전대고수 중 누구도 받아 내기 힘든 무공임에는 분명했다.
“놀랍군.”
어느새 그들 앞에 도착한 소현종이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다.
“화산의 전대고수들인가?”
“네놈은 누구냐.”
손해를 봤음에도 화검자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소현종의 눈이 반짝였다.
“너희 같은 송장들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이만 죽어라.”
“고약한 아해로고.”
번쩍!
해무용섬의 용광섬(龍光閃)이 벼락이 되어 화검자를 노렸다.
“스승님!!”
목자 배 진인들이 다급히 달려와 막으려 했지만, 소현종의 용광섬은 그들의 움직임을 한참이나 상회했다.
쩌어어엉!
또 한 번 강력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소현종의 눈이 살짝 커졌다.
“쿨럭!”
화검자의 허연 수염에 피가 묻어 나왔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부가 진탕되어 피를 토했을 뿐, 그 외에는 멀쩡했다. 몸 어디에도 구멍이 난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스승님!”
“호들갑 떨지 말아라. 너희는 끝까지 적을 추격하여 놈들의 숫자를 줄이도록 해라.”
담담한 목소리에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목양이 외쳤다.
“사제들은 후미를 붙잡아 두게! 나는 스승님과 함께하겠네!”
“너도 가거라.”
“안 됩니다! 이놈은 괴물입니다! 스승님이라도……!”
쉬이익! 퍼어어엉!
목양에게 휘어져 날아온 경풍이 화검자의 일장(一掌)에 폭발했다.
목양의 눈이 흔들렸다.
조금 전, 그 벼락과도 같은 일격은 실로 대단했다. 보이긴 했지만 막기는 어려웠을 터, 그런데도 스승은 적의 공격에서 자신을 구해 준 것이다.
“가라. 스승으로서의 명령이다.”
목양은 이를 악물었다.
이번 한 수로 깨달았다. 자신의 존재가 스승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걸.
믿기 싫지만 사실이었다. 즉, 스승의 말마따나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좋다.
하지만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승의 목숨을 취할 난적을 앞에 두고, 어떤 제자가 자리를 뜰 수 있겠는가.
화검자가 버럭 소리쳤다.
“어찌하여 그 나이 먹고도 대의(大義)를 보지 못하는가! 곧 떨어질 꽃잎 한 장이 아까워 불타는 들판을 내버려 둘 참이던가!”
호통과도 같은 한마디.
결국 목양은 이를 악물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짙은 혈향이 담겼다.
화검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대단한 자비심이군. 설마하니 기다려 줄 줄은 몰랐는데.”
소현종의 볼이 씰룩거렸다.
기다려 주었다? 그 말은 틀린 것이다.
소현종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노인이 풍기는 알 수 없는 기운은 놀랍도록 성스럽고 풍부하여, 절정의 마공을 연마한 그조차도 쉽사리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마에 이른 자도 아닌데 어떻게?!’
그때, 화검자가 검을 바로 세웠다.
“많이 다쳤군. 본래 기량의 삼 할 실력이나 선보일 수 있을는지.”
“걱정하지 마라. 너 같은 늙은이 따위, 스무 합도 걸리지 않는다.”
퍼어엉!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
섬전장보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소현종이 양손으로 장창을 마구 휘둘렀다.
파바바박!
손끝에서 흩어진 장창은 마치 만개한 꽃과 같았다.
환창(幻槍)이지만 동시에 환창이 아니다. 그 창날 하나하나는 실제 창격과 똑같은 위력을 지녔다. 발경과 기세로 밀어붙여 단숨에 목숨을 앗아 갈 심산인 것이다.
‘대단하구나.’
화검자는 적의 공격 하나하나를 전부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실력 이전에 상극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도(道)를 좇으며 연마된 화검자의 내공은 가히 순수한 정(精) 그 자체라, 역천의 마공을 익힌 자의 공격을 흐름부터 읽어 낼 수 있었다.
즉, 구사하기도 전에 어떻게 움직일지를 포착했다는 것이다. 무극에 이르지 않아도 세월의 깊이가, 깨달음이 그것을 가능케 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상극, 신(神)과 선(仙)이 사(邪)와 마(魔)를 억제할 수 있는 이유였다.
‘이처럼 놀라운 무공을 마(魔)라는 먹물에 담가 놓았으니, 천하 명검에 독을 발라 둔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화검자의 검이 장중한 움직임을 토해 냈다.
여러 개로 갈라진 소현종의 창 한가운데로 곧게 나아가니, 그 안에 자하(紫霞)의 힘이 있어 만마(萬魔)를 불사른다.
소현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콰앙!
가볍게 지른 일검에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결을 따라 번지는 화산 제일 자하신공(紫霞神功)의 진기다. 극한의 연마로 순수해진 내공에, 소현립의 마공 구결이 중반부터 얽혀 제 위력을 내지 못했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소현종이 한껏 살기를 피워 올렸다.
“늙은이!”
쾅!
또 한 번 달려드는 소현종.
화검자는 눈을 감았다.
‘뒤.’
번쩍!
정면으로 달려들던 소현종이 어느새 화검자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경신술이었다. 가히 이형환위(移形換位)에 가까운 술수였다.
찰나지간, 화검자는 탄식을 토해 냈다.
‘명검도 어울리는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제 쓰임을 다하지 못하는바. 만마를 제압할 힘이라 한들 이 늙은 육신은 그것을 제대로 풀어 내질 못하는구나.’
몇 합을 더 끌어 봤자 패배는 확실하다. 상극으로도 무극에 오른 자와 오르지 못한 자의 차이를 메우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목숨으로 네 녀석의 팔 하나는 가져갈 수 있겠다.’
퍼어어억!
등을 뚫고 들어간 장창이 아랫배로 튀어나왔다.
그 순간, 화검자의 손은 소현종의 손목을 틀어쥘 수 있었다.
부르르르르!
창에 뚫리는 고통조차 마다하지 않은 화검자.
전신에서 끌어모은 자하진기가 폭포수처럼 움직였다.
“크으윽!”
소현종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떤 고통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참아 낼 수 있는 그였지만, 손목을 통해 들어온 이 불쾌한 기운이 전신의 마기를 흩어 내는 기분이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괴롭고 끔찍한 것이었다.
퍼버버버벅!
화검자가 쥔 소현종의 팔 곳곳이 폭발하며 대량의 출혈을 일으켰다.
소현종의 안색이 대번에 하얘졌다.
“이, 이놈!”
퍽!
발로 화검자를 떨쳐 내고 나서야 자유를 얻은 소현종은, 문득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소현종이 몸을 돌렸다.
번쩍!
검과 하나가 되어 날아온 번개가 어느새 소현종의 앞까지 도달했다.